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86화
일이 끝난 뒤 에반은 형형히 눈을 빛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고맙다거나 알았다거나 열심히 해 보겠다거나 뭐라 말이라도 좀 하지.
순 제멋대로이다.
나는 투덜대며 몸을 돌렸다.
“술법이 풀려서 다행이에요.”
나는 레카르도를 향해 미소 지었다.
레카르도는 멀어진 에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건방진 꼬마.”
레카르도의 몸을 타고 서늘한 흑염이 흐르고 있었다.
이내 레카르도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나는 그가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이유를 알기에 잠자코 있었다.
이내 레카르도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돌아가겠다더군.”
* * *
라비아탄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은 효과가 대단했다.
방어선에 있던 모든 병사들은 라비아탄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적의 불화살은 갑옷을 뚫을 수 없었다.
저택으로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는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은 밭을 갈던 농부, 약을 판매하던 상인, 흔한 거리의 불량배들, 노파 등 매우 다양했다.
공통적인 것은 눈이 풀려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후방으로 검은 로브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반쯤 공중에 떠 있는 사람은, 모두가 ‘예언자’라고 부르고 있는 자.
다크 이글. 멸종된 지 오래된, 지능을 가진 몬스터였다.
한때 강력한 주술로 인간을 사냥하던 몬스터는 인간들 사이에 둘러싸여 인간을 방패로 쓰고 있었다.
모두가 윈체스터의 영지민이었다.
“내가 두려운 것인가, 악의 근원이여.”
다크 이글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필시 진을 바깥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도발이었다.
그러나 진의 표정은 언제나 그랬듯 변함없었다.
“두려워하는 것은 너겠지.”
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다크 이글은 생각했던 것처럼 강력하지 않았다.
물론 그 그릇은 진 자신과 비교할 바 없이 강하겠지만 실상은 그 그릇을 반만 채우고 온 것 같았다.
“하하, 그분의 오른팔인 내가 한낱 윈체스터의 아들을 두려워한단 말이냐.”
아마 그 반의 힘은 파라메나에 쏟아두고 온 것일 테다.
아버지의 발을 어찌 묶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일에 생사를 걸어야 했을 테니.
“안에 숨긴 계집을 내놓아라. 어차피 그 애는 윈체스터도 아니지 않느냐.”
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샤샤 윈체스터, 멸망의 열쇠!”
“악의 싹!”
다크 이글의 말에 사람들이 동조하며 소리를 질렀다.
라비아탄이 샤샤를 공격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다크 이글의 목적 역시 동일하다.
진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메키우스의 열쇠가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어도, 이들은 샤샤를 원한다.
“가져가 봐, 자신 있다면.”
진의 몸에서 서늘한 흑염이 흘러나왔다.
흑염은 성벽을 넘어 뱀처럼 기어가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다크 이글의 눈이 번뜩였다.
사람들은 진격했고 흑염에 쓰러지고 비명을 질렀다. 지옥도였다.
이능은 영원하지 않다. 진도, 다크 이글도 팽팽히 맞서면서도 서로의 허점이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루하고 끔찍하고 무의미하게 생명이 스러지는 순간이 멈춘 것은 찰나였다.
지진 후 해일이 밀려들기 전처럼,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그럴 리가.”
다크 이글은 레카르도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사납고 거센 기운은 레카르도의 파장이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청명의 소드 오러, 빛처럼 빠르게 날아드는 그것이 다크 이글의 심장에 박혔다.
“……제기랄!”
파라메나에 술법을 지속시키기 위해 힘의 7할을 퍼붓고 왔다.
진 윈체스터 따위는 3할의 힘으로도 하루 만에 처리할 것이라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윈체스터 저택 따위는 애초에 목적이 아니었다.
사내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잡아 바치는 것뿐.
세뇌한 인간들의 영혼을 독식하며 이를 위해 오늘까지 힘을 키웠다.
하지만 파라메나의 술법이 깨졌다면.
“크윽.”
다크 이글은 거칠게 피를 토했다.
다크 이글의 검은 로브가 벗겨지고 민머리가 드러났다.
반은 노인의 얼굴, 반은 젊은 청년의 얼굴.
사람의 외양을 흉내 내나 사람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악에서 태어난 몬스터.
“……어떻게 깬 것이냐…….”
다크 이글이 섬뜩한 눈으로 에반을 노려보았다.
에반 테일러스는 강한 자이나 술법을 깰 수는 없었다.
“그리고 너는…… 지금의 너는!”
무엇보다 이토록 강력한 기운은 전에 없던 것.
“대답을 바라고 묻는 것 같지는 않군.”
에반이 다시 검을 긋기 위해 하늘로 치켜들었다.
“대답해 줄 이유도 없고.”
그리고 그때 다크 이글은 눈을 크게 뜨고 제 힘을 폭주시켰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쳤다.
인간의 몸이었던 다크 이글의 팔이 검은 날개로 변하고, 주둥이와 얼굴이 점점 짐승처럼 변하고 있었다.
덩치는 라비아탄만큼은 아니지만 성인 남자의 다섯 배에 이를 만큼 커졌다.
― 열쇠를 해치울 수 없다면
인간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울렸다.
― 회귀자라도 죽인다.
그 말에 에반의 푸른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잘 가라, 페르세토스의 부역자.”
갈퀴가 된 다크 이글의 발이 에반을 찢어발기기 위해 움직였지만, 그것은 바위를 가르고 딱딱하게 박힐 뿐이었다.
― 너는…… 어떻게 이렇게 강해진 것이지…….
다크 이글은 며칠 전, 에반과 거의 박빙으로 싸우다가 그를 창고에 가두었다.
그렇기에 사람이 고작 며칠 만에 이렇게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이건 성장이 아니다.
이능의 강도가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이내 에반은 화살 같은 깃털의 난사를 딛고 하늘로 날아오르듯 점프했다.
오러 소드, 그가 잡은 찬란한 광휘의 푸른 칼날이 거꾸로 돌아 다크 이글에게 내리꽂혔다.
에반의 뇌리에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 허가할 수 없다.
자신에게 이능을 쓰겠다는 샤샤 윈체스터의 의지와, 눈썹을 일그러트린 레카르도 윈체스터.
― 믿어 주세요. 저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에요, 아버지.
녹안에는 강력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샤샤 윈체스터는 지나치리만큼 겁이 없었다.
파라메나까지 와 어둠 속의 기이한 광경을 헤치고 창고의 문을 열었을 만큼.
그러나 죽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 에반에게 이능을 쓰겠어요.
레카르도도 알고 있을 것이다.
머지않아 샤샤 윈체스터의 빛이 몸에 임했을 때, 잠자고 있던 청명이 맹렬하게 끓어올랐다.
에반은 스물여덟 회차 만에 선명한 구원의 빛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
“……세상에…….”
“예언자님, 아니, 예언자님이 아니야.”
본체로 현신한 다크 이글은 눈을 뜬 채 죽어 있었다.
꿰뚫린 몸체의 구멍에서 흐른 검은 피로 온 바닥이 흥건해지고 있었다.
“예언자님이 아니었어. 괴물이었어!”
사람들은 이제야 눈의 초점을 되찾은 채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에반 테일러스는 다크 이글의 시체를 응시했다.
“이제 네가 죽음에 갇힐 차례야.”
도마뱀 같은 큰 눈에 제 모습이 반사되어 보였다.
저택의 첨탑, 진은 에반을 응시하다가 서늘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괴물이 죽었다.”
“아악!!”
“테일러스의 후계자가 괴물을 죽였어!”
에반은 죽기 직전 다크 이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샤샤 윈체스터는 세상을 구할 수 없어. 포기해.
저와 비슷한 힘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던 다크 이글은, 샤샤의 이능으로 강화된 지금으로서는 마치 참새처럼 가소로웠다.
이렇게 쉽게 죽여 버린 것이 아쉬울 만큼.
“페르세토스가 누구이건.”
다크 이글의 시체를 보던 에반의 입술이 쓸쓸히 비틀렸다.
“그 아이.”
그는 돌아서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누구도 건드리지 못해.”
에반의 몸에서 사나운 청명의 기운이 스멀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