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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94화 (94/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94화

“스물일곱 번의 회귀라…….”

헥토르와 에반은 탁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나를 만난 것이 처음은 아니구나.”

헥토르의 말에 에반은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네 긴 회귀에서, 몇 번이나 나를 알았지?”

에반은 대답했다.

“여섯 번 정도. 그리고…….”

에반은 이 장소를 알고 있었다.

“열여덟 번째 회차부터는 당신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헥토르 안에서 페르세토스가 부활했던 회차였다.

“내가 네게 협조했었더냐.”

“때로는, 그리고 내게 선물도 주었습니다.”

“선물이라 함은.”

“멜번 지역에 당신이 보관한 스퀘어 스톤, 이미 내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반의 말에 헥토르는 호오, 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스퀘어 스톤은 이형의 공간을 만드는 스톤으로 자신이 젊을 적 숨겨 두고 쓸 일이 없어 지금껏 잊고 있던 물건이었다.

“멜번의 거처까지 너에게 알려 줬을 정도면, 내가 너를 꽤 신뢰한 모양이군.”

“한때 당신은…….”

에반의 서늘한 푸른 눈이 헥토르에게 닿아 있었다.

“제국 전체를 통틀어 내가 유일하게 어른으로 인정했던 사람이었으니까.”

헥토르 윈체스터, 윈체스터의 전대 가주인 그에게 9회차의 에반은 적개심을 드러냈었다.

그러나 그는 가문 간의 관계에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고, 에반에게 어떠한 편견도 갖고 있지 않았다.

에반이 제 가문을 몰락시키려 함에도 이 또한 섭리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초연한 태도로 응할 뿐이었다.

에반이 자신이 회귀자라는 것을 털어놓았던 때, 헥토르는 그럴 거라 짐작했다며 에반에게 스퀘어 스톤을 주었다.

이능뿐 아니라 그 무엇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무한의 장소. 다시 회귀하더라도 기록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 네 자신을 잃지 말아라. 계속 네가 누군지 떠올려라.

그의 말대로 몇 번을 회귀하더라도, 그가 이전 회차에 스퀘어에 조성해 둔 환경은 그대로였다.

에반은 스퀘어 스톤만 다시 가져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끊임없이 기록했다.

스퀘어 스톤이 아니었다면 제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린 괴물이 되어 진작 정신을 놓았을지도.

“당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모든 것에서 해탈한 사람처럼, 그는 자유로웠다.

그리고 언제나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말이다.

“그래, 네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더냐.”

그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에반에게 물었다.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을 보면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에반은 잠깐의 생각 후 입을 열었다.

“마지막 재앙을 없애야겠습니다. 당신의 손녀, 샤샤 윈체스터를 위협하는 그것.”

‘샤샤’라는 말에 헥토르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마지막 재앙의 정체를 아느냐.”

‘소녀의 재앙’은 아주 오래된 마물이었다.

에반의 예상이 맞는다면 그 소재와 행동 양식을 알 수 있었다.

네 가지 재앙 중 유일하게 일전의 회차들 중 하나에서 마주해 본 적 있었으니까.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죽일 수 없는 것이지만 헥토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네, 그 일에 당신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내 에반의 입술이 달싹였다.

“당신의 흑염으로 나를…….”

* * *

“이렇게 오래 걸어 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록센 영지, 나는 끊어진 덤불을 헤치며 중얼거렸다.

오셀로는 나보다 한발 앞서서 소드 오러로 덤불 줄기를 끊고 있었다.

록센은 우리에게 편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지였다.

그래서 여기에 보관하셨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오르골은 정확히 록센의 방향을 가리켰었다.

“……그러게, 업히라니까.”

아침이 되어서야 우리는 드디어 오르테니안이 봉인된 장소에 도달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들어오지도 못할 빽빽하고 위험한 숲, 일곱 개의 결계가 어느 구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거무스름한 몸체인데 환한 빛을 내뿜고 있는 기이한 구체였다.

크기는 크지 않다. 아마 축구공 정도?

오셀로는 곧장 소드 오러를 결계에 날렸다.

“오셀로.”

나는 성급한 결정을 한 오셀로를 다급히 불렀다.

소란을 피우면 분명 알게 될 테니까.

두꺼운 나무를 단칼에 베어 낼 정도로 강한 소드 오러이지만, 결계에 닿는 순간 오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셀로는 태연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난 원래 처음 보는 게 있으면 검부터 쑤셔 봐.”

나는 말문을 잃었다.

“하아…….”

그리고 그 순간 결계가 빛나기 시작했다.

오셀로는 황급히 나를 붙잡아 뒤로 밀었다.

번쩍―

결계의 가운데 지점에서 화마의 기운이 우리에게로 쏟아졌다.

순간 오셀로의 몸에서 검은 흑염의 뱀 다발이 거센 속도로 퍼져 나왔다.

그리고 팽팽하게 화마와 대치했다.

오셀로의 뒤에 있는데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후 화염이 멈추자 오셀로는 흑염을 해제했다.

“샤샤, 괜찮아?”

“응. 난 멀쩡해.”

다행히 오셀로의 몸에도 그슬린 곳은 없어 보였지만, 방어 시스템의 무서움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쉬운 결계를 걸어 두셨을 리가 없지. 하하, 재미있네.”

오셀로가 중얼거렸다.

빛나고 있는 일곱 개의 지점이 보였다.

저 하나하나에 엄청나게 강력한 주문이 걸려 있는 것이다.

“흑탑의 열쇠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열쇠를 꽂을 구멍 따위는 없다.

게다가 저 결계는 윈체스터가의 흔한 저장소들이나 마탑이 아니다.

나는 고심했다.

겨우 오르테니안이 있는 장소를 찾아냈지만 도무지 타파할 방법이…….

“……방법이 있죠.”

그리고 일순간 들려오는 제삼자의 목소리.

오셀로의 몸에 다시 흑염이 화르륵 일었고, 나는 경계하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어 보였던 뒤에서 누군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나는 기절할 뻔했다.

“헤헤, 샤샤.”

카실리온의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는 나뭇잎이 잔뜩 꽂혀 있었고 옷차림 또한 엉망이었다.

오셀로가 소드 오러를 쓰려 하자 나는 얼른 그를 막았다.

“카실리온 아카다야. 위탁 교육을 받고 있는 애!”

“누구이건 간에 윈체스터의 뒤를 밟은 자를 용서할 수 없다.”

“아군…… 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내…… 친구나 다름없어.”

가차 없이 카실리온에게 검을 들이대려 하는 오셀로를 겨우 막았다.

“우리를 도와주러 따라온 것 같고, 응? 잠깐 진정해.”

그리고 카실리온에게 물었다.

“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따라왔어, 밤새.”

카실리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록센까지…….”

“운명적인 향기를 따라서. 샤샤에게 분명 중요한 일인 것 같았거든. 그렇다고 끼어들기도 그래서 그냥 쫓아왔는데…….”

카실리온은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킁킁댔다.

“가까이서 맡으니 언제나처럼 황홀해, 재료 언니.”

오셀로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참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자애만 아니었어도 그냥 죽였을 거다.”

오셀로는 으득 이를 악문 채 이내 협박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검을 집어넣었다.

……카실리온이 남자라는 거, 오셀로에게는 되도록 오래 숨기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말한 방법이 뭐야?”

나는 본론으로 들어가 카실리온에게 물었다.

몰래 따라온 것을 따지는 것보다 지금은 저 결계를 푸는 방법이 중요했으니까.

카실리온은 분명 저 결계를 풀 방법이 있다고 했다.

카실리온은 싱긋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수식을 풀면 돼. 저거, 복잡한 수식으로 마석을 감싼 결계거든.”

“수식……?”

오셀로는 싸늘한 목소리로 카실리온을 윽박지르려 했다.

“결계의 수식을 풀어 결계를 해제한다고? 허튼소리 하지 마.”

오셀로의 윽박지름은 당연한 것이다. 결계의 수식을 푼다는 것은, 총이 발사되는 순간 총알의 궤도와 속도를 계산해 타이밍 맞게 일정한 방향으로 피한다는 것과 비슷한 난이도일 것이다.

또한 결계는 일곱 개이니, 그것을 일곱 번 연속해서 수행한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인간의 두뇌와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카실리온은 자신 있다는 듯 양손을 꼼지락대며 말했다.

카실리온의 볼이 흥분한 듯 붉어져 있었다.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샤샤를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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