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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77화 (77/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77화

드디어 어둠의 기일이 다가왔다.

파라메나로 떠나는 레카르도를 배웅한 나는 하녀들이 입혀 주는 드레스를 입었다.

“아가씨, 긴장 푸세요.”

마야는 내 어깨를 주물렀다.

오늘이 다른 어둠의 기일과 다른 점은 오늘부터는 나도 내 물건을 넣게 된다는 것이다.

어둠의 잔은 불꽃을 통해 이능의 특징과 그 강함을 표현한다.

혈족들은 어둠의 잔을 통해 누가 강하고 약한지를 파악하게 되고.

그러니까 내 신고식인 셈이다.

걱정이 되는 부분은 내 이능이 ‘흑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잘하실 거예요.”

“잔이 노하는 건 아니겠지?”

어둠의 잔은 윈체스터 일족들의 흑염을 판단한다.

다른 일족이 물건을 넣으면 공격한다는 전설도 있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도 어엿한 윈체스터이신걸요.”

마야는 내 걱정을 가라앉히려 격려해 주었다.

그래, 설령 다른 이능이라 해도 내가 윈체스터임은 틀림이 없는데 잔이 나를 공격하겠어?

마음을 진정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 * *

“아가씨가 넣으실 물건입니다.”

로빈은 내 머리 끈과 같은 끈을 내밀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로빈에게 물었다.

“하지만 내 물건을 넣어야 하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내부에도 적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가씨의 정보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옳지 않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공작 전하께서?”

“네.”

레카르도는 오늘을 위해 다른 물건을 준비한 모양이다.

확실히…… 내가 이능을 발현했다는 것은 이미 다 퍼졌지만, 나의 이능이 어떤 종류인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아는 자들이라곤 기껏해야 4대 가문의 핵심 인물들뿐이다.

내가 ‘메키우스의 열쇠’라고 밝히고 죽은 바네사의 일 이후, 가주들끼리 회의를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조용한 것을 보아하니 금언령을 내렸을 수도 있겠지.

“알겠어.”

나는 로빈이 건넨 머리 끈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로빈.”

“네, 아가씨.”

“요즘 진 오라버니와 훈련하는 거 같던데…….”

나의 호위 기사인 로빈은 내가 방에 있는 동안은 종종 자리를 비웠다.

“아, 예.”

로빈이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의 기사가 되고 싶다면 말해. 로빈은 좋은 기사지만, 그래도 내 곁에 있는 것보다는 기회가…….”

“아, 아닙니다, 아가씨!”

로빈이 황급히 내 말을 끊었다.

원작에서 로빈은 진의 기사였다. 다른 회차들에서도 그러했고.

“진짜로 괜찮은데. 오라버니도 분명 로빈을 눈여겨보고 있을 거야.”

“진 공자님께서 저를 훈련시키는 이유는.”

로빈이 굳은 눈썹으로 말을 이었다.

“아가씨 때문입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저도 아가씨를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장차 저보다 강한 분으로 자라나시겠지만…….”

로빈의 입가에 미소가 보였다.

“아가씨는 속 깊고 상냥하신 분이니까요.”

“…….”

“강해지는 것도 좋지만 아가씨를 지키는 지금이, 저는 좋습니다.”

로빈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창을 통해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는 의식이 진행되는 장소로 향했다.

가문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친목을 다지는, 윈체스터 최대의 행사.

하지만 오늘은 가주인 레카르도 공작 대신 진이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 북쪽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들었어요. 예언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폭동을 주도한다고…….

드레스를 입혀 주던 마야가 말했었다.

― 분명 쉽게 진압될 거예요.

폭동이라. 윈체스터에는 수백 년간 없었던 일이다.

윈체스터의 상징이 어둠이니만큼 윈체스터 영지에는 어둠에 친숙한 자들이 많이 모였다.

물론 다른 영지와 마찬가지로 보통의 주민들이 많지만 어둠의 직업에 종사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감히 윈체스터 가문에 반항하지는 못했다.

그들의 무리들이 조무래기들이라면 윈체스터 공작가는 엄청난 힘을 가진 핵심 조직.

일정한 비율의 세금을 내는 대신, 약한 자들도 공평하게 보호받았다.

저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면 윈체스터가 개입하기도 했다.

그러니 폭동은 윈체스터 영지와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 샤샤.”

“안…… 녕.”

의식을 치를 홀 안에 들어서자 세 살배기일 적 본 적 있던 방계 혈족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페르메티스는 대놓고 고개를 돌렸고, 문 앞쪽에 있던 네빌과 바몬트가 어색한 표정으로 내게 인사했다.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모습이 썩 우스웠는데.

“…….”

나는 네빌과 바몬트의 인사에 응대하지 않고 가주의 자리에 레카르도 대리로 앉은 진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소년의 느낌이 나는 얼굴이었지만, 자리와 썩 어울렸다.

검은 정복도, 형형한 기운도 말이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 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진의 입술에, 피식 미소가 고였다.

어둠의 잔이 먼발치에 보였다.

혈족들은 모두 차례로 자신의 물건을 넣었다.

새카만 불꽃이 일어나며 그것들을 집어삼켰다.

잔에는 흑룡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잔은 윈체스터의 소속감을 증대하는 동시에 하나의 제단이기도 하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네빌과 바몬트의 불꽃은 아직 형편없었다.

이능이 발현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

그리고, 페르메티스.

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제 스카프를 벗어 잔에 떨어뜨렸다.

끝부분이 잔 안쪽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화려한 불길이 일어났다.

“오오…… 역시.”

“역시 제스티아 님의 따님이야.”

페르메티스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 뒤에는 바쉬론도 있었다.

“…….”

페르메티스의 불꽃은 진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네빌이나 바몬트 같은 애들과는 격이 달랐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말이다.

페르메티스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내 사람들의 시선이, 마지막 차례인 내게 향했다.

내 이능이 발현하고, 첫 어둠의 기일이었다.

모두가 내 이능이 발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다.

당연히 흑염의 이능이 발현할 줄 알았는데, 모계인 퀠른에 가까운……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메키우스의 열쇠’라는 이능이 발현한 나.

내 진짜 물품을 이 잔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

흑룡이 진짜로 노하기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

하지만 호기심을 해결하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나는 로웬이 내게 준 머리 끈을 꺼냈다.

잔이 나타내는 흑염의 불꽃에는 저마다의 지문이 있다.

그렇기에 누구도 남의 물건을 가져와 자신의 것이라 속일 수 없다.

모든 것이 처음인 나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일곱 살에 이능을 발현했으니 강하긴 하겠지.”

“그래도 페르메티스의 불꽃보다는 덜 아름답지 않을까?”

“어디, 레카르도 공작의 비장의 무기를 보자고.”

설마 레카르도가, 남의 것을 도용했다고 알려질 만한 물건을 주지는 않았겠지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잔으로 손을 향했다.

진의 짙은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서서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하지만 아직 내 손에서 머리 끈이 떨어지기 전, 땅속에서부터 엄청난 굉음이 느껴졌다.

나는 흠칫 멈추었다.

“방금 이게 무슨 소리지?”

“지하에서 들리는 것 같은데.”

“여긴 지하가 없…… 으아악!!”

바닥에서 뭔가가 솟아오르며 바닥이 깨졌다.

철갑을 두른 듯한 머리와 붉은 눈에 나는 얼어붙었다.

책에서 본 적 있는 짐승이었다.

“저…… 저건……!!”

“괴물이다. 괴물이 나타났어!”

사람들의 기겁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히모스와 마찬가지로, 너무 강해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강한 짐승.

바히모스가 무리 생활을 하는 것과 달리 이 짐승은 홀로 다닌다.

몸길이만 20미터에 이르고, 각 가문의 가주급도 사냥하기 벅찰 정도라 평가된다.

혹자는 용의 자손이라고 하고 혹자는 페르세토스의 부하라고 부르던 막강한 생물.

‘라비아탄.’

그 붉은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집채만 한 입을 열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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