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79화
영지의 최북단에 있는 마을 파라메나, 그곳에 도착한 레카르도의 말이 멈추어 섰다.
뒤를 따르던 100여 명에 이르는 기사와 병사들 역시 말을 멈추었다.
레카르도의 눈썹이 굳었다.
눈이 쌓인 마을의 굴뚝에서 온통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가구가 사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마을의 기능은 포탄을 생산하는 것.
마을의 땅 밑에 묻힌 고귀한 광물은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를 기꺼이 내주었다.
말에서 내린 로웬이 땅의 발자국을 보고 말했다.
“앞서서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있습니다.”
그 순간 레카르도의 몸에서 나온 흑염이 그림자를 타고 마을의 구석구석을 탐색했다.
“…….”
잠시 후 흑염이 회수되고, 레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다.”
“적이 도망쳤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레카르도가 말에서 내려 흙을 밟았다.
“말 그대로 아무도 없단 말이다.”
살고 있던 마을 주민들은 물론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생활의 흔적은 그대로인데 마치 증발한 듯한 모양새였다.
“폭도들인 모양입니다. 그들이 주민들을 납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파라메나에 오기 전 지나친 영지에서 서른 명의 폭도들을 제압했었다.
― 메키우스의 예언자가 예언하시기를 윈체스터는 정당한 용의 후계가 아니라고 하셨다! 레카르도 윈체스터가 낳은 아이들 중 하나가 장차 멸망의 씨앗이 되어…… 큭…….
붙잡혀서도 태연히 대중들에게 말을 지껄이던 놈은 단칼에 처리했지만 주민들은 전과 달리 불신의 눈이었다.
메키우스의 예언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는 멸망 전에 있을 네 가지 재앙을 예언했다.
첫째는 늑대의 재앙, 둘째로는 뱀의 재앙, 셋째로는 독수리의 재앙이며…… 넷째가 여자아이의 재앙이다.
이 네 가지 재앙이 성취되면 윈체스터에 의해 세상이 멸망하리라, 는 것이 예언의 전부였다.
메키우스의 예언자는 검은 로브를 쓰고 있는 늙은이이며 놀라운 이능을 사용한다고 한다.
― 늑대의 재앙이 이미 성취되었다. 곧 뱀의 재앙이 윈체스터를 덮치리니……!
놈들은 완전히 선동이 된 듯 멍한 눈으로 외쳤다.
― 윈체스터는 침몰하는 배다!
주민들 역시 부화뇌동하여 민심이 술렁였다.
레카르도는 영지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진실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바네사가 꾸민 일들은 그녀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바네사가 죽기 전에 했던 말과 연관이 있었다.
― 예언자가 말했어. 샤샤를 죽이면 죽은 내 아이가 돌아와 메키우스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새로운 음모가 다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렇게 조직적이고 철저한 것을 보았을 때 적의 규모는 상당할 것이다.
헤일로의 가주 바네사도 그들에게 이용당한 희생양일지도 모르는 일.
“주민들 사이에 이능의 몰락에 대한 유언비어가 떠도는 것을 보면…… 무언가 음모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찍힌 말 발자국의 수는 상당했다.
“오늘은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지자들의 처분을 통해 가문의 뜻을 밝혔으니, 당분간 날뛰지 못할 것입니다.”
“트랩을 준비해라.”
레카르도의 말에 로웬은 흠칫 놀랐다.
“트랩이라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돌아오겠습니까? 저희가 다녀간 걸 알면서도요.”
“예언자는 꽤 자신감 넘치는 놈이다. 뻔뻔함도 가지고 있고. 머리를 굴리는 방향성도 꽤 일관되어 있어.”
레카르도의 날카로운 시선이 마을을 향해 있었다.
“매일 쓰는 생활 도구에 먼지 한 톨 안 쌓여 있다는 것은 필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다. 우리의 기척을 느끼고 황급히 물러났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아…….”
“그들은 이 작은 마을로 돌아올 것이다.”
로웬이 눈을 끔뻑였다.
“중앙 창고 주위로 트랩을 설치하면 된다.”
로웬은 멍하니 레카르도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카르도는 말이 거의 없는 주군이었다.
그가 말을 할 때는, 자신만이 다룰 주제를 대변할 때뿐.
이미 몇 수 앞을 내다보았을 때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이내 로웬은 복잡한 수식이 담긴 트랩을 병사들에게 나눠 주었다.
아카다에서 지원받은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로웬.”
레카르도가 로웬에게 명령했다.
“오늘 너는 이곳에서 잠복한다.”
“존명. 공작 전하께서는 거취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레카르도의 시선이, 해가 지고 있는 남쪽을 향했다.
하늘은 높고 화려했지만 그의 짙은 녹안에는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가야겠다.”
* * *
“…….”
“…….”
“…….”
모두가 홀린 듯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목소리가 조금도 흘러나오지 못했다.
눈앞의 장면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의 손이 라비아탄의 심장을 꿰뚫은 지 수 초가 지난 뒤…….
“……라비아탄을…… 라비아탄을…….”
“진 윈체스터가 라비아탄을 무찔렀다!”
“라비아탄이 쓰러졌다.”
라비아탄의 붉은 눈에서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진의 손목을 타고, 라비아탄의 심장에서 나온 피가 팔꿈치까지 흘러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내 형형한 기세였던 라비아탄은 힘을 잃고 옆으로 푹 쓰러졌다.
콰광― 하는 엄청난 굉음이 들렸지만 귀를 막지 않았다.
진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고, 망토는 흙먼지가 다 가실 때까지 펄럭이며 휘날리고 있었다.
철문을 거의 다 물어뜯어 놓은 카테르가 낮게 으르렁댔다.
뚜벅, 뚜벅, 거의 다 열린 문을 통해 걸어온 에반이 입술을 열었다.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아까부터 하얗게 질려 있던 페르메티스는 에반의 말에 더 몸을 움츠렸다.
“…….”
라비아탄이 쓰러진 뒤의 홀은 정말이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라비아탄의 꼬리가 홀에 있던 모든 가구는 물론 벽체마저 파괴했고 바닥도 파이다 못해 붕괴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건물 폭발 철거 현장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나는 진에게로 걸음을 뗐다.
결국 이것은 진이 거머쥔 승리였다.
모든 힘을 실어 넣은 최후의 일격이었다. 진의 일격으로 라비아탄의 숨통을 끊은 것이다.
[생명력이 감소하였습니다.]
[능력치: 체력 28 / 근력 20 / 이능 10 / 지능 41 / 생명력 36]
비록 겨우 올려놓았던 생명력이 다시 36까지 내려와 버렸지만, 라비아탄의 공격으로 단번에 0이 되어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
진이 천천히 나를 향해 뒤를 돌았다.
진의 짙은 눈에는 서늘한 안광이 들이차 있었다.
나는 그 빛에서 내가 가진 힘의 위력을 실감했다.
아무래도 인간 증폭기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그러잖아도 괴물인 진을, 정말 괴물로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다행이야.”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가 그의 앞에 멈추어 선 뒤 말했다.
진이 왜 그랬냐는 듯 허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정말 모두가 죽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때 속에서 무언가가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콜록!”
비릿한 향과 함께 피가 입 밖으로 내뱉어졌다.
“샤샤!”
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내 다른 곳을 보는 것 같던 에반도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너!”
내 턱을 타고 비릿한 피가 뚝 떨어졌다.
아아, 또 병약 생활 시작인가.
그리고 그때였다.
똑―
피가 흐르는 느낌과 함께,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아래쪽을 바라보니 금이 간 어둠의 잔이 있었다.
라비아탄과의 전투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모양이다.
잔에 내 피가 고이는 것이 보였다.
그때였다.
“……!!”
“이건 대체……!!”
잔에서 놀랄 만큼 눈부신 오색의 빛이 뻗어져 나왔다.
그것은 식물의 모양을 만들더니 빠른 속도로 그 크기를 키워 나갔다.
하나였던 줄기는 갈라져 각각이 아이의 몸통만큼이나 두꺼워지기 시작했고, 줄기 하나에 수십 개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눈앞의 장면은 그저 환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무와 꽃 전부에서 빛이 나고 있었으니까.
“대체 저게 뭐지?”
“잔이 깨어졌어. 아니면, 저 나무가 잔이 된 건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닌 모두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진짜인가?
“세상에…… 저 아이…… 보통의 이능이 아니었어.”
“윈체스터의 아이가 흑염의 이능이 아닐 수가 있는 건가!”
“하지만 문지기 개를 소환했다고! 보통의 능력으로는 길들여지지 않을 텐데!”
“이런 능력은…… 본 적이 없어.”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나는 비틀거리다가 나를 잡는 진의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에반의 시선도 나무를 향해 있었다.
내가 본 에반의 기억에서도, 이런 장면은 없었으니까 색다를 만하다.
그리고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
“역시 재료 언니는…… 기적을 만들어 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무너진 입구로 홀린 듯 들어오는 카실리온의 자주색 눈동자에는 짙은 환희가 깃들어 있었다.
“신실함과 숭고한 희생만이 창조할 수 있는 신수.”
그 순간 내가 책에서 읽었던 귀한 영약의 목록이 떠올랐다.
“전설 속 신수의 꽃도 열 송이가 고작이었는데, 이건…… 정말 대단하군요.”
신수의 정수라는 것이 약 목록에 있었다.
콜록, 계속 피가 흘러나왔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기로 했다.
고통의 대가로 받은 희망은 이토록 찬란하게 피어나 있었으니까.
카실리온은 혼잣말을 하듯 조금 낮은 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신수의 뿌리는 언젠가 제가 만들고 싶은 일생일대의 물건의 재료이기도 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