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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97화 (97/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97화

“네, 예람이 학원비는 금방 보내드릴게요.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검은 생머리의 여자는 편의점을 나서며 전화 통화를 했다.

동생의 학원비 입금 날짜를 못 맞춰서 전화가 온 것이다.

비닐봉지에는 유통기한이 몇 시간씩 지난 삼각김밥과 간식들이 있었다.

원래 폐기 식품은 가져가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점주가 사정을 봐주고 있었다.

아스팔트 도로를 지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자 오래된 5층 아파트가 보였다.

곧 재건축 예정인 아파트는 월세가 쌌다.

이 또한 개발이 시작되면 비워 줘야 하겠지만, 그래도 여러 식구가 머무르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17평이라 조금 좁기는 하지만.

“언니!”

“누나!”

열여섯 살인 둘째와 열 살인 셋째가 반갑게 그녀를 반겼다.

“왔냐. 고생 많았다.”

그녀의 모친이 피곤한 기색으로 맞았다.

모친은 만성 천식, 자가면역질환과 갑상선염이 있어 일을 하기 여의치 않았다.

나라의 복지 제도를 통해 지원받고 있었지만, 약값도 상당하고 무엇보다 네 식구의 생활비를 충당하려면 첫째인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물세 살의 그녀는 이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었다.

“하람이 너, 수학 숙제는 했어? 그리고 필통 좀 가지고 다녀. 선생님한테 전화 왔더라.”

“으, 오자마자 잔소리.”

“잔소리 좀 안 하게 스스로 해 줄래?”

남동생과 대화를 나누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람아.”

“응, 엄마.”

“니 내일 학교 끝나면 동사무소에서…….”

그리고 엄마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교대해 주었던 야간 근무자였다.

“네? 저 이제 막 들어왔는데…… 알았어요.”

“무슨 일 있어? 콜록.”

전화를 끊은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편의점 야간 알바가 갑자기 집에 큰일이 생겨서 가 봐야 한대요. 다시 좀 와 달래요, 점장님이 시급은 두 배로 챙겨 준다고…….”

“누나 잠은?”

“맞아, 언니. 새벽 내내 일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바깥은 캄캄해져 있었다.

“그리고 밥도 안 먹었잖아.”

“밥 먹고 가!”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두 배인데, 해야지. 밥은 편의점에서 적당히 때울게.”

* * *

자신의 침실 안, 레카르도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창밖은 어슴푸레했고 안개가 끼어 있었다.

레카르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샤샤의 사연에 대해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르테니안은 선명하게 샤샤 윈체스터의 과거를 보여 주었다.

샤샤 윈체스터가 보통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트리샤 퀠른과 관계한 적 없었으니, 제 아이가 아닌 것도 당연하다.

아이는 고룡 메키우스가 윈체스터가를 선택하여 내려보낸 존재.

그리하여 총명하고, 그리하여 스스로 움직이며, 그리하여 남다르다.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두 아이들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눈이 가는 이유도 말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이계에서 온 영혼이었다.

아카다의 지탑에서나 볼 법한 기구들과 독특한 이능이 가득한 그 세계에서 그녀는…….

― 죽고 싶지 않아.

깡마른 몸이었다. 툭, 하고 손목이 떨어졌다.

검은 바닥에는 피가 고이고 비가 내렸다.

검은 눈동자의 빛이 차갑게 식어 갔다.

식사는 끝내 하지 못해 홀쭉한 배를 하고서.

꿈속의 모습을 회상하던 레카르도 윈체스터의 눈동자에 서늘한 어둠이 서렸다.

어린아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자 가슴 깊이 불편함이 차올랐다.

“…….”

이내 레카르도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욱신거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 * *

나에게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비상! 비상! 이건 비상이야!

“저어…… 아버지.”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겨우 숨기고 레카르도에게 말했다.

“오늘 조금 과한 것 같지 않아요?”

레카르도는 혼자 식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매일은 좀…….”

‘좋아했다’는 표현보다는 공식상의 일정이나, 나와의 주 1회 식사가 아닌 이상 거의 혼자 식사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불편한가?”

포크를 든 레카르도가 내게 물었다.

“아, 아뇨.”

그렇다고 대답하겠나요!

“그냥 어쩐지 일상에 긴장이 한 스푼 첨가되는, 그런 기분이에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시는 겁니까.

다시 식사를 시작한 레카르도가 말했다.

“역시 일주일에 한 번보다는 매일이 낫겠지. 이제는 소화제도 먹지 않는다고 들었으니.”

나는 반박 본능을 억눌렀다.

오르테니안을 잘못 드셨나요?

꼭 이러셔야겠어요……? 꼭?!

“그래서 앞으로 매일, 저녁 식사는 가족이 같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겠다.”

그는 ‘가족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그렇다고 내게 전혀 무관심하거나 밖으로 나돌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는 친근함이나 감정에 대한 표현이 전혀 없다시피 했다.

진, 오셀로, 나 셋 중에 하나가 죽어도, ‘그렇군…….’ 할 것 같은 위인이라고 할까.

트리샤가 왜 이런 남자와 연애를 했을까 믿어지지 않다가, 얼굴을 보면 급하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우리 아버지.

“그런데 오셀로 오빠는 왜 부르지 않으시나요?”

“오셀로는 근신이니까.”

“그건 저도…….”

딸각, 하고 레카르도가 나이프를 들자 나는 말을 멈추었다.

그냥 잠자코 식사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나는 바질을 곁들인 가리비를 포크로 콕 찍었다.

크림 소스에 찍어 먹으면 굉장히 맛있다.

잡생각을 치우고 식사에 집중하고 있던 때 하녀 하나가 접시가 올려진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조리가 늦어져서.”

그리고 레카르도의 눈치를 보고 그것을 내 쪽에 놓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공녀님.”

삼각형이다.

이건 김? 아니, 김과 비슷한 해조류이다.

어쩐지 삼각김밥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새로 나온 메뉴를 관찰하던 나는, 나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는 레카르도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먹어라…… 많이.”

나는 흠칫했다.

뭐…… 뭐지. 저기에 뭐라도 들었나?

레카르도는 자신의 식사를 멈추고 나를 보고 있었다.

부담감에 짓눌린 채 나는 그것을 내 접시에 옮겨 담았다.

가까이 보니까 더 삼각김밥 같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이 세계의 요리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니까, 삼각김밥과 비슷한 음식이 있는 거겠지.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그것을 나이프로 썰어 포크로 찍어 먹었다.

짭쪼롬하면서 고소하다, 안에는 소스가 들어 있었다.

역시 내가 아는 삼각김밥과는 다른 맛이다.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감미롭고 향긋하며, 고급 요리라는 느낌에 어울린다.

호텔에서 떡볶이와 튀김을 팔면 이런 느낌일까.

“…….”

그런데 언제까지 쳐다보실 생각인가요.

뭔가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은 레카르도에게 나는 입을 열었다.

“……맛있어요.”

이거, 정답 맞겠지?

한참 동안 멈추어 내가 먹는 것만을 보고 있던 레카르도가 식기를 들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렇게 많이 가져가더니, 역시 좋아하는 게 맞는군.”

응? 많이 안 가져갔는데.

세 개 중 하나를 가져가서 그 귀퉁이를 조금 맛보았을 뿐이다.

레카르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매일 내오게 하겠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레카르도의 말,

나는 앗, 하고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아버지. 물론 이 새 메뉴도 맛있지만…….”

그와의 식사는 정말이지 진수성찬이었다.

파인다이닝이라는 곳엔 가 본 적 없지만 엄청 유명한 호텔의 파인다이닝에 가면 나올 법한 특별하고 맛있는 요리들!

“저는 이 음식들이 더 맛있어요. 이걸 먹다 보면…….”

입에 넣자마자 고기는 사르르 녹아 버린다.

나는 싱긋 웃으며 레카르도에게 말했다.

“……정말 행복해질 정도로요.”

일순간 레카르도의 서늘한 녹색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실수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가 다시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으니까.

한참 동안이나 말이다.

“…….”

먹다 체하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시간이 꽤 지나서야 레카르도는 다시 식기를 들었다.

착각이었을까. 잠시 그의 입술 끝에 흐뭇한 미소가 스쳐 간 듯한 모습은.

나도 레카르도를 따라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어쩐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렇게 한번 식사하는 것도 부담인데, 앞으로도 이렇게 매일 저녁마다 단둘이 식사해야 하는 거야?

마음은 불편하지만 산해진미를 위로로 삼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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