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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99화 (99/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99화

“아가씨께서는 흰색과 하늘색이 섞인 이런 타입의 드레스가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뭘 입어도 아름다우시지만, 이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보이신다고요.”

“이거라니, 말조심하거라.”

하녀 하나의 말에 마야가 주의를 주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하녀들은 내 뒤에서 요란을 떨어 대고 있고, 이제는 능숙한 시녀가 된 마야는 내 치장을 돕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우실까요. 아기셨을 때부터 예쁘신 건 알았지만, 이제는 제국 최고의 미모라고 해도 손색이 없어요.”

거울 속 나는 등의 절반을 덮는 길이의 아름다운 은발과 에메랄드를 그대로 박아 놓은 것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키는 또래보다 조금 큰 정도.

흰 편인 피부였지만 볼과 입술에는 붉은 혈색이 돌아 그렇게 병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영 살이 붙지 않는 체질이라 주위의 걱정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열여섯 살의 나는 만족스럽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름 : 샤샤 윈체스터(LV.16)]

[직업 : 중급 구원자]

[특성 : 메키우스의 열쇠]

[능력치: 체력 69 / 근력 77 / 이능 109 / 지능 131/ 생명력 52]

레벨은 나이에 정비례해서 16까지 올라왔다.

능력치는 레벨에 따른 보상과 작은 퀘스트들을 수행하며 올릴 수 있었고, 스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비도 꽤 많이 벌었고 상점에서 좋은 아이템들도 구입했다.

“다들 아가씨께 눈을 떼지 못하시면 어쩌죠?”

“그런 말 마, 마야.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으니까.”

참, 무도회가 한참 뒤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이렇게 야단법석인 이유는 오늘이 진의 후계자 서임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조금 속상해요. 아가씨만을 위한 날이어야 하는데.”

“말했잖아. 허튼 데 힘 빼고 싶지 않다고.”

어린아이일 때 어둠의 기일 정도에 참여해 본 경험을 제외하고는, 나는 그럴싸한 사교 행사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어둠의 기일도 사교 행사보다는 가문 내부의 행사에 가까우니까.

나는 몇 달 전 레카르도와의 식사에서 사교계 데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데뷔탕트 무도회는 가을쯤으로 잡겠다. 이제 사교계 데뷔를 해야 할 나이이니.

― 아버지! 죄송하지만 그냥 오빠들의 서임식과 함께하고 싶어요.

레카르도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간곡히 설득했다.

물론 고지식한 레카르도의 마음을 돌릴 설득법은 단 하나.

―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면 머리도 어지럽고 속도 울렁대요. 건강이 악화될 우려가 있을 것 같아요.

내 건강 문제이다. 내 생명력은 정상 수치이며 여러 퀘스트를 통해 체력과 근력까지 쑥쑥 올랐지만 아직도 윈체스터에서 나는 약골의 이미지이니까.

― ……어쩔 수 없군.

그렇게 다행스럽게도 오늘 나는 오빠들에게 묻어가기로 했다.

“허튼 데라니요. 데뷔 무도회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될지 누가 알아요?”

“연애 소설 좀 그만 봐, 마야.”

내게 사교계 데뷔는 어디까지나 빨리 해치워야 하는 숙제 같은 것이니, 단 하루를 위해 귀족들을 초대하고 힘을 쏟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페르세토스의 정체도 알지 못했고 내 죽음의 운명도 완전히 비켜간 것은 아니니까.

“헤일로와 아카다에서도 올 거예요. 로젠토의 귀족들도 대부분 참석하겠다고 답신을 보냈어요.”

오늘은 무려 4대 가문 중 하나인 윈체스터 쌍둥이 형제의 서임식이니, 참석할 만한 사람은 거의 참석할 것이다.

“그리고 테일러스 가문에서는…….”

테일러스…….

“샤샤.”

일순간 마야의 말을 끊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

180센티미터는 족히 넘는 키, 넓은 어깨와 하늘색 머리카락, 하녀들의 감탄을 몰고 다니는 탁월한 미형의 얼굴과 짙은 녹색 눈동자.

내 방문 앞에 선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안녕하세요.”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진 윈체스터.

언젠가 보았던 베드 엔딩에서의 모습 그대로이다.

올해로 스물둘.

“저 어때요? 어울리나요?”

방 안에 흐르는 정적이 부담스러웠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한참 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던 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예뻐.”

진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었기에 나는 움찔했다.

원래도 말이 많지 않은 편이던 진은 사춘기가 지나고 더욱 과묵해졌다.

중2병이 왔나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 상태 그대로였다.

“오늘 에스코트는 누구에게 부탁했지?”

진의 목소리에 나는 대답했다.

“비밀이에요.”

그냥 넘어가기를 바랐는데 진이 그 자세 그대로 한참 동안 나를 보자, 나는 결국 작은 한숨을 쉬었다.

“오셀로 오빠는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참, 1년 전 진과 오셀로가 크게 싸웠다.

오셀로가 진의 방에 함부로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오셀로는 진의 방에서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미친놈’이라며 진을 거의 죽이려 했었다.

진이 압도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셀로와 진의 실력은 꽤 비슷했다.

결국 진이 오셀로를 제압하기는 했지만, 오셀로의 검술이 뛰어나긴 한 모양이다.

― 진에게 가까이 가지 마. 나도 미친놈이지만 저 자식은…….

싸운 이유에 대해 물었지만 오셀로는 내게 진을 경계하라는 말만 할 뿐이고, 진은 묵묵부답.

“……오셀로가 아니면 더 걱정할 수밖에.”

진의 말에 나는 움찔했다.

오셀로에 대해 감정이 안 좋은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가.

하지만 지금 말해 주면 재미없지.

“조금 있다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진에게 다가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윈체스터의 두 번째 주인이 되신 거 축하드려요, 오라버니.”

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 * *

샤샤의 식물원 겸 카실리온의 연구실로 쓰이고 있는 총회 건물의 맞은편에, 레카르도는 큰 홀을 새로 지었다.

오늘의 서임식은 그곳에서 개최되었다.

초대를 받은 가문들의 귀족들은 하나같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아릅답게 꾸몄다.

제국의 4대 가문이 모두 초대되는 이 정도 규모의 행사는 거의 없었다.

4대 가문의 방계 귀족들과, 4대 가문에서 파생된 가문의 귀족들, 변방과 로젠토의 귀족들까지.

모두들 오늘의 주인공을 볼 생각에 들떠 있었다.

특히 자기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소녀들은 그들의 등장을 더욱 고대했다.

잠시 뒤, 서임식의 주인공이 등장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윈체스터 공작가의 문장이 수놓인 검은 정복을 입은 진 윈체스터, 그리고 진의 곁에는 회색 정복을 입은 오셀로 윈체스터가 있었다.

두 사람은 주관자인 가문의 원로를 향해 걸었다. 원래는 대가주인 헥토르가 있어야 할 자리이지만 오늘은 원로가 헥토르를 대리했다.

진 윈체스터는 정식 후계자로서, 오셀로는 가문의 병력을 통솔하는 책임자로 임명받게 된다.

둘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잘생긴 얼굴과 키는 비슷했지만, 특유의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진이 겨울 한파 같은 느낌을 가졌다면, 오셀로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불꽃 같았다.

딱딱한 표정을 한 진과 싸늘한 눈빛의 오셀로는 주관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흑룡의 어둠에서 태어난 검은 불씨가 고귀한 흑염으로 성장하여 타오르는 오늘…….”

노인은 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어 성인식의 축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와중, 몇몇 이들의 눈이 다시 입구 쪽으로 쏠렸다.

“헉.”

“저건…….”

사람들은 소곤대며 하나둘 시선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떡해, 지각했나 봐요.”

남자의 팔에 팔짱을 낀 샤샤 윈체스터는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샤샤 윈체스터와 함께 등장한 남자는 어둠의 공작, 암왕이라 불리우는 레카르도 윈체스터였다.

동굴 속 마물들마저도 경이로운 흑염의 힘에 두려워한다는, 최강의 이능을 가진 남자.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최상층에 선 남자이다.

“……!”

레카르도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레카르도의 곁에서 짙은 흑염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황급히 형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영 마땅찮은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괜찮다. 가주도 함께 늦었으니.”

아버지인 레카르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 앞으로 간 샤샤는, 단상 앞에 다다르자 미소 지었다.

진과 오셀로가 나란히, 서임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많이 컸구나. 처음 만날 때만 해도 모두 코흘리개였는데.’

이런 샤샤 윈체스터의 흐뭇함은 누구도 모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진과 오셀로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샤샤 윈체스터를 힐끔거렸다.

그중에는 헤일로의 가주 아드리안 헤일로도 있었으며, 미리 자리 잡은 2층의 상석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엘리시온 아카다도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자랐군.’

한껏 차려입고 온 귀족가의 소녀들 중에서도 샤샤 윈체스터는 유독 빛이 났다.

윈체스터 가문에서 저렇게 빛날 수 있는 여자가 있긴 할까.

윈체스터에서 존중받는 방식은 오로지 ‘힘’ 하나뿐이었다.

빛의 이면, 어둠이 도사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윈체스터의 식솔들은 하나같이 성향이 호전적이며 잔혹했고 감정은 메말라 있었다.

하지만 샤샤 윈체스터는 홀로 때 한번 묻지 않은 것처럼 고고하고 밝다.

이유는 믿기지 않게도 윈체스터가의 세 남자들 때문이다.

힘 앞에서는 ‘가족’이라는 개념도 없어 보이던 윈체스터들이 샤샤 앞에서는 결집한다. 마치 구심점이라도 만난 것처럼.

‘누군가 저 애를 다치게 한다면.’

엘리시온은 생각했다.

‘……필시 전쟁이 일어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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