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84화
[퀘스트 : 파라메나의 술법을 해제하고 이능을 통해 당신의 적을 처리하세요.]
[퀘스트 보상 : 새로운 직업과 모든 능력치 +5, 300루비, 흑룡의 뿔]
눈발이 거세게 휘몰아치던 밤, 나는 눈앞에 퀘스트가 새로 떴다는 것을 알아챘다.
파라메나의 술법이라, 뭐지?
나는 이내 퀘스트 보상에 눈이 갔다.
흑룡의 뿔! 아마도 생명력을 높여 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게다가 모든 능력치가 5나 플러스된다면 체력과 근력도 늘 것이다.
300루비 역시 자잘한 퀘스트와는 비교가 안 되는 보상이기도 하다.
“…….”
에반은 지금 파라메나에 가 있었다.
에반이 떠난 지 정확히 닷새. 하지만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레카르도도 어제 파라메나로 출발했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진이 가문을 지킬 것이다.
“따라가야 하나.”
나는 창밖을 보며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세상의 회귀점은 에반의 죽음으로 보이며, 아직 세상이 그대로인 것을 보면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한나절이면 가는 그곳에서 연락이 끊겼다는 것은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겠지.
‘다크 이글’이라는 존재의 짓이려나.
― 샤샤.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곰돌이에 달아 놓은 방울이 울렸다.
그것은 내가 오셀로에게 준 루네 화분과 연결되어 있는 방울이었다.
“오셀로?”
오랜만에 들리는 목소리였다.
여자 친구라도 생긴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동안 오셀로의 연락이 뜸했었다.
― 뭘 빼먹은 거 같은데.
“오라…… 싫어, 오셀로는 오셀로야.”
― 다시 만나면 오빠라는 단어를 확실히 교육해야겠군.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연습해 볼게.”
윈체스터와 테일러스가 평화를 목적으로 볼모를 교환하기로 한 기간은 약 3년이다.
이제 1년 반이 지나고 있고 말이다.
― 나흘 줄게.
“뭐?”
― 파라메나에 들러 저택에 도착하면 그쯤 될 테니까.
“뭐어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셀로가 저택에 온다고? 또 파라메나라니…….”
― 채비를 해야겠어. 나흘 뒤 실전이다, 꼬맹아.
뚝―
오셀로와의 대화는 어이없게 끊겼다.
전에 몇 번 대화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제 할 말만 하고 끝이다.
그나저나…… 오셀로가 파라메나에 간다니. 역시 그곳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설령 그렇더라도 내일 레카르도가 가니 별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오셀로가 가기 전 모든 상황이 정리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에 간 레카르도마저 소식이 끊긴 것이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나는 헥토르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한 장 보내고 로빈에게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우리는 지금 티타임을 갖는 중이다.
“……아가씨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찻잔의 차를 한입에 넘긴 로빈의 반응은 당연히 예상한 바였다.
“로웬 경도 그곳에 있잖아요. 우리가 가서 무슨 상황인지 본다면…….”
“가더라도 저 혼자 갑니다.”
로빈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우선 진 공자님께 보고드리고 결정을 따르도록 하죠.”
“그건 안 돼요.”
진이 나를 보내 줄 리 없었다.
가겠다는 의향이라도 내비춘다면 방비를 더욱 강화하겠지.
로빈은 당연히 그것을 알기에 진에게 보고한다고 하는 것이고.
나도 위험한 일인지는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 목숨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일이 이 상황까지 왔으니 방법은 하나.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직접 알아보는 것이다.
“공작 전하마저 소식이 끊긴 지금, 저택이라고 더 안전할 것도 없어요.”
내 말에 로빈은 잠시 입을 닫았다.
그 또한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레카르도를 저지할 수 있는 적이라면 진이 지키고 있는 저택쯤은 손쉽게 침입할 것이다.
“하지만 그곳만큼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버지는 살아 계세요.”
가주가 사망하면 후계자가 알아챈다고 한다.
하지만 진은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진 공자님께서 출정하지 않으신 이유가 아가씨 때문이라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제가 아버지를 만난다면, 도울 수 있어요.”
로빈은 내 이능에 대해 짐작하는 몇 안 되는 측근 중 하나였다.
“로빈도 형을 살리고 싶잖아요. 나도 그래요.”
로빈의 형 로웬, 그는 임무를 위해 맨 처음부터 그곳에 남아 있던 자였다.
“윈체스터 공작가에 들어온 순간부터.”
로빈은 서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희 형제의 목숨은 윈체스터의 것이었습니다.”
한 치의 물러섬 없는 태도.
나를 그곳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 사람은 로빈뿐일 텐데. 답답했다.
나라고 꼭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은 아니다.
태어난 뒤 줄곧 남이 되고 싶었던 레카르도 공작과 오빠들이 이제는 내 가족이 되었고, 죽으면 회귀하는 남주인공이 파라메나에 있다.
게다가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퀘스트는 명백히 내가 갈 방향을 알려 주었다.
시스템 욕도 많이 한 건 사실이지만, 시스템은 내 명줄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적당히 위험에 몰아넣으면서 내가 성장하도록 도왔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미안해요, 로빈.”
처음부터 뜻을 굽힐 생각 없던 나는 로빈에게 말했다.
“사실 처음부터 로빈의 뜻을 물을 생각은 없었어요.”
거절은 당연했으니까.
“아가씨…… 무슨 짓을…….”
이제야 약효가 들었는지 로빈이 이마를 짚었다.
나는 희대의 악당가 윈체스터가의 막내딸.
그리고 천재인 카실리온이 준 포션 중에는 ‘말 잘 듣게 하는 포션’도 있었다.
정확한 효능명은 ‘세뇌’라고 한다.
로빈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포션은 포션을 먹은 뒤 처음 본 상대의 말에 복종하게 만들며 효과는 하루 정도 지속된다.
강한 이능이나 정신력을 가진 상대에게는 먹히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로빈은 포션을 이겨 내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나를 파라메나로 데려다줘요.”
나는 로빈에게 고상할 만큼 나긋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멍하니 나를 보던 로빈이 홀린 듯 입술을 달싹였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 * *
말을 탄 로빈의 앞자리를 차지한 채 한참이나 설원을 달렸다.
저택을 빠져나오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다들 로빈의 얼굴을 알고 있었고,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짓을 벌였던 것을 레카르도가 알게 되면…… 최소 6개월은 근신이겠지.
“미안해요, 로빈.”
나는 로빈에게 말을 걸었지만 로빈은 말을 달리는 데 집중했다.
‘몸에 무리가 가는 건 아니겠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혈색이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추위를 이기는 포션을 나눠 먹었는데, 내게도 추위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로빈도 괜찮겠지.
수 시간이 지나서 우리는 파라메나의 초입에 도착했다.
로빈은 나를 안고 말에서 내렸다. 발로 땅을 딛자 내 발이 눈 속에 푹 파묻혔다.
“로빈은 돌아가요.”
나는 로빈에게 명령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이능을 가진 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앞에, 이상한 기운의 장막이 있다는 것을.
내가 오기로 고집을 부린 거니까 애꿎은 로빈이 위험에 처하는 것은 싫었다.
“…….”
하지만 로빈은 발에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돌아가라니까요.”
“…….”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내면의 무언가와 싸우는 듯 일순간 조금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다가 다시 멍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로빈이 말했다.
“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럼 여기에서 기다리다가 돌아가요.”
그리고 발을 옮겼다.
로빈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명령이…… 통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포션에 부작용이 있나.’
어쩌면 포션의 효과가 다했을지도 모른다.
로빈의 정신력이 강해서 약효가 일찍 떨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쩔 수 없지.’
나는 로빈과 함께 다녀야 할 모양인 것 같다.
이윽고 장막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한 치 앞인데, 완전히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는 곳이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다른 곳.
로빈도 나를 따라 그곳으로 들어왔다.
“여기서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거 같아요.”
“…….”
나는 로빈에게 말했다.
들어오자마자 낮이던 시간이 밤으로 변화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
환상이 아니다. 진짜 밤이야. 밤의 공기, 밤의 소리, 모두가 진짜이다.
그리고 검은 하늘의 중천에 뜬 저 달의 모양은 사흘 전의 달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은 시간이 다르게 가는 영역이었다.
언젠가 도서관에서 읽은 책에서 본 적 있다.
고대의 강력한 술사는 시간의 영역을 비틀 수 있다고.
다크 이글.
그 몬스터가 가진 것이 인간들의 이능보다 강한 힘이라고는 하지만 시간을 뒤틀 정도는 아니었다.
페르세토스로 추정되는 강력한 배후가 조종한 라비아탄과 동일한 케이스가 아니라는 가정하에 말이다.
사흘 전 밤이면, 레카르도가 도착한 후일까.
느리게 불타오르고 있는 파라메나의 풍경이 눈앞에 들어왔다.
기묘하게도 불길은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
그리고 로빈의 걸음 역시 기괴하게 되풀이되고 있었다.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나 하나뿐.
[시간에 귀속되지 않는 존재는 뒤틀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나는 책에서 읽었던 구절을 떠올렸다.
내가 멀쩡한 이유는 환생자이기 때문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