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76화
“그런데…….”
우리는 나란히 회랑을 걷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어오지만, 아직 겨울 외투까지는 필요 없는 날씨였다.
“카실리온에게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에반에게 물었다.
최근 일주일 동안 카실리온이 에반과 있는 모습을 세 번이나 보았기 때문이다.
“…….”
에반은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작이나 ‘푸른 매의 비밀’과 조금 달라진 것은, 카실리온이 에반을 꽤 경계하는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에반이 카실리온에게 뭔가 협박을 했다는 소문도 들리고.
뭐, 이러다가도 나중에 따르기는 하겠지.
“넌…….”
에반의 입술이 달싹였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에반이 영 심각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듯한 표정 같기도 하고.
잠시 후 에반이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클지 모르겠군. 이렇게 겁이 없어서.”
뭐가 불만인지는 몰라도 ‘커서 뭐가 될지’와 비슷한 말투이다.
“농담하는 거야?”
“…….”
“엄청 여러 번 봐 놓고서.”
나는 에반에게 툭 말을 던졌다.
그 말에 에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너.”
에반은 뭔가에 찔린 듯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나는 발걸음을 빨리해서 에반을 앞서갔다.
* * *
“세상에, 인형 같으세요, 아가씨.”
“인형이라니. 세상 어떤 인형이 이렇게 아름답겠어.”
“이건 비밀인데, 북쪽 건물에서 아가씨를 꼭 닮은 인형을 본 적 있어요.”
마야는 소란스러운 하녀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나는 이번에 새로 맞춘 비취색의 슈미즈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뭐 내가 거울로 봐도 인형 같기는 했다.
새 드레스를 맞추는 것은 내가 썩 좋아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라서 치수도 항상 다시 재야 하고 반나절 정도는 기약 없이 흘러가니까.
몸이 영 좋지 않다는 핑계로 미룰 때도 많았지만 꼼짝없이 양보해야 할 때도 있다.
“아가씨,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레카르도와의 식사 시간.
일전에 드레스를 맞추는 것을 계속 미루다가 소맷단이 짧은 드레스를 입고 식사에 든 적 있는데, 그 뒤 상징적인 의미로 저택이 발칵 뒤집혔다.
나에 대한 예산이 어디로 사용되고 있는지 시녀장부터 나서서 소명해야 했고, 마야는 크게 혼이 났다.
그러니 조금 불편하더라도 드레스 맞추는 것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
나는 첫 개시한 드레스를 입고 레카르도와의 식사 자리로 향했다.
문을 열자 레카르도가 먼저 와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알려 준 식사 시간보다 30분이나 이른 시간이지만, 그를 기다리게 했으니 내가 먼저 사과할 수밖에.
“앉아라.”
오늘은 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항상 진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물었다.
“진 오라버니께서는 바쁘신 모양이에요.”
“수행하는 임무가 있어서 사흘 후에나 돌아올 예정이다.”
이제 청소년기가 된 진은, 후계자이자 어엿한 윈체스터 가문의 일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진처럼 임무를 수행하게 될까?
“사흘 후라면 어둠의 기일에는 참석하실 수 있겠어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혈족들이 모이는 그날이 또 찾아온다.
“내 대신 가주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 오라버니가요?”
“그래, 나는 파라메나에 일이 있어서 불가피하게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윈체스터 영지의 사람들은 보통 이곳과 가까운 남쪽에 많이 거주한다.
북쪽의 파라메나는 험준하다고 들었는데…….
“부디 조심히 다녀오세요. 감기에 걸리지 않게 옷은 따뜻하게 입으시고요.”
나는 레카르도에게 걱정을 담아 말했다.
레카르도는 잠시 나를 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말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군.”
진이나 다른 누군가가 레카르도에게 감기에 걸리지 말라고 걱정할 리가 없긴 하다.
레카르도는 잔에 담긴 와인을 홀짝였다.
내 앞에는 오렌지 주스.
어느덧 음식들이 점점 줄어 간다.
“너도.”
레카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식을 먹던 나는 문득 레카르도를 바라보았다.
“건강에 유의하도록 해라.”
레카르도의 눈빛이 진지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열심히 관리하고 있어요.”
생명력의 수치가 원체 낮은 편이어서인지, 감기만 걸려도 며칠을 앓아눕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지룡의 말린 비늘과 같은 아이템으로 생명력의 절대 수치를 높이고 있으니, 언젠가는 나도 보통 사람들처럼 건강한 몸을 갖게 되지 않을까?
퀘스트도 열심히 수행하고 있으니 또 유용한 아이템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희망사항이지만 말이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내 말에 레카르도는 한참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버지가 딸을 걱정하는 것이 감사할 일은 아니지.”
그 말에 나는 흠칫했다.
아버지, 딸, 가족. 분명 레카르도와 그런 사이이기는 하지만 뭐…… 아직도 우리 사이는 편하지는 않다.
그와 식사를 앞두면 긴장하는 것이 당연하고, 평소의 절반밖에 먹지 못한다.
꼭 레카르도가 희대의 악당 가문의 공작이어서는 아니다.
내 이전 생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추억은커녕 이렇게 단둘이 식사를 해 본 적도 없었다.
“……네.”
조금 얼떨떨하게 답하자 레카르도의 입술 끝이 피식 비틀리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레카르도가 나를 보고 말했다.
“그런데 그 드레스는 처음 보는 것 같군.”
* * *
식사를 마친 나는 바로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레카르도가 산책을 권했기 때문이다.
밥을 먹고 바로 잠드는 것은 좋지 않으니, 건강을 위해서라면 괜찮은 방식이기는 했다.
“신체의 강함도 중요하지만.”
나는 긴장한 채 레카르도의 옆에서 걸었다.
서늘한 어둠 속에서 레카르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의 강함이 근본이라고 할 수 있지.”
헥토르 할아버지에게도 매번 들었던 이야기이다.
“네. 알고 있어요, 아버지.”
신체의 강함과 정신의 강함이 둘 다 겸비되어야 진정한 흑염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샤샤, 너는 정신적으로 강한 아이다. 하지만 정신의 강함과 마음의 유약함은 공존할 수 있지.”
맞는 말을 하고 있지만, 나는 레카르도가 내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네…….”
하지만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허튼 자가 대화를 걸거나 눈에 띄면 거절하는 것이 낫다. 격에 맞지 않는 자도 마찬가지이고.”
“네…… 네?”
“거절을 습관화하거라. 마음이 유약해지면 강한 정신도 흔들리기 마련이니.”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곁에서 걸을 뿐이었다.
무슨 맥락인지 알아야 대답도 하지.
잠시 뒤 레카르도가 말을 이었다.
“에반 테일러스라든지.”
그 말에 나는 손을 흠칫했다.
레카르도를 보자 어둠 속 형형한 눈빛이 보였다.
“버릇을 들인다고 했지만, 감히 힐끔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 영 짜증 나는군.”
아무래도 내가 종종 에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영 거슬렸던 모양이다.
적대적 관계의 가문이니 어쩔 수 없겠지.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간단한 이야기를 왜 이렇게 돌려 해서 긴장하게 하는 걸까.
잠시 후 정원 한 바퀴 산책을 마친 우리는 저택 입구로 돌아왔다.
보이지 않았던 로웬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에는 저택의 경비대원들도 많았다.
로웬은 나를 보고 반갑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네, 로웬 경. 좋은 저녁이에요.”
이제 레카르도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동쪽 헛간에 수상한 자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어 경비병들을 교육하고 있었습니다.”
“경비를 강화하고 잡히는 즉시 보고하라.”
“존명.”
레카르도와 로웬이 나누는 대화에 나는 괜히 속이 뜨끔했다.
헛간이라면…… 바몬트와 네빌에게 내가 했던 짓 때문인가?
‘조금 찔리네.’
“아버지, 저는 그럼 이만…….”
사흘 뒤 북쪽 영지로 간다고 했으니, 어쩌면 다음 주에는 함께 식사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샤샤가.”
레카르도에게 인사하려는데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오늘 새 드레스를 맞추었다고 하더군.”
나는 레카르도의 말에 조금 놀라 얼었다.
여기서 갑자기 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지?
오늘 마신 와인의 도수가 센 모양이다.
잠시 멍하니 나를 보던 로웬은 그제야 뭔가 깨달았는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아름다우십니다. 비취색 드레스가 마치 요정과도 같아요.”
이윽고 로웬이 뒤쪽의 병사들을 훅 돌아보았다.
“아름다우십니다.”
“요정이 강림하신 줄 알았습니다.”
“공작 전하,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를 두셨으니 식사를 하지 않으셔도 언제나 마음이 충만하실 것 같습니다.”
마지막 경비병은 입담이 꽤 뛰어난 자 같았다.
레카르도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칭찬을 듣고 있더니 내게 말했다.
“이만 들어가 보아라.”
서늘한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일말의 자부심.
나는 잠시 뒤 얼떨떨한 표정으로 레카르도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설마 방금…… 내 찬사를 듣기 위해 운을 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