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00화
주관자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흑염의 기운이 진과 오셀로를 감싸다가 사라졌다.
잠시 후 주관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진 윈체스터와 오셀로 윈체스터는 오늘부로…….”
두 사람이 고개를 드는 모습이 보였다.
“……가문의 기둥이 되어 어둠을 지탱할 것이다.”
여전히 가주는 레카르도 윈체스터이지만, 이제 오빠들은 더 많은 공식적인 권한을 가지게 된다.
그만큼 책임도 막중해지는 것이고 말이다.
노인은 붉은 천에 감싸진 회중시계를 무릎을 꿇고 있는 진에게 하사했다.
“진 윈체스터, 윈체스터 공작가의 정당한 후계자이자 흑염의 주인으로서 가문의 발전과 제국의 안정에 이바지할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보를 수여한다.”
옆에서 레카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보의 종류는 원래 아피니제가 정하는 일이었으나, 아피니제가 사라졌으니 대가주가 직접 지시했다고 하더군.”
나는 흠칫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군요…….”
레카르도는 시선을 정면으로 향한 채 내게 가보에 대해 알려 주었다.
“아리아크네의 나선시계, 소유자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힘이 있지.”
“좋은 물건 같네요.”
이내 주관자의 시선이 오셀로에게 향했다.
“오셀로 윈체스터, 진 윈체스터의 보완자이자 윈체스터 공작가의 오른팔로서 윈체스터의 이름을 빛낼 자가 될 것이다.”
그가 오셀로에게 수여한 것은 청동 단검이었다.
나는 레카르도를 보았고 그의 눈썹은 진이 회중시계를 받았을 때보다 더 굳어 있었다.
“……저건…….”
오셀로에게 수여하기에 과한 물건일까.
레카르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헥토르의 가보 선정에 불만이 있는 모양이다.
“적절치 않군.”
이내 가보를 받은 진과 오셀로의 몸에서 검은 흑염이 거세게 일어났다.
축사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
잠시 후 진과 오셀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큰 키와 유달리 잘난 외모의 그들은 이내 몸을 돌려서 섰다.
그들의 손에는 각자 수여받은 가보가 들려 있었다.
“진 윈체스터는 가문의 정식 후계자가, 오셀로 윈체스터는 군사 책임자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주관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한 채 그들을 보고 있던 좌중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발견한 오셀로의 입술 끝이 옅게 올라갔다.
나도 그를 향해 웃음을 지어 주었다.
* * *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인물 열람]
[1. 레카르도 윈체스터
칭호: 흑염의 지배자
인과율: 44%]
[2. 진 윈체스터
칭호: 암흑나선의 주인
인과율: 47%]
[3. 오셀로 윈체스터
칭호: 그림자의 왕
인과율: 49%]
나는 인물 열람을 통해 진과 오셀로의 칭호가 바뀐 것을 확인했다.
어쩌면 가보 소유와 칭호가 관계가 있는 것일까.
단순히 성인식 때문인지, 가보 때문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전하. 그리고…….”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내 앞에 다가왔다.
짙은 남색 머리칼을 꽁지머리로 묶은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름다운 샤샤 윈체스터 공녀님.”
“오랜만이군, 아드리안.”
레카르도의 말에 나는 눈앞의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네사 헤일로가 죽고, 뒤를 이어 헤일로가의 가주가 된 아드리안 헤일로이다.
이능은 약하나 책략에 밝아 바네사 헤일로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헤일로를 부흥시키고 있다고 들었다.
가주의 자질은 이능의 크기라는 공식을 깨고 있는 존재.
“초대장을 두 개나 받을지는 몰랐습니다. 서임식과 같은 장소에서 데뷔탕트 무도회라니, 조금 아쉽지 않으십니까?”
아드리안의 검은 눈동자는 내 속을 살피고 있었다.
은근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가 사람을 파악하는 방식이라면,
“제 데뷔만으로는 가주님들께서 오실 것 같지는 않아서요. 되도록 많은 분들을 만나고 싶었답니다.”
헷갈리게 만들어 주는 것이 능사이지.
묻어가고 싶어서 같은 시간으로 잡았다는 진실을 숨기고, 나는 싱긋 미소 지었다.
“뭐…… 그렇군요. 확실히, 두 공자님의 서임식에는 모두가 올 테니까요. 하지만 데뷔만을 위해 초대장을 보냈더라도.”
아드리안은 찡긋하며 말을 이었다.
“헤일로의 가주, 이 아드리안은 기꺼이 참석했을 겁니다.”
내 옆의 레카르도에게 잘 보이기 위한 아부의 종류일 테지만, 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괜찮으시다면 첫 춤은 저와…….”
“첫 춤은 에스코트 상대와 추는 것이 예의이지.”
아드리안의 춤 신청을 레카르도가 막았다.
“아. 하하, 그렇지요.”
나는 레카르도를 올려다보았다.
40대가 되었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외모의 레카르도는, 어디에서나 젊은 여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저와 춤을 춰 주시겠어요, 아버지?”
내가 레카르도에게 춤 신청을 하자, 레카르도는 내 손을 잡았다.
“영광이군.”
농담 같은 미소가 그의 딱딱한 입술에 스쳐 갔다.
무도회장에는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원래 춤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한 달 전부터 마야가 춤 선생을 데려와 내게 특훈을 시켰었다.
넘어지고 밟고 구르며 배운 비장의 춤 실력을 선보일 때다.
“스텝을 모르시겠으면 제게 맡겨 주세요.”
나는 레카르도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16년을 살아오는 동안 레카르도가 춤을 추는 것은 본 적 없었다. 들은 적도 없었고.
어둠의 기일 연회에서도 그는 칙칙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거나, 사냥에서 돌아와 피 냄새를 풍기고는 했다.
그러니 분명 춤에 능숙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해한다. 아무리 완벽한 레카르도라도 하나 정도는 모르는 게 있어야 인간적이지 않겠는가.
“저, 열심히 배웠거든요.”
레카르도가 입술 끝을 피식 올리는 것이 보였다.
샹들리에 아래, 레카르도의 얼굴을 조금 올려다보며 나는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하나둘, 둘의 반, 셋의 반.
“…….”
그리고 레카르도는…….
“……!”
춤에 너무도 능숙했다.
유연하거나 미끄러지듯 추는 것이 아니라, 투박한 걸음 속에 완벽한 동선이 있었다.
해당 분야의 초고수가 초보를 위해 대충 발을 맞추어 주는데, 그 동작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느낌이랄까.
“춤추실 수 있었어요?”
오히려 레카르도가 나를 리드하는 모양이 되어 버렸다.
빙그르, 돈 나는 발을 맞추며 물었다.
“아니.”
레카르도의 뻔뻔한 거짓말에 나는 볼을 부풀렸다.
“하지만 이렇게 잘 추고 계시잖아요.”
“아까 보았을 뿐이다. 헤일로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을 때.”
레카르도의 말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헤일로가 내게 말을 걸고 앞에서 샤바샤바한 시간은 불과 2~3분 남짓.
그런데 그사이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도 안 돼……!
“춤신이세요?”
“뭐?”
“아…… 아니에요.”
나는 한 달을 배워도 발을 밟을까 이렇게 긴장해서 주춤주춤 추는데, 세상은 불공평하다.
레카르도의 깔끔하고 절도 있는 동작은 무도회에 능숙한 기사의 춤이었다.
춤추던 사람들도 하나둘 멈추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점점 박자가 빨라지고, 내 스텝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레카르도만이 눈썹 한번 찡그리지 않고 여유 있는 표정일 뿐.
레카르도는 잡은 내 손을 놓았고, 빙그르 돈 나는 다시 관성을 따라 그의 손에 감겼다.
이내 허리가 젖혀지고 눈앞에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샹들리에가 보였다.
“…….”
레카르도가 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제법이군.”
분명 칭찬인데도 이렇게 억울한 이유는 뭘까.
나는 대답했다.
“아버지도요.”
그의 입술이 다시 피식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다음 춤 신청은 내가 해도 될까?”
그리고 그때, 오셀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와의 춤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곧바로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거야, 오셀로.”
진이었다.
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오셀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또 그 소름 끼치는 인형 컬렉션에 추가하려는 거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진은 내 손등에 입술을 맞추는 시늉을 했다.
그는 발끈하는 오셀로를 두고 내게 춤 신청을 했다.
“새파란 애송이보다는, 든든한 어른이 춤 상대가 되어 주는 게 좋지 않겠어?”
나는 진과 오셀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볼이 발그레한 영애들을 보았다.
하아, 본인들 서임식도 겸한 만큼, 각자 마음에 드는 여자와 춤을 춰 주면 내가 덜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죄송한데, 저는 조금 피곤해요. 쉬어야겠어요.”
내 말에 진과 오셀로는 동시에 눈썹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오늘은 네 데뷔탕트 무도회잖아!”
“오늘은 네 데뷔탕트 무도회야.”
그리고 자신들이 같은 말을 했다는 것에 흠칫 놀라, 서로를 힐끗 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둘 다 오늘이 내 첫 사교계 데뷔라는 사실에 꽤 신경 쓰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작은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커서는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주의가 돌아간다는 표현이 맞겠지.
이곳의 문을 지나 들어오고 있는 누군가에게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를 발견하는 순간,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그리고 그도 선명한 푸른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
탈 없이 흐르던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았다.
마치 마법처럼.
‘……에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