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90화
“…….”
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토끼를 붙잡고 열심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근처의 풀잎에는 떨어진 피 몇 방울이 있지만, 토끼를 사냥한 것은 아니었다.
“……사냥 나온 거 아니었나?”
진이 묻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다친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불쌍해요.”
“안 다친 동물은 괜찮고?”
진의 말이 내 가슴을 푹 찔렀다.
그렇다. 나는 지금 다리가 다친 토끼에게 붕대를 감아 주고 있었다.
토끼는 천진난만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말이다.
작은 손으로 붕대를 꼭꼭 감은 나는 토끼를 다시 놓아주었다.
토끼가 깡총 뛰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던 나는 진의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진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아무래도 사냥은 제 적성이 아닌 것 같아요.”
진은 한참 동안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풋, 하고 웃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이래야 샤샤 윈체스터지.”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부끄럽다.
비장하게 나왔다가 이렇게 쉽게 포기하다니.
하지만 역시 죄 없는 동물들을 죽이는 것은 싫어.
다시 말을 탄 나는 저택으로 돌아가며 농담처럼 말했다.
어쩐지 얼굴에 열기가 오른다.
“어쩌면 저, 윈체스터가 아닐지도 몰라요.”
도서관에서 본 책에서는 윈체스터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윈체스터 일족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호전적이며 전쟁과 사냥을 즐긴다.’
내 말에 진은 대답지 않고 옅은 미소만 띨 뿐이었다.
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만약 진짜 아니면?”
진이 짙은 녹색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풋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는 누가 봐도 아빠 딸인걸요.”
레카르도를 빼닮은 은발과 녹안은 내가 윈체스터라는 사실을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트리샤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는데, 그녀의 흔적 따위는 없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출생의 비밀이 있다면.”
나는 농담처럼 쾌활하게 말했다.
“……살고 싶어요.”
내 말에 진이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나는 장난기를 담아 말을 이었다.
“저는 아피니제에 이어 어둠의 기일까지 폐지시켰어요. 그런데 제가 윈체스터가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면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혈족들의 시선은 처음부터 살벌했었다.
내가 윈체스터가 아니라면 레카르도나 오빠들도 나를 보호할 수 없을 테고, 미꾸라지처럼 가문의 물을 흐린 죄로…… 사형이면 다행인 일이다.
분명 안 좋은 끝을 맞을 거야.
“…….”
뭔가 받아칠 것 같았던 진은 한참 동안 나를 응시했다.
나는 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특히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말이다.
그리고 이내 진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에 비해 입술 끝이 조금 굳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뭔가, 심기에 거슬릴 만한 말을 했나?
“걱정 마.”
그때 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넌 틀림없이 윈체스터니까.”
그의 말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이 말을 이었다.
“가자, 어두워지기 전에.”
“네.”
이내 우리의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 우리의 집, 윈체스터 저택이 보였다.
* * *
“아…… 아버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레카르도와 마주쳤다.
진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나는 당황한 채 천천히 인사를 했다.
“첫 사냥에 나간다고 들었다.”
레카르도가 내게 물었다.
나는 한참 동안 레카르도를 바라보다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우리는 사냥감을 하나도 잡아 오지 못했으니까.
윈체스터라면 토끼 세 마리는 꿰어 왔어야 한다.
“아…… 그게…….”
토끼를 치료해 주고 왔다고 할 수는 없어서 망설이던 찰나 진이 말했다.
“태워 없앴습니다.”
나는 힐끔 진을 바라보았다.
그게 말이 돼? 누가 봐도 거짓말이잖아.
하지만 진은 서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첫 사냥물은 흑룡에게 재물로 바치는 것이 관례이지 않습니까.”
레카르도는 나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랬군.”
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관례가 있었다니 다행이었다.
잠시 후 레카르도가 우리에게 말했다.
“베루스에서 회의가 있었다. 헤일로에서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라 세 가문의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지.”
그 말에 나는 흠칫했다.
헤일로면, 죽은 바네사의 가문이었다.
그녀가 본색을 드러내기 전에도, 헤일로가 기근과 부패로 어려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장인 바네사 헤일로까지 그렇게 되었으니…….
어쩌면 예견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바네사가 준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진, 네가 가거라. 출정은 나흘 뒤다.”
레카르도는 진에게 명령했다.
진은 망설이지 않고 레카르도의 명령을 따랐다.
“명령 받들겠습니다, 아버지.”
현대로 치면 중학생 정도의 소년이지만 성인 남자 수십 명이 덤벼도 진을 이길 수 없다.
두뇌 또한 가문에서 레카르도의 다음이고 말이다.
“그리고 샤샤.”
잠시 생각하던 나는 레카르도의 목소리에 흠칫했다.
시선을 돌리니 짙은 녹색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집무실로 따라와라.”
* * *
레카르도의 집무실 문이 닫혔다.
마석 전등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북향의 이 방은 어두컴컴하기 그지없다.
책의 설명으로는, 이능을 가진 귀족들은 오감이 조금 더 발달되어 있어 어둠 속에서도 상대를 잘 알아보는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게는 영 그런 재능은 없는 모양이다.
“아야.”
앉으려다가 모서리에 무릎을 살짝 부딪친 나는 그곳을 문지르며 앉았다.
허리를 펴자 앞에 앉아 있는 레카르도 윈체스터가 보였다.
“사냥은 어땠지?”
레카르도는 열려 있던 잉크 뚜껑을 닫으며 물었다.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즐…… 거웠어요.”
“손에 피 냄새가 배어 있더군.”
레카르도의 말에 나는 손을 움찔했다.
“아…… 네…….”
치료할 때 묻은 피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죽음의 냄새는 아니었다. 그것은 조금 더 진득하지.”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피 냄새에도 종류가 있는 거야?
“로빈의 상태가 또 영 좋지 못해. 헛디뎌서 다리를 삐었다고 하는데.”
일순간 마석 전등이 깜빡이는 것 같았다.
나는 대답했다.
“네, 그래서 진 오라버니가 사냥에 따라가 주셨어요.”
“주의하거라.”
의미 모를 레카르도의 말에 나는 되물었다.
“네?”
진을 말하는 건가.
레카르도는 어둠 속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적의와 같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밤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지. 자랄수록 어둠은 가까워지고. 밤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면 결코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레카르도의 뒤로 난 창문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그저 충고하듯 서늘하고 담담한 어조.
나는 언젠가 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윈체스터의 누구도 믿지 말라는.
“……믿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레카르도에게 답했다.
확신을 가진 어조로 말이다.
레카르도는 그 표정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진 오라버니도, 오셀로 오라버니도, 그리고…… 아버지도 믿어요.”
일순간 레카르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처음에는…… 무서워했지만, 좋은 분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저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도.”
레카르도 윈체스터가 왜 이런 충고를 하는지는 알 만했다.
본디 윈체스터의 역사상 형제나 남매간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리는 사건은 너무도 흔했다.
바쉬론은 친동생인 레카르도의 아버지를 죽였고, 레카르도는 사촌 형제를 불구로 만들었던 것만 봐도 말이다.
그러니 진을 조심하라고 하는 것은 분명 호의일 것이다.
“흑염을 물려받는 건 그른 것 같으니, 저는 별이 될게요.”
“…….”
레카르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손만 까딱하면 내 시체조차 없이 나를 소멸시킬 수 있는 암왕이었으나, 나는 이제 그를 믿었다.
레카르도, 그리고 두 오빠들이 나를 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밤으로부터 자라났으며 밤과 어우러지는 작은 불빛이요. 그러니 함께 있고 싶어요.”
“……밤은 별을 다치게 하지 못하지.”
레카르도의 입술 끝이 미미하게 비틀렸다.
“너는 분명 그것에 가깝겠군.”
잠깐의 정적 끝, 나는 레카르도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우리는 어떻게 자라날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고…… 에반, 그 녀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