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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85화 (85/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85화

나는 한 발짝, 두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토끼의 움직임부터 새의 날갯짓까지, 이곳의 모든 것들은 약 3초 단위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제대로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나는 숲을 지나 파라메나의 전경을 보았다.

새카만 연기가 올라오는 마을이 보였다.

연기조차도 다시 굴뚝으로 들어갔다가 올라오는 것이 반복되었다.

사람들이 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들과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윈체스터의 문장을 가진…… 기사들과 병사들.

로웬도 있었다.

어깨에 화살이 박힌 채 피를 흘리고 있는 로웬은 놀란 표정으로 하늘을 보며 외치고 있었다.

“빠져나가는 것을 막……!”

그리고 그 외침은 다시 되풀이되었다.

“빠져나가는 것을 막……!”

로웬의 부하들 역시 하늘을 보는 행동을 되풀이했다.

간격은 같은 3초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같은 행동을 계속하는 그들을 두고 나는 걸었다.

아직 마을에서 이능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레카르도가 마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저벅, 저벅, 나는 계속 걸었다.

내가 만든 발자국조차 3초에 한 번씩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레카르도나 에반마저 반복되는 시간에 갇힌 것일까.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에반은 회귀자이다.

스물여덟 번을 회귀한 그가 조잡한 시간 반복의 영향을 받을 리가 없다.

환생자인 나조차 면역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함정이 있었을 것이다.

“…….”

잠시 후 나는 거대한 중앙 창고의 앞에 도착했다.

* * *

5대 가주의 고안으로 만들어진 창고는 바깥에서는 간단한 방식으로 열 수 있으나, 안에서 문을 열기 위해서는 기동 장치를 켜야 하는데, 장치가 가동되기까지 최소 10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곳이 한때 감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에반은 복잡한 눈으로 기동 장치를 응시했다.

“…….”

레카르도는 창고의 벽에 등을 대고 서늘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에반이 먼저 갇혔고, 에반을 미끼로 레카르도가 갇혔다.

다크 이글, 교활한 예언자는 강력한 시간의 저주를 걸었다.

모든 것이 3초를 기점으로 되돌아간다.

에반은 회귀자라 그러한 시간 법칙을 깰 수 있었지만 레카르도는 달랐다.

물론 레카르도는 엄청나게 강한 이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처럼 3초의 법칙에 귀속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주가 완전히 비켜가지 않아서 의식과 행동에 3초의 괴리가 생겼다.

이능을 사용해야겠다고 하는 생각과, 실제 이능의 발현까지 시간차가 나는 것이다.

이능은 엄청나게 복잡한 기운의 발현이며 레카르도와 같은 강자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3초란 오류가 생기기 충분한 시간이며 힘이 조금이라도 역류한다면 대참사가 생긴다.

밀폐된 대형 창고라는 이 공간 안에서 흑염의 폭발이 생긴다면 창고가 찌그러지기 전에 에반 테일러스의 육체가 먼저 재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다.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에반은 입술을 달싹였다.

“길어야 사흘.”

레카르도가 낮은 목소리로 그 말을 받았다.

다크 이글이 강력한 술사라고 해도 신이 아니라 몬스터일 뿐이다.

에반 혼자였다면 그를 이 창고에 가둬 작은 공간에 술법을 거는 것으로 충분했으나, 뒤따라온 레카르도를 가두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에 술법을 걸어야 했다.

당연하게도 술법의 지속 시간은 영원하지 못하다.

술법의 기운도 차츰 약해지고 있고 말이다.

3초의 술법이 풀린다면 레카르도가 기동 장치를 제어해서 이곳을 나가는 것은 간단했다.

“…….”

문제는 다크 이글이 술법으로 제 발을 묶어 두고 윈체스터 저택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그자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만큼 레카르도와 대적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이곳에 붙잡아 두는 것을 택했고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탁월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레카르도 윈체스터가 없는 윈체스터 저택은 반쪽짜리나 다름없으니.

지금쯤이면 세뇌당한 폭도의 군단을 이끌고 저택 가까이 접근했을 것이다.

에반의 머릿속에 양 갈래 머리를 한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샤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동장치를 응시하는 에반의 눈이 서늘한 살기를 띠었다.

“부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레카르도가 답했다.

“네가 죽으면 다 끝난다고 하지 않았나. 내 흑염이 폭발하면 너는 틀림없이 죽는다.”

“…….”

“언행에 책임감을 가져라.”

에반은 다크 이글을 만났을 때 방심한 것을 후회했다. 잠깐의 실수로 인해 이렇게 많은 시간을 잡아먹을 줄이야.

― 네가 날 죽였어. 수도 없이…….

다크 이글이 그 애의 얼굴을 흉내 내어 환상을 덧씌우지만 않았더라도 해치울 수 있었을 텐데,

― 그런 네가 날 지킬 자격이 있어?

피 흘리는 그 애의 모습에 잠시 홀렸었다.

그런 감정의 변화는 생전 처음이었으니까.

레카르도 윈체스터가 이곳에 갇힌 것도 순전히 에반 자신의 실수였다.

“…….”

에반은 1년간 이능의 힘을 되찾고 안정화시키며 가뿐히 진의 능력을 뛰어넘었다.

문제는 지금의 진 윈체스터가 다크 이글의 공격을 얼마나 막아 낼 수 있냐는 것. 에반은 장담하지 못했다.

“그 녀석은 머리를 잘 쓰지. 사흘의 공성전은 버틸 것이다.”

레카르도는 오셀로와의 공성 모의 훈련에서 백전백승을 올린 진을 떠올렸다.

오셀로도 썩 영리한 아이였으나, 진의 재치와 기지는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차분히 기다려라.”

레카르도의 말에 에반의 주먹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철컥, 하는 소리가 바깥에서 들렸다.

* * *

창고의 열쇠 구멍을 보았을 때, 나는 문득 내가 목에 걸고 다니는 흑탑의 열쇠를 떠올렸다.

위대한 지식이 담긴 흑탑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그것은 흑탑뿐 아니라 윈체스터가의 힘이 담긴 다양한 공간의 문을 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열쇠를 넣었다.

멍청한 행동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옳은 방향이라는 강력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쇠를 넣고 돌리자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반?”

문이 열리자마자 눈앞에 보인 것은 에반의 모습이었다.

에반이 바로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에반의 푸른 눈동자 표면에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내가 비추었다.

에반은 굳은 채 나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3초의 술에 걸린 것인가 의심될 정도로 오랫동안 말이다.

“어떻게 온 거지? 샤샤.”

에반의 뒤, 어둠 속에서 레카르도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나는 에반이 멀쩡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어 보았을 것이다.

흠칫한 나는 레카르도를 올려다보았다.

넓은 어깨와 장신, 눈처럼 하얀 은발과 서늘한 녹안…… 모든 것이 조금의 어색함도 없는 레카르도 윈체스터 자체였다.

“아버지…….”

빙의자도, 회귀자도 아닌데 강력한 술법에 지배되지 않았다.

역시 레카르도 윈체스터는 경외감이 들 정도의 강자이다.

“그 열쇠를 쓸 수 있었던 건가?”

이내 레카르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옷 바깥으로 나와 있는 흑탑의 열쇠를 본 모양이었다.

“네.”

“……성장했군.”

확실히 나는 흑탑을 열 수 없었다.

일전에 오셀로는 내가 자격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었지.

아무래도 그 이후 나는 꽤 성장한 모양이다.

나는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무사하셔서 다행…….”

그리고 예법을 차려 인사하려는데 레카르도가 한 손을 들었다.

그의 시선은 내 등 뒤로 향해 있었다.

에반은 잠시 뒤 내게 시선을 거두고, 창고 밖으로 발을 내디뎌 나아갔다.

파스슥― 파스스슥―

대기에서 정전기가 계속 일어나는 것처럼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에 금색의 균열이 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무언가 폭발하는 듯,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밤과도 같은 어둑한 하늘에서, 대낮의 하늘로 풍경이 변화했다.

그리고 내려오다가 올라가는 것을 반복하던 눈송이들이 바닥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날갯짓을 하다가 되돌아가던 새들도 앞으로 계속해서 날아갔다.

부스러기를 옮기던 개미도, 떨어지지 못하던 나뭇잎도 모두 순리대로 모습을 되찾았다.

하늘에서는 매캐한 냄새를 가진 금색의 재가 퍼지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가 싸우는 적은 라비아탄보다 훨씬 위력적이다.

내 뒤에 선 레카르도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술법이 깨졌다.”

굴뚝의 검은 연기가 하늘을 향해 뻗어 간다.

“규칙을 벗어난 존재가 셋이나 있으니 지속되기 힘들겠지.”

멈추었던 전투는 다시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하늘을 보며 눈을 부릅뜨는 것을 반복하던 로웬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디 상처가 깊지 않아야 할 텐데.

양손에서 청명의 기운을 내뿜으며 에반이 입술을 달싹였다.

“먼저 저택으로 가겠습니다.”

차가운 눈으로 정면을 보던 에반이 레카르도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에반에게서 오싹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손등을 쓸었다.

“……필시 죽여야겠습니다.”

에반이 원래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던가.

내가 엿본 스물일곱 회차의 모습들 중 어느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다.

페르세토스가 깃든, 살인귀가 되었을 때조차 공허한 눈이었지 저렇게 살기가 형형한 눈은 아니었는데.

저런 표정은 진이나 오셀로…… 윈체스터에나 어울리는 표정이다.

레카르도가 낮게 입술을 달싹였다.

“먼저 가 있거라. 뒤따를 터이니.”

얼핏 보기에도 병사들은 다들 부상이 꽤 심해 보였었다.

나는 멍하니, 멀어지는 에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에반에게 달려갔다.

“잠깐, 잠깐만.”

에반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어.”

원작에서의 에반, 지난 회차들에서의 에반…… 말로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자기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전진하는 전형적인 먼치킨 남자 주인공.

“…….”

그가 해내야겠다면.

“나도.”

에반은 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능을 쓸게.”

에반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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