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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93화 (93/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93화

헤일로의 대지에는 강렬한 눈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거짓 예언자 다크 이글이 쓸고 간 황폐화된 마을과 눈이 풀린 사람들, 헛된 희망을 좇아 거리를 헤매며 중얼거리는 가련한 이들, 곡식은 바닥을 보이고 거리에는 온통 건달들과 고아들뿐이다.

“귀족 도련님이신가?”

거리를 거닐던 에반에게 한 무리의 패거리가 따라붙었다.

“헤일로의 정국을 안정시키겠다고 세 가문에서 귀족 나리들을 보낸다는 말을 들었는데, 놀러라도 온 차림새시구만.”

비쩍 마른 사내는 비꼬는 목소리로 건들거렸다.

“위선자들! 위선자들!”

뒤에서 고아들이 따라오며 에반을 손가락질했다.

“언제부터 헤일로 영지를 신경 쓰셨다고, 응? 보나마나 곳간을 털어가려 왔겠지만 보다시피 우리 영지에는 아무것도 없어. 헤일로 공작저마저 텅텅 비었다고.”

“혹은 적선이라도 하러 오신 건가?”

사내의 물음과 함께 더 많은 무리가 따라붙었다.

그들의 번뜩이는 시선은 에반의 값비싸 보이는 옷에 가 있었다.

“귀가 들리지 않아, 꼬맹아?”

이윽고 덩치가 큰 사내 하나가 에반을 막아섰다.

“겁 없이 혼자 헤일로에 들어왔으면 빈털터리가 될 각오는 했어야지.”

그러고는 에반에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에반의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이내 에반의 몸에서 폭발하듯 흘러나오는 강렬한 청명의 기운에 에반을 둘러싼 사람들은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으어억!!”

“으악!! 이능이다!”

“공작가의 귀족이다!”

헤일로 영지 내 귀족과 평민의 비율은 1대1000 정도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모든 귀족이 헤일로 가문은 아니다.

“푸른 용이다!”

따지자면 전체 귀족의 100분의 1 정도만 헤일로 일족이었다.

그러나 그 소수의 헤일로가 피라미드 구조의 정점에 있다.

그러니 이런 길거리에 위력적인 이능을 쓰는 공작가급의 고위 귀족 소년이 혼자 돌아다니리라 상상하는 자는 없었을 것이다.

“……귀찮게 하지 말고.”

에반의 입술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꺼져.”

나동그라진 남자는 두 눈을 비볐다.

마치 거인을 눈앞에 둔 것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모두는 엎드린 채 에반을 위해 길을 내었다.

4대 가문의 직계라면 소년일지라도 무장을 한 수십 명의 병사들을 한순간에 척살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거짓부렁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에반은 엎드린 이들 사이를 걸었다.

이내 그들을 지나친 에반은 골목을 돌아 어느 가옥 앞에 멈추어 섰다.

스물일곱 번의 회귀 중 해 보지 않은 짓을 시험해 볼 때가 되었다.

미친 짓일지도 모르겠지만.

“…….”

저를 향해 녹색 눈을 빛내는 어린아이를 문득 떠올렸다.

고개를 숙인 에반은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잠시 뒤.

엉망이 된 도시의 허름한 가옥에서, 여유로운 복장과 표정을 한 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호오.”

흥미로운 눈빛을 띠는 그에게 에반은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윈체스터 공작가의 대가주를 뵙습니다.”

* * *

에반은 내게 기다리라고 했었다.

하지만 에반만을 믿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나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지.

[퀘스트 : 윈체스터 공작가의 전설적인 가보 ‘오르테니안’을 해제하여 정당한 주인에게 힘을 부여하세요.]

[퀘스트 보상 : 500루비, 위대한 업적]

오르테니안은 메키우스가 남긴 거대한 에너지체로, 용의 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메키우스의 힘이 그 껍데기를 깰 것이며, 합당한 강자가 그 과실을 취할 것이다.

― 주인은 위대한 그림자의 왕이며, 흑염의 힘을 계승하는 윈체스터의 순혈이 이를 이끈다.

‘탑에서 읽은 정보에는 뜻 모를 문장이 예언처럼 덧붙여져 있지만, 이게 무슨 말인지는 직접 찾아봐야 알겠지.’

도서관에서 그나마 최근에 쓰여진 기록도 찾아냈다.

바쉬론이 가보 쟁탈전을 벌이며 에녹 윈체스터, 그러니까 레카르도의 아버지를 죽게 했는데 그 일에 얽힌 가보가 바로 오르테니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름 저택에서의 일 이후, 바쉬론은 페르메티스를 살려 주는 대신 레카르도에게 오르테니안을 반납했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은 레카르도의 수중에 있는 가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애초에 이런 걸 쓸 수는 있는 거야?’

나는 그림으로 묘사된 오르테니안을 보며 생각했다.

너무도 강한 에너지체이지만 봉인이 되어 있다고 하며, 활성화하는 조건이 까다롭다는 것 외에 알려진 바는 없다고 한다.

언젠가 그 힘이 윈체스터의 것이 되리라는 흑룡의 예언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윈체스터의 가주들 중 그것을 쓸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저 상징적인 가보로 여겨진다고.

“절대 안 됩니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레카르도에게 물어볼 자신은 없었기에 나는 로웬을 불렀다.

조금의 정보라도 말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로웬은 어림도 없었다.

로빈보다 백 배는 딱딱하다.

“차나 한잔하고 가요.”

“싫습니다.”

전에 로빈이 내게 어떻게 당했는지 알기 때문에, 이 방법도 소용없다.

“아가씨를 위해 충고드리건데, 윈체스터의 가보는 위험한 것이 많습니다. 아가씨가 길들인 카테르와는 결이 다른-.”

“로웬은 직접 본 적 있나요? 이야기라도 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로웬은 여지도 주지 않은 채 가 버렸다.

“……우선 저택에 없는 것은 확실하네.”

도서관을 나서며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르테니안에 대해 상당히 아는 것처럼 행세했음에도, 로웬은 긴장하지 않았다.

내가 접근할 수 없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분명 어디엔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 둔 것이다.

로웬의 말대로 위험한 힘은 맞는 것 같다.

강력한 이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다룰 수 없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퀘스트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앞으로의 수를 생각하며 돌아 나오는 나를 익숙한 목소리가 불렀다.

“샤샤.”

나는 계단 앞에서 멈추어 섰다.

분홍 머리칼이 사르륵, 소리를 냈다.

오셀로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오셀로를 올려다보았다.

“있잖아, 물어볼 게 있는데.”

* * *

“……이건?”

“로클랜드의 별, 어머니가 남겨 주고 떠나신 오르골이야.”

오셀로를 따라 오셀로의 방에 도착했을 때, 둥근 오르골이 보였다.

진과 오셀로가 아주 어렸을 때, 그들의 친모가 주신 물건이라고 한다.

“이걸 이런 식으로 조립하면.”

오셀로는 둥근 오르골의 윗부분을 꺼내 뒤집고 아랫부분과 맞추었다.

그러자 둥근 오르골 위에 흔들거리는 바늘이 드러났다.

나는 놀라 그것을 보았다.

그 바늘의 끝은 북쪽이 아닌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오르테니안을 가리켜.”

“어떻게…….”

나는 믿을 수 없어 오셀로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오르테니안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오르골 안에 있다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셀로는 오르골을 보는 나를 두고 뒤돌아서서 방구석의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그의 방은 어두웠고, 벽에는 열 개가 넘는 검이 걸려 있었다.

“오르테니안 추적기야. 어머니는 이걸 아버지께 빌려 드리며 인연을 얻었지.”

“……인연…… 이라면…….”

“에녹 윈체스터,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바쉬론 윈체스터에게 살해당했잖아. 아버지가 증명하기 전에는 바쉬론에게 전혀 혐의가 없었어.”

바쉬론과 레카르도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바쉬론이 할아버지에게서 오르테니안을 빼앗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께서는 이 나침반으로 알아내셨어.”

“맞아. 그랬다고 했지…….”

“바쉬론도 죽일까 고심하셨지만, 바쉬론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야. 그가 평생 바라왔던 가주 자리를 눈 뜨고 빼앗기는 거지.”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이야기에는 사실 복잡한 사연과 감정이 얽혀 있었다.

“아버지가 가주가 된 뒤에도 바쉬론은 오르테니안을 돌려주지 않았지만.”

“…….”

“뭐, 여름 저택 사건에 연루된 페르메티스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가로 결국 바쉬론에게서 돌려받았지.”

죽고 죽이고, 살벌한 사연이 많은 윈체스터의 가보였다.

“오셀로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

내 물음에, 벽에 머리를 기댄 오셀로는 입술을 달싹였다.

“기억나지 않아. 그저 기억하는 건…….”

이내 오셀로가 눈을 감았다.

“아버지께 사랑받지는 못하셨어.”

뭐, 이해가 가는 말이기는 했다.

레카르도 윈체스터. 겨울바람보다도 차가운 심장을 가진 그가 진심으로 여자를 사랑해 본 일이 있을까.

“그래도 불행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아. 목소리가…… 항상 따뜻하셨거든.”

오셀로는 긴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잠시 숨었던 녹색 눈동자가 선연한 빛을 띠고 있었다.

“트리샤도 이 오르골에 대해 알았어.”

나는 오셀로의 말에 조금 놀라 흠칫했다.

“오르골이 오르테니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 오르골이 내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었지.”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오셀로의 표정은,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내가 긴 악몽에 시달리고 있을 때 말이야.”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이내 오셀로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쓰임은 그때로 끝난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군.”

오셀로를 보던 나는 오르골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오르골의 뒤에 달린 태엽을 몇 바퀴 돌렸다.

이내 바늘이 점점 밝아지더니 한 방향으로 고정되었다.

“버리지 않길 잘했어.”

바늘의 끝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 * *

“진이 있었다면 진도 함께했겠지만.”

그날 밤, 내 방 한구석에서 오셀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밤을 틈타 움직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나 혼자뿐이네.”

오셀로는 조금 들뜬 것처럼 보였다.

이내 창문을 연 그가 두 손으로 나를 들어 올렸다.

“앗, 조심해.”

마치 공주님 안 듯 번쩍 들어 올려서 나는 깜짝 놀라며 오셀로의 목을 잡았다.

오셀로는 나를 손으로 받쳐 안은 채 말했다.

“꽉 잡아. 뛰어내릴 테니까.”

“잠깐.”

내 목소리는 오셀로의 손에 의해 막혔다.

그가 비명을 지르는 내 입을 막은 것이다.

2층에서 뛰어내렸음에도 놀랍도록 충격 없이 착지했다.

서늘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오셀로의 녹색 눈이 은은히 빛났다.

“가보 훔치러 간다고 온 집안에 알릴 셈이야?”

핀잔 같은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뒤 오셀로가 나를 땅에 내려 주었다.

겨울밤의 날씨는 상당히 쌀쌀했다.

앞으로 걸어 나가려는데, 뭔가 묵직한 것이 몸에 걸쳐졌다.

오셀로의 재킷이었다.

“…….”

나는 오셀로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은은한 빛을 내는 오르골 나침반이 들려 있었다.

그 바늘은 선명하게 동쪽 방향을 가리키는 중이었다.

“오빠도 혼날 텐데 괜찮아?”

이내 오셀로는 대답 대신 비스듬한 시선으로 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지 않을 리가 없지.”

“괜찮다는 거야, 안 괜찮다는 거야.”

“글쎄…… 어쨌든.”

밤의 달빛을 받아 오셀로의 녹안이 형형히 빛났다.

“간만에 둘만의 산책이네, 꼬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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