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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92화 (92/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92화

“후우…….”

나는 흑탑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여덟 살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내 능력치가 높아지고 이능도 쓸 수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흑탑의 열쇠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흑탑의 열쇠로 갇혀 있던 레카르도와 에반을 도왔으니까. 하지만 이곳을 여는 건 처음이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이 안에 얼마나 방대한 지식이 들어 있을까.

윈체스터 가문이 쌓아 온 경험, 그리고 어쩌면 엘릭서에 대한 내용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은 로젠토의 지하 세력으로부터 엘릭서의 제조법이 적힌 책을 입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아류작이라서, 엘릭시아라는 적은 효능의 약밖에 만들지 못했다.

카실리온은 내가 만든 신수가 엘릭서의 재료라고는 했지만, 군데군데 조각이 난 지도처럼 엘릭서의 제작은 아직 먼 이야기.

하지만 조금의 단서라도 더 있으면, 노력해 볼 가치가 있다.

철컥―

흑탑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조심하셔야 해요.”

마야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내게 당부했다.

탑에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탑이 허락한 자만 출입할 수 있다.

“걱정하지 마.”

나는 마야를 안심시키고 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본 탑은 바깥에서 본 것보다 더 거대했다.

바깥에서는 7층 높이 정도 되는 좁고 아담한 탑으로 보였으나, 안에서는 25층은 될 만큼 위가 뻥 뚫려 있었다.

나는 긴장한 채 차츰 안으로 걸어갔다.

내가 흑탑에 가겠다고 하자 진의 반응은 태연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위험한 요소가 있었다면, 가만있지 않았겠지.

그러니 탑의 내부는 안전하다고 생각해도 된다.

탑의 중앙에는 시계 모양으로 둥글게 된 바닥 표식이 있었다.

“계단은 없나?”

나는 두리번대다가 그 표식 위에 올라왔다.

그러자 바닥 표식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어떤 장치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밝게 빛나는 표식은 나를 스캔하듯 띠 모양으로 머리끝까지 올라가더니, 갑자기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 뭐지?”

땅이 진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벽이 뒤바뀌는 소리였다.

비어 있는 돌탑 형태의 벽이 쿵, 쿵 소리를 내며 내부에 있던 서고가 눈앞에 드러났다.

하나, 둘, 셋, 넷…….

나타난 책장은 레카르도의 키보다도 훨씬 높고 거대해 보였다.

자격이 있는 자만 들여보내고, 또 스캔으로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는 2중 보안인 모양이다.

이내 총 열네 개의 거대한 책장이 나타나고, 그 뒤로 돌계단이 형성되었다.

나는 책장에 가까이 가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내 시선이 닿은 책들이 뽑혀 공중에 떠오르고, 다른 책으로 시선을 옮기면 다시 책장 안으로 들어갔다.

“우와아…… 미쳤어!”

마법이 가득한 세상에 온 느낌이다.

아무리 높은 곳에 있는 책도 바라보기만 하면 자동으로 뽑히니 사다리가 필요 없었다.

“우선 계단도 올라가 볼까.”

보고 싶은 책의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그것을 뒤로하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탑은 지식의 보고답게 어마어마한 감상을 가져다주었다.

2층에는 윈체스터 영지의 모든 씨앗 종자와 광물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3층에는 전설적인 몬스터들로부터 획득한 위대한 전리품들.

4층에는 역대 가주들이 사용하던 훌륭한 무기들이 있었다.

5층에는 3중 보안 장치가 되어 있는 진귀한 보석들이 수도 없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나조차 만질 수 없었다.

그 이후의 층에도 마치 박물관처럼 볼거리가 많았지만 가장 인상 깊은 것은 12층이었다.

이 탑의 꼭대기 층이기도 한 12층은 층고가 5미터도 넘었다.

“……아름다워…….”

고룡 메키우스의 조각이었다.

황금색 용은 하늘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고, 날개는 천사의 날개처럼 아름다웠다.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조각해 두었을까.

나는 작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손이 메키우스의 조각에 닿았을 때 문득 강한 빛이 나를 감쌌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고룡 메키우스의 선물’ 패키지를 획득하였습니다.]

잠시 후 빛이 가시자 내 상태창의 메시지가 보였다.

선물이라는 건, 아이템?

나는 바로 인벤토리를 열어 선물을 확인해 보았다.

[인과율 증폭기 – 절체절명의 순간, 일시적으로 대상과의 인과율을 100%로 증폭시킵니다.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속독의 알약 – 당신의 책 읽는 속도를 10배 증가시켜 줍니다.]

[망각의 술 – 99%의 확률로 대상자는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1%의 확률로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있습니다.]

오, 오랜만에 보는 새로운 아이템들이다.

나는 의심치 않고 속독의 알약을 바로 섭취했다.

뭔가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 기분이다.

인과율 증폭기와 망각의 술도, 어딘가 쓸 일이 있겠지.

둘 다 부작용 주의 문구가 적힌 것이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당분간 인벤토리에 잘 보관할 생각이었다.

마지막 층에서 아이템 선물을 받은 나는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책장 앞에 섰다.

‘101가지 희귀한 약초’

나는 그 책을 응시했다.

내 앞에 내려온 책은 내게 얌전히 안겼다.

이곳의 것들은 들고 나가지 못한다고 한다.

아이템은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서 상관없겠지만, 책과 같은 원래의 부속들은 탑의 소유였다.

그러니 여기서 읽고 나가야 한다.

“…….”

한때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던 나인데 문제없다.

나는 중간의 책상을 끌고 와서 그 위에 앉아 책을 펼쳤다.

탑은 조용했고 쾌적했다.

* * *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나?”

스무 번째 책을 덮자 그것이 떠올라 원래의 자리에 꽂혔다.

확실히 속독의 알약이 효과가 있는지, 한 페이지는 1초면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필요한 것도 찾았고…….”

엘릭서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발견했다. 이것을 카실리온에게 알려 주면 도움이 될 터이다.

그리고 페르세토스에 대한 정보를 찾던 중 ‘윈체스터의 가보’라는 책을 읽다가 중요한 내용을 발견했다.

메키우스의 순수한 힘을 담아 놓은 매개체 ‘오르테니안’을 윈체스터에서 가보로 보관하고 있으며, 그 힘은 페르세토스와는 상극이다.

악의 기운을 파괴한다고 하니 말이다.

강력한 흑염을 제어할 수 있는 순혈의 윈체스터만 얻을 수 있는 엄청나게 강력한 힘이라고 하는데…….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들이 있기는 했지만 맥락을 보아 중요한 물건인 게 틀림없다.

‘진이나 오셀로를 강화시킬 수 있을지도.’

어쨌든 얻어 두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을 읽은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퀘스트까지 눈앞에 떠 있었다.

[퀘스트 : 윈체스터 공작가의 전설적인 가보 ‘오르테니안’을 해제하여 정당한 주인에게 힘을 부여하세요.]

[퀘스트 보상 : 500루비, 위대한 업적 ]

나는 흑탑을 나왔다.

문을 열자 아까와는 달리 깜깜했다.

마야는 들어갔으려나, 생각하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독서는 끝났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오셀로였다.

어둠 속 녹안을 선연히 빛내며 그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내 내 앞으로 걸어온 오셀로가 내게 손을 뻗었다.

“…….”

나는 머리 위에 얹어진 손의 무게를 느끼며 오셀로를 올려다보았다.

“꼬맹이, 이제 흑탑을 열 수 있게 되었네.”

오셀로의 말에 나는 대답했다.

“응, 멋지지?”

일전에 내가 흑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 오셀로가 태연히 들어갔다가 나온 일이 생각난다.

“흑탑…… 몇 층이었지?”

“12층.”

내 말에 오셀로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런.”

“들어갔다 나와서 알고 있잖아.”

오셀로가 내 머리에서 손을 내렸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1층이었어. 책이라고는 한 권도 없었지.”

“그게 무슨 소리…….”

장난 같은 말에 나는 되물었다.

“흑탑은 대상의 적합도에 따라 자신의 잠재력을 보여 줘. 적합도란 여자일수록 높고, 기량이 뛰어날수록 높고, 윈체스터에 대한 정신적 소속감이 높을수록 높아.”

오셀로의 시선이 내가 목에 찬 열쇠로 향했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흑탑에 들어갔어도, 당연히 볼 수 없었어. 흑탑은 가주의 배우자를 위한 공간이니 그럴 수밖에.”

원래 가주의 배우자가 열쇠의 주인이라는 것은 들어 본 적 있었다.

흑탑이 자체적으로 판단하는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오셀로의 표정이 꽤 심각해 보였다.

“12층짜리 흑탑은 들어 본 적도 없어. 어머니가 9층이었다고. 오히려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 방지를 위해 흑탑은 직계의 피가 흐르는 여자에게는 진정한 힘을 드러내지 않…….”

일순간 오셀로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미소 지었다.

“난 잠깐 가지고 있는 거뿐이야. 후계자인 진 오라버니가 누군가와 결혼하면 넘겨줘야겠지.”

직계의 피가 흐르면 거부한다니, 어쩌면 오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셀로는 한참 동안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뒤 고개를 돌렸다.

“……대가주도, 아버지도 모두 알고 있었던 거군.”

나는 오셀로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진조차.”

오셀로는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어 헝클고는 돌아 사라졌다.

남아 있는 정적 속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오셀로의 눈빛이, 오묘했던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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