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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82화 (82/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82화

에반은 구태여 제가 적이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에반은 윈체스터에 머무는 동안, 볼모가 아닌 전력으로 대접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에반은 자신의 회귀를 포함해 과거 사건들 중 몇 가지에 대해 레카르도에게 전했다.

샤샤 윈체스터는 특별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 애를 지킬 생각이라고 했다.

― 윈체스터는 힘의 논리를 따른다. 샤샤를 보필하는 기사들보다는 더 쓸모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겠지.

에반은 지금 자신이 전력을 다해도 레카르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능이 재발현했어도 그것이 안정되기까지는 육체의 성장이 필요하다.

원래의 그는 레카르도의 눈에 띌 생각은 없었다.

― 네가 내 딸을 이용할 생각이라면 더더욱.

분명 샤샤 윈체스터의 존재만 아니면 그러했을 것이다.

앞으로 닥칠 위험은 그 애에게 위협적이다.

앞선 두 괴물들이 그러했듯 그들의 목표는 참으로 분명했으니 말이다.

흩날리는 싸라기눈 속, 에반은 낮은 목소리로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말했다.

― 바히모스와 라비아탄 다음의 괴물은 다크 이글입니다.

여러 번의 회귀를 겪는 동안 쌓은 지식은 눈을 감고도 만사의 존재를 감지할 만큼 거대했다.

― 늑대와 뱀 다음, 독수리라.

다크 이글은 지성을 가진 몬스터로 이 또한 마지막 개체가 멸종된 지 오래였다.

개체 자체의 무력은 그리 강하지 않아도, 세뇌의 기술을 쓸 수 있다는 점이 골치 아팠다.

다크 이글의 눈을 보면 최면 상태에 빠진다.

― 다크 이글이 좋아하는 것은 혈암.

혈암은 파라메나의 중앙 부지에 묻혀 있는 붉은 암석이었다.

그곳에서 나오는 지열을 이용해 마을 사람들은 탄환을 제작했다.

다크 이글은 어느 마석 못지않게 혈암의 지열을 좋아한다.

― 다녀오겠습니다.

에반이 차가운 시선으로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에, 레카르도는 입술 끝을 미미하게 비틀었다.

테일러스 녀석의 도전적인 눈빛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 그리고 이용할 생각 없습니다. 단지 이번에는…… 그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뿐.

무엇을 원해 이리 행동하는지가 빤히 보여서겠지.

세상이 멸망해도 제게 줄 생각은 없는데도, 건방지기 그지없었다.

― 로웬을 지원해라.

에반에게 명령한 레카르도는 에반의 곁을 지나쳐 저택으로 향했다.

에반은 이미 객식구나 다름없었다.

양 가문 간에 쌓을 일 없던 신뢰의 초석이며 공동의 적에 대한 연대 의식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는 샤샤 윈체스터가 있다.

‘하지만 불안한 느낌이 드는군.’

레카르도는 에반의 눈빛에서 거울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겨 본 적 없는 자라면, 그것이 때로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

깨닫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지만.

* * *

“이거면 오래 보관할 수 있어.”

나는 신난 표정으로 상점에서 40루비짜리 ‘알약 제조기’를 구입했다.

[*대상의 약효를 유지하며 복용하기 편한 형태로 가공합니다.]

나의 루비는 바닥이 났지만 그래도 신수의 꽃이 언제 시들까 조마조마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이내 레카르도가 내게 증여한 총회장에 들어선 나는 조심스레 신수의 꽃을 수확했다.

곁에서 마야가 원예용 가위로 나의 일을 도왔다.

“아가씨도 참, 하인들에게 맡기시지요.”

“이 보물들을 남의 손에 맡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보물을 넘어선 나의 생명줄이다.

“끝났다!”

이내 꽃이 사라진 나무를 보며 나는 보람차게 외쳤다.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은 없지만 나뭇가지는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꽃이 또 자랄까요?”

“글쎄…….”

자라면 좋겠지만, 그렇게 귀한 신수의 정수가 금세 자라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예쁘니 좋아.”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신수를 올려다보았다.

꽃이 다시 피지 않더라도 엘릭서의 재료가 될 뿌리가 있으니 나무는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미관상으로도, 척박한 윈체스터의 건축물에 뿌리박은 신성한 나무라는 독특한 의미가 있었고.

총 열아홉 송이의 꽃을 수확한 나는 그것을 방에 가져와서 알약 제조를 시작했다.

제조 도중 배가 출출해져서 마야에게 간식 심부름을 보냈다.

“오, 정말 되는구나!”

동그란 통 형태로 되어 있는 그것의 입구에 꽃을 넣으면 알약이 튀어나왔다.

알약은 새끼손톱의 반 정도 크기였는데 나는 그것들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인벤토리에 찬 신수의 정수 19개를 보며 나는 뿌듯함에 젖어 들었다.

이제는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병약한 몸 때문에 초조하게 살아갈 이유는 없을 것이다.

“우선 하나 더 먹어 볼까.”

그리고 그것들 중 하나를 꺼내 입 안으로 넘겼다.

[생명력이 증가하였습니다. +10]

내 생명력은 이제 56이다.

몸에서 전과 달리 힘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굴러다니는 연필을 조금 강하게 쥐어 보았다.

“…….”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긴, 생명력이 강해진다고 힘이 세진다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런 능력은 지구력으로 보이는 ‘체력’과 힘으로 보이는 ‘근력’의 영역일 것이다.

[이름 : 샤샤 윈체스터(LV.8)]

[직업 : 새싹 구원자]

[특성 : 메키우스의 열쇠]

[능력치: 체력 28 / 근력 20 / 이능 10 / 지능 41 / 생명력 56]

이전에 퀘스트 보상으로 능력치가 8씩이나 한번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체력과 근력 역시 바닥일지도.

예쁘기는 한데 참 저질인 몸이다.

그나저나 이능이 높아지면 어떤 이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대상에게 더 강한 힘을 부여할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아가씨, 간식 가져왔어요.”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마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반쯤 문을 연 마야는 먼저 들어오지 않고 얼굴만 비친 채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어…… 아가씨.”

“응?”

“아가씨를 찾아온 분이 있어요.”

마야의 표정을 보아 마야의 뒤에 있는 모양이었다.

누구지? 진은 라비아탄의 사고를 보고하기 위해 로젠토에 갔고, 레카르도는 폭도 사건 때문에 꽤 바쁘다고 들었다.

잠시 생각하고 있을 때,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샤샤.”

어쩐지 골치 아플 것 같은 얼굴에 나는 표정을 서늘하게 굳혔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소녀는 내가 잘 아는 아이였다.

물론 잘 안다고 친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

페르메티스 윈체스터, 우리의 방계 혈족이자 위탁 교육을 받기 위해 지금은 저택에 같이 머무르고 있는 그녀.

그녀의 손에 붉은 꽃 세 송이가 들려 있었다.

문으로 다가선 나는 페르메티스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잠깐 시선을 피한 페르메티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몇 초 뒤 입을 열었다.

그녀의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에 내가 반사되어 보였다.

“저번에 있었던 일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어.”

* * *

“……그땐 전부 죽는 줄 알았어.”

발코니,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은 페르메티스가 내게 말했다.

나는 가만히 찻잔을 들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진 오라버니가 아니었으면 모두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

페르메티스의 시선이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끔찍했던 그 순간을 회상하듯 그녀의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리고 네가 아니었다면 말이야.”

나는 새하얗게 질린 페르메티스의 얼굴을 기억했다.

바쉬론도, 다른 사람들도 그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페르메티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전에 보았던 적개심은 보이지 않았다.

“있잖아, 그때 네 손에서 하얀 빛이 빛나는 것을 보았어.”

“…….”

제스처조차 굉장히 부드럽다.

“모두가 보았지. 그건…… 정말 대단하더라.”

조금 어색할 정도로 말이다.

페르메티스는 안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네가 우리와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

“우리의 관계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건 회복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친구 같은 사이가 될 수 있다면 말이야.”

찻잔의 우유를 바라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결국 고맙다는 핑계로…….”

아까 그녀가 준 장미는 여름 저택에서 본 적 있던 품종이다.

그 일에 죽을 뻔했던 과거를 떠올리자 마음이 차게 식었다.

“내 힘에 대해 알아내려 왔구나.”

나는 페르메티스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지금까지의 일에 반성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게 애써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던 페르메티스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우린 친구가 될 수 없어. 너도 그럴 생각 없잖아.”

가면의 두께는 매우 얇고,

“…….”

한 번 적은 영원히 적이다.

결국 가면을 벗고 나를 사나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페르메티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 이렇게 대한 걸 후회할 거야.”

그리고 찬바람이 부는 표정으로 내 방을 나섰다.

바쉬론의 명으로 왔을 텐데, 꾸중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겠지.

문가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 버러지 같은 건 뭐야, 꺼져!!”

날카롭게 외치는 페르메티스의 목소리.

그리고 곧이어 조금 풀이 죽은 카실리온이 고개를 내밀었다.

“……재료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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