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80화
카실리온 아카다는 일생일대의 역작 ‘엘릭서’를 창조한다.
막상 멸망의 순간에는 큰 효용이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소망하는 것은 이루고 떠난 셈이다.
설마 지금 카실리온이 말하고 있는 재료라는 것이…….
“…….”
나는 환한 빛을 내는 신수를 올려다보았다.
이 나무의 뿌리라는 건가.
수많은 꽃에는 꿀 같은 정수가 담겨 있었다.
“콜록.”
“샤샤.”
내가 다시 기침을 하며 피를 흘리자 진이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저거…….”
나는 손가락으로 꽃 하나를 가리켰다.
신수의 정수. 책에서 본 적 있던 귀한 약초였다.
“필요해.”
그리고 그때 에반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공중을 향해 검을 가볍게 움직였다.
그러자 꽃 중 하나가 툭 떨어져 에반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도, 진도 에반을 바라보았다.
에반은 뚜벅, 뚜벅 내게 다가와서 신수의 꽃을 내밀었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꽃을 받아 들었다.
받아 든 꽃 중앙에 고인 꿀 위로 내 창백한 얼굴이 비쳤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넘겼다.
속에서 점점 역한 느낌이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꽃의 정수는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순간부터 몸을 데우는 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울렁거리는 속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생명력이 증가하였습니다. +10]
눈앞에 그토록 바라던 메시지가 떴다.
나의 생명력은 무려 46. 이능을 쓰기 전과 똑같아졌다.
500루비나 되는 지룡의 비늘도 15의 생명력 증가가 전부였는데, 신수의 꽃 하나에 10이라니! 대박이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내 얼굴에 혈색이 돌자, 진은 조금 경계를 푸는 모습이었다.
신수의 모습은 성스러울 만큼 아름다웠다.
빛으로 둘러싸인 나무라, 윈체스터에는 꽤 안 어울리는 풍경이었지만 말이다.
“세계 최고의 영약이 스무 개나 달려 있다니, 윈체스터에 오길 잘했어.”
카실리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재료도 여기 있고, 재료 언니도 만났으니까…….”
잔뜩 들뜬 표정으로 신수를 바라보고 있는 카실리온의 이후의 말은 필터링했다.
“……회복된 건가.”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어둠의 잔이 사라져서 후환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거야?”
“네.”
피를 토하며 괴로워할 고비는 넘겼으니 나도 마음이 놓였다.
회복의 여파인지는 몰라도 졸리기도 했고.
그리고 그때 에반이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흠칫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는 짙은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진의 몸에서 차가운 흑염이 바짝 서며 에반에게 한마디 하려고 할 때였다.
“수습해야 할 게 있지 않나.”
에반의 입술이 먼저 달싹였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혈족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상황은 정리되지 않았다.
이 희대의 사태를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에반은 이방인이었고, 진은 남아야 했다.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가주 대리로 참여했기에 사태 수습의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진은 서늘한 눈빛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데려다줘라.”
내 손목은 아직도 에반에게 잡혀 있었다.
나는 진을 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오라버니, 저 나무는…….”
“잘 보존할 테니 걱정 말고 들어가.”
진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에반이 내 손목을 이끌었다.
“잠깐만! 어떻게 된 건지 들어야겠어!”
“저 아이의 이능이 흑염이 아닌 것인가? 그리고 방금 그 능력은 뭔데!”
“저 나무는 무엇인지 설명하고 가야지! 그 괴물은……!”
혈족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에반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이끌었다.
나는 하얗게 질린 채 입을 꾹 닫고 나를 보는 페르메티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역시 저 아이를 심연의 그림자로 조사했어야 했어.”
“하지만…… 우리, 저 아이 때문에 살아남은 거 아니야? 분명 저 아이가 진에게 어떤 힘을…….”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샤샤.”
개중에는 나를 대놓고 경계하는 사람도 있었고, 경외를 담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너희들이 누구 때문에 살아났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바쉬론의 서늘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 그건…….”
그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염치가 있어야지! 쯧!”
결국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부상을 입은 바쉬론은 짜증이 섞인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내게 말했다.
“……이번만은 인정하지.”
페르메티스가 힐끗 나를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가만히 에반을 따랐다.
“…….”
이내 형편없이 찌그러진 철문을 지나 우리는 복도로 나갔다.
새카만 밤의 풍경이 창밖으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이제야 내 입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너.”
에반은 내 손을 잡은 채 멈추어 섰다.
나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반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또 이능을 쓴 건가.”
* * *
어둠 속에서도 녹안은 또렷하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 그래, 썼어.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
당황스러울 정도로 청아하다.
― 회귀 동안 신수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것도…….
― 미안한데 대화하고 싶지 않아.
이능이 흘러들며 압박감을 느꼈을 만도 하지만 샤샤는 끄떡없었다.
― 선을…… 긋는 건가.
나직한 에반의 위협에 샤샤는 빤히 에반을 바라보았다.
― 아무리 주인공이라고 하지만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제 속은 꽁꽁 감추며 남의 비밀은 다 캐내야 직성이 풀리지?
― …….
― 난 네 과거는 알아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
걷고 있는 에반의 뇌리에 아직도 샤샤 윈체스터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 그러니 건설적인 협력 관계를 만들고 싶다면 너부터 제대로 협력해.
카실리온과 가까워지지 말라고 한 이후로 샤샤가 자신에게 묘하게 화가 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 이어지는 비난.
위로 잔뜩 치켜올라간 눈썹 끝이 떠올랐다.
여덟 살 꼬맹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표정이었다.
― 이기적이야.
에반은 저도 모르게 욱신거리는 가슴에 손을 대어 보았다.
카실리온을 끌어들이지 않고자 한 것은, 샤샤에게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였을 뿐인데.
이제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이내 그는 어둠이 내려앉은 저택을 나갔다.
먼 안쪽에서는 진 윈체스터가 작금의 사태를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뱀이라.”
에반은 죽은 라비아탄을 떠올렸다.
그리고 설산에서 베었던 바히모스를 떠올렸고.
“…….”
먼 곳에서 불어오고 있는 죽음의 새의 냄새를 맡았다.
다른 회차와 달리 페르세토스의 기운이 벌써 짙게 차오르고 있었다.
페르세토스는 언제나 존재감을 숨겼다.
부활 전 육체가 발각되는 리스크를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전력전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듯 죽음의 냄새를 짙게 풍겼다.
에반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어둑한 길을 지나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기골이 좋은 말을 탄 사내는, 암왕 레카르도 윈체스터였다.
스물일곱 회차 동안 적이었으나 처음으로 협력자가 된 지금의 회차.
그와의 관계는 꽤 달라져 있었다.
레카르도는 에반이 이능을 제어하고 정보를 얻는 데 협조하고 있었다.
“…….”
어둠을 이고 태어난, 태생적으로 잔혹하고 강력한 흑염의 주인.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테일러스와 윈체스터는 영원히 반목했으나 이번만은 하나의 구심점을 위해 공존한다.
“이 시간에 왜 여기 나와 있지?”
에반의 앞에 레카르도의 말이 멈추었다.
레카르도는 에반을 내려다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반은 레카르도를 올려다보았다.
“움직이기로 약속했으니까.”
결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흑염의 빛깔은, 밤 속에서는 청명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움직일 생각입니다.”
레카르도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들 사이로 불어오고 있었다.
샤샤의 목소리가 바람 속에서 불어오는 듯했다.
* * *
“자아, 계산을 해 보자.”
방으로 돌아온 나는 책상에 앉아 종이 위에 끄적이기 시작했다.
에반 녀석의 애매함이 아직도 짜증 났지만, 소득 없는 생각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꽃은 열아홉 송이.
한번에 10의 생명력이 회복된다면 200에 가까운 수치이다.
30부터 70이 적정치이며, 40만 넘어도 컨디션이 살 만하다는 것을 봤을 때…….
“이제 죽을 걱정은 없겠어!”
이건 정말 감격할 만한 상황이었다.
최소한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딸’에서 ‘악당 가문의 그냥 막내딸’로 진화하는 것이니, 여덟 살 평생을 고민했던 것이 해결되는 것이다.
병약해지는 몸과 시한부와 다름없는 최후의 시간들.
물론 생명력이 해결되었어도 큰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다.
우리 모두가 시한부라는 것.
페르세토스라는 놈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나는 아까 강화 효과를 받은 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족히 원래 가진 힘보다 2배의 힘을 발휘했다.
‘메키우스의 열쇠’라는 나의 이능은 이처럼 강한 강화 효과가 있지만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그리고 생명력을 충전할 수 있는 신수의 정수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방금과 같은 일이 있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할 테고, 생명력이 깎이겠지.
지금 내 나이는 겨우 여덟, 그리고 원작에서 죽게 되는 나이는 스물!
10년 동안 방금과 같은 상황이 얼마나 더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잘 조절해야 해.”
나는 내 생각을 종이에 정리했다.
우선 그런 상황을 피해 갈수록 좋으니, 라비아탄이 나타난 경황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신수의 정수가 스무 개 가까이 있다고는 하나 페르세토스와의 최종 전투를 생각한다면 이마저 역부족일 수 있으니, 카실리온에게 엘릭서의 제작 계획에 대해 자세히 물어봐야겠다.
아무튼 상당한 여유를 번 느낌이다.
“……이쯤이면.”
“아가씨!”
바깥에서 마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흠칫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공작 전하께서 다녀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