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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81화 (81/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81화

하인이 문을 열었고 나는 조심스레 그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밤중의 집무실은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들 만큼 어두웠다.

그리고 집무실 의자에, 셔츠 차림의 레카르도가 앉아 있었다.

이제 막 복귀한 그의 눈에는 바깥의 차가운 냉기가 스며 있었다.

“무사히 다녀오셔서 다행이에요.”

레카르도의 앞에 선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파라메나는 많이 추웠죠…….”

나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컨디션은 좋아졌지만 레카르도의 앞에서 위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잠깐의 정적 후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저녁에 있었던 일에 대해 들었다. 게다가…….”

레카르도의 녹안에 손을 모으고 있는 초조한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집에 신수가 자랄 줄은 몰랐군.”

“……죄송해요.”

어둠의 잔이 파괴되며 생긴 신수는, 총회장을 꽉 메웠다.

아마 그곳은 더는 이제까지와 같은 목적으로 이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은 공과 과의 문제지.”

레카르도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나는 레카르도가 칭찬하는 것인지 혼내는 것인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칭찬한다고 생각하기에는 굉장히 무표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을 낮추어야 할 때를 알 테다. 그렇지 않더냐, 샤샤.”

레카르도는 내가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죽은 뒤에는 그 무엇도 소용이 없으니.”

세 살 적의 어둠의 기일 때, 레카르도가 보여 주었던 카테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그때도 같은 표정이었던 것 같다.

“……저는.”

레카르도가 나를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유도 이해가 간다.

혈족들의 시선이 내게 쏠리면 온갖 말들이 떠돌고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마야의 추측으로는 내가 위험해지는 것을 막고자 한다는데 글쎄, 철혈이 흐르는 레카르도가 정말 그런 의도인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이능을 쓸 거예요.”

레카르도에게 늘 기가 죽는 나였지만 숨기기 싫은 말도 있었다.

레카르도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질문은 평이한 어조였지만 서늘한 안광은 온몸의 솜털을 서게 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살기 위해 쓴 거예요.”

레카르도는 한참 동안 나를 응시했다.

방금 한 말은 진심이었다.

“저는 살기 위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내 말에 레카르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리고 진이 죽으면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나도 몰살당했을 것이다.

잠시 뒤 레카르도가 입술을 달싹였다.

“결과가 좋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레카르도의 말이 맞는다. 운이 좋았기에 망정인 상황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내 레카르도의 이어지는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서 종알거리는 모습은.”

나는 다시 시선을 들어 레카르도를 보았다.

“네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군.”

빙빙 돌아서 그 종착지는 결국 칭찬인 것 같다.

“잘했다, 샤샤.”

나는 레카르도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레카르도는 조금 입술을 비틀어 서늘한 미소를 보였다.

“…….”

조금만 더 웃으면 세계 최강 미모일 텐데, 레카르도의 성격상 입꼬리가 더 올라가는 일은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아까보다는 덜 압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수의 꽃이 널 회복시킨다고 들었다.”

천 년에 한 번 정도, 그러니까 전설 속에서나 나타나는 신수의 정수가 엄청난 약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세상에 모를 사람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능을 쓰면 피를 토할 만큼 몸이 약해지는데, 신수의 정수를 마셨더니 고통받았던 것 이상으로 몸이 회복됐어요.”

잠시 후 레카르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멀리 돌아갈 필요 없이, 잘되었군.”

“……네?”

그리고 그는 태연한 말투로 놀랄 만한 제안을 했다.

“총회장의 소유권을 네게 주겠다.”

“……네?”

어둠의 기일이 열리는 그 장소는 윈체스터 저택의 건물들 중에서도 꽤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다면 어둠의 기일은…….”

“잔이 깨어졌으니 열리지 못하겠지.”

“아…….”

윈체스터의 방계 혈족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재앙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 때문에 아피니제도 더는 열리지 못하고, 어둠의 기일조차 폐지되니 말이다.

“……제가 가문에 너무 큰 피해를 끼치는 것 같아요.”

“누군가 그런 말을 한다면 내게 알리도록.”

레카르도의 날카로운 시선에 나는 손을 움찔했다.

“누가 누구를 살린 것인지, 정정해 줄 여유는 있으니. 혹은 라비아탄이 살아 있었으면 벌어졌을 일을 체험하게 해 줄 수도 있겠지.”

그의 등 너머의 흑염은,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띌 만큼 새카만 일렁임이었다.

“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내 레카르도가 의자를 조금 돌려 새카만 창밖을 보았다.

저번에 식사를 할 때보다 무거워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내가 나갈 준비를 하려는 도중 레카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샤샤.”

나는 흠칫 레카르도를 보았다.

레카르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치지 마라.”

명령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밖, 거세지는 바람과 함께 하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 * *

마석이 장착된 트랩에 적이 걸려들었다는 신호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렸다.

로웬은 곧장 말을 타고 검을 뽑아 들었다.

이미 준비되어 있던 정예의 병사들이 그를 따라 마을을 급습했다.

빈 마을로 들어온 이들은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레카르도 공작이 돌아간 줄 알았건만, 그의 기사들이 다시 나타나자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은 우왕좌왕했다.

“되도록 생포하고…….”

로웬은 부하들에게 명했다.

“따르지 않으면 죽여라.”

챙― 날카롭게 검이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로브를 입은 자들은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닌지 품속에서 무기를 꺼내 저항했다.

그들의 숫자는 꽤 많았지만 로웬은 윈체스터가의 병사들이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묻어 두었던 트랩들도 있고 말이다.

이내 부하들에게 전장을 맡긴 채 그는 중앙 창고 쪽으로 향했다.

주군의 예측이 맞는다면 틀림없이 그곳에도 적은 있을 것이다.

전장을 떠난 그의 말머리가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로웬은 그곳에서 로브를 쓴 누군가와 마주쳤다.

사내는 키가 매우 컸고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로웬의 싸늘한 물음에도,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로웬은 검을 빼든 채 사내에게 다가갔다.

“정체를 밝히라고 했다.”

그리고 검끝을 사내에게 들이대려는 순간 그는 멈칫하고 몸을 비틀었다.

로웬의 옆구리를, 날카로운 단검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살기를 포착하지 않았으면 몸이 꿰뚫렸을 것이다.

놀란 말이 앞발을 들더니 로웬을 떨어뜨렸다.

로웬은 흙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키가 큰 로브의 사내는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방금까지 눈앞에 서 있던 사내가 뒤로 물러나 공격한 것이다.

‘엄청난 실력자다.’

뿜어지는 기운을 보아 자신보다 강할 확률이 70퍼센트.

최소, 이능을 가진 귀족급이다. 이런 자가 무슨 이유로 정체 모를 예언자에게 협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

로웬은 검을 바로잡았다.

그는 돌아가서 이 일을 주군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발을 디딜 새도 없이 사내의 몸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그 번뜩이는 검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로웬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방어하는 것뿐.

챙―

사내의 새카만 눈이 로웬을 보고 있었다.

로웬은 제가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어떻게든 허점을…….’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로웬이 다시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

로브의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로웬은 제가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의 사내가 멈추자 자신도 멈칫했다.

“커억.”

사내의 벌린 입에서 새카만 피가 흘러나왔다.

멍하니 사내를 보던 로웬은 사내의 뒤편으로 선명하게 이어진 청명의 검을 보았다.

그리고 먼발치에 검을 들고 서 있는 검은 머리칼의 소년.

소년의 어깨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

이능을 가진 이는 이능으로 제압한다.

진 윈체스터에 비견될 만큼 강한 기운을 가진 아이.

에반 테일러스가 서늘한 눈빛을 한 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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