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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74화 (74/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74화

에반은 첨탑에서 정원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페르메티스 윈체스터, 초반의 회차에서 자신의 동료였던 여자였다.

페르메티스는 여러 번이나 제게 마음을 고백했었고, 그때마다 오셀로를 배신했었다.

그녀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낀 적 없기에 단칼에 거절했었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에반은 여자를 믿지 않았다. 남자도 믿지 않았고.

고고하거나 신실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결국 새카만 속을 드러내는 것은 질리도록 보았으니까.

“@#$%!”

화가 난 채 정원을 나서는 페르메티스가 혼자서 욕을 하고 있었다.

샤샤 윈체스터, 또 한 건 한 모양이군.

에반은 진과 대화를 나누는 샤샤를 응시했다.

당찬 눈동자에서는 생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생기는 어둠의 영지를 환하게 물들인다.

“…….”

잠시 후, 샤샤가 자리를 떠나고 진이 홀로 남았다.

진은 시선을 돌려 첨탑의 에반을 바라보았다.

짙은 녹안에는 서늘한 기운이 파도치듯 담겨 있었다.

에반 또한 짙은 푸른 눈으로 그 시선을 응대했다.

진의 심장을 꿰뚫었던 십수 번의 회차에서 에반은 늘 그 순간, 아쉽다고 느꼈다.

강자의 목숨을 끊는 것은 늘 씁쓸한 감정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진은 모든 회차에서 언제나 악인이었다.

성장할수록 잔혹해지고 무자비해지는, 윈체스터의 후계자.

“…….”

살기라 착각할 정도의 차가운 눈으로 에반을 응시하던 진은 이내 시선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에반이 알기로, 진은 이런 식으로 경고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결국 변화의 바람은 다시 피어오르는 에라시니스에서 불어오는 것이겠지.

에반은 첨탑에서 내려왔다.

장차 진의 수족이 될, 윈체스터 방계에서 보낸 아이들의 마차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반!”

정원에서 나온 샤샤가 녹색 눈망울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볼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했고 입술은 어쩐지 기뻐 보였다.

“오랜만이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자신의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있잖아. 아무래도 우리 둘 다에게 좋은 일이 생긴 거 같아.”

목소리만은 조금 들뜬 것을 숨기는, 차분한 톤.

그리고.

“그런데 여기.”

샤샤는 에반의 손목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앙증맞은 손으로 에반의 손을 잡아 올렸다.

첨탑을 내려오다가 긁혀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어쩌다 이런 거야. 다쳤잖아.”

조심하라는 듯 눈썹을 찡그린다.

에반은 한참 그녀를 응시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치료해 줘.”

“뭐? 청명으로 약한 상처는 회복할 수 있잖아.”

“……귀찮아.”

샤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능 쓰면 아프다고 했잖아.”

“이능 말고.”

에반이 나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붕대 같은 거 있잖아.”

* * *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에반은 내게 치료를 부탁했고, 내 방에 에반을 데려온 나는 손목에 붕대를 감아 주고 있었다.

“…….”

보기에는 소년이지만, 이십 년 이상을 살아간 게 스물일곱 번이나 되는 인물.

혼자 세상을 회귀시키며 지탱시킨 영웅이기도 하지만 쉽게 믿을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됐어.”

나는 테이프를 붙이고는 다시 붕대를 상자 안에 넣었다.

할 이야기가 있기에 마야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우리는 아직 리소니아를 차고 있으니 마야도 걱정스러운 표정만 지을 뿐, 안 된다고 나서지는 못한다.

“카실리온 아카다가 올 거래.”

발뒤꿈치를 들어 상자를 올려놓은 나는 에반에게 말하며 에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에반은 표정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반갑거나, 놀란 표정을 기대했는데.

역시 별 감흥은 없는 것 같았다.

스물일곱 회차에서 카실리온은 에반의 동료였던 적이 많으나, 카실리온의 몸에서 페르세토스가 부활한 적도 있었다.

그런 순간들이 인간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게 만든 것일까.

“그래서?”

에반은 조금 식은 차를 마시며 물었다.

“네가 카실리온을 머물게 해 줘.”

카실리온은 에반을 굉장히 따랐다.

원작에서 둘의 브로맨스는 많은 부녀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었지.

에반과 커플로 엮이는 후보 1이 카실리온일 정도였으니.

“왜.”

“도움이 될 거야. 카실리온의 능력을 알잖아?”

아카다에도 다른 가문의 아피니제처럼 가주를 지지하고 견제하는 기관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탑이었다.

마탑주는 가주를 제외하고 가장 강렬한 이능을 가진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예를 들어 카실리온 아카다라든지.

“그 녀석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에반은 달갑지 않은 대답을 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도움이 되지 않아. 모두가 그렇듯.”

나는 일어서는 에반을 말로 붙잡았다.

“이젠 내가 있잖아!”

내 목소리에 에반이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너무 자의식 과잉이었나, 싶었지만 나는 말을 계속했다.

“그 패배주의적인 말 좀 그만하면 안 돼? 마지막 순간이니 뭐니.”

에반을 한번 노려본 뒤 나는 말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힘을 합쳐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지 몰라.”

카실리온은 나와 동갑인 꼬맹이일 뿐이다.

아직 그 애의 능력이 밝혀지지 않은 시기였지만 나와 에반 둘 다 알고 있었다.

희대의 천재 카실리온은, 엘릭서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약물의 개발까지 성공한다는 것을.

그리고 잠깐 위탁 교육을 온 카실리온의 발을 이곳에 오래 묶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에반뿐이다.

“나는 그 애가 필요해.”

나는 정적 속에서 에반에게 그리 말했다.

에반의 푸른 눈동자 표면에 결연한 표정의 내가 맺혀 있었다.

그의 입술이 오묘하게 비틀리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착각일까.

잠시 후 에반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 * *

“미친놈 아냐?”

나는 투덜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에반이 했던 말이 귀에 맴돌았다.

― 싫어.

― 뭐……?

― 그 녀석은 영 좋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지?

― 천천히 가더라도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낫다. 너로 인해 모두가 달라졌으니, 그 녀석도 달라질 가능성이 높고.

에반이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어서 반대야.

분명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자기는 실패해도 회귀하면 그만이겠지만 난 확실한 승리가 필요하다고.

“하아, 짜증 나.”

원작에서나 회귀를 거듭한 에반의 기억 속에서나 카실리온 아카다는 극강의 까다로운 인물이다.

에반이 아니면 길들일 수 없는 예쁜 쓰레기란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쓸모가 많은 인물인데.

짜증과 고심이 섞인 채 코너를 돌았을 때였다.

긴 회랑의 끝,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고 해를 뒤로한 작은 체구가 보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는 아카다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허리까지 닿는 머리칼은 태양처럼 밝게 반짝였다.

내가 걸어서 그 앞에 멈추자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보라색에 붉은 기가 섞인 것 같은 자줏빛 눈동자가 보였다.

아이는 히끅대며 입을 열었다.

“언니, 저어…… 길을 잃어버려써요.”

카실리온 아카다.

장차 최연소 마탑주가 될 아카다의 떠오르는 별.

그러나 천재라는 명성만큼이나 괴랄한 성격으로 제국에 악명을 드리우게 될.

소녀…… 아니, 소년과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언니 아니야.”

카실리온이 눈이 빨간 채 고개를 갸웃했다.

“난 너랑 동갑이야. 샤샤 윈체스터라고 해.”

불안할 때는 정면 돌파가 최고다.

그리고 지금은 카실리온이 어릴 때이니, 순진한 구석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도와주면서 친분을 쌓는다면 에반 없이도…….

“거짓말.”

내게서 한 발짝 물러선 카실리온의 자주색 눈동자에 순식간에 경계심이 깃들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어. 거짓말하는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어.”

“뭐?”

“너…….”

카실리온이 나를 향해 천천히 검지를 들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이 내 귓가에 톡톡히 박혀들었다.

“윈체스터가 아니잖아.”

카실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카실리온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샤샤 윈체스…….”

“그런데…… 그런데…… 너는 윈체스터가 아닌 거짓말쟁이인데…….”

나를 가리키는 카실리온의 검지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참을 수 없이…….”

예상외의 반응에 내가 어떻게 대처할지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카실리온이 내게 달려들었다.

“……!”

달려들었다기보다는, 끌어안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카실리온은 바싹 얼어 있는 내 목덜미를 두어 번 킁킁대더니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은 재료의 냄새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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