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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101화 (101/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01화

에반 테일러스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그가 열세 살 때였다.

내 기억 속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얼굴로 남아 있던 그 애는 이제 남자가 되어 있었다.

키는 두 오빠들만큼 컸고, 나이는…… 이제 스물하나인가. 완연한 청년의 나이이다.

테일러스의 흰 제복을 입은 그가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에반이 윈체스터 공작가에 머물던 동안 생겼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 같이 있을게, 맹세해.

폭주하는 그의 이능을 가라앉히며 내가 외쳤던 말.

다크 이글을 처치하러 가는 에반의 뒷모습.

그리고 떠나기 전 나누었던 대화.

― 동료로 생각하지 않아.

그 말이 마음속에 불편한 돌처럼 박혀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겠다는 말이 뒤따랐지만, 글쎄. 좋게 들리지는 않았었지.

그리고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리소니아가 툭 풀렸었다.

리소니아의 유효기간인 3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풀리는 이유는 두 가지.

반지를 나눠 낀 사람이 죽거나, 혹은 아카다의 기술자들을 사서 반지를 풀었거나.

죽었다면 세상이 회귀했을 텐데 그대로인 것을 보면 아마 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뭔가 연락이 오려나 기다렸지만 역시 무소식이었다.

그리고 무려 8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지금…… 에반이 눈앞에 나타났다.

“…….”

에반 테일러스가 우리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에반이 눈썹을 꿈틀 움직이는 순간, 오셀로가 먼저 입을 떼어 레카르도에게 말했다.

“가주가 아니라 후계자가 오다니. 역시 테일러스 가문은 윈체스터와 친목을 다질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비꼬는 듯한 오셀로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댔다.

후계자의 서임식은 가문 내에서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네 가문은 관례적으로, 후계자의 서임식에 가주가 직접 참석했다.

테일러스와 윈체스터가 앙숙이라 하더라도 늘 그러했다는 뜻이다.

레카르도는 차가운 시선으로 에반 테일러스를 보았다.

“…….”

에반 테일러스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도 변화 없는 표정으로 레카르도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가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였다.

“장례 절차를 마무리하느라 의도치 않게 늦었습니다. 무례에 사과의 뜻을 전합니다, 레카르도 공작.”

그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레카르도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테일러스가의 비보는 듣지 못했는데?”

에반이 이어 대답했다.

“이틀 전, 가주께서 서거하셨습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가져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

“테일러스의 가주라면…… 체노아 테일러스 공작이?”

“서거하셨다고?!”

가라앉았던 좌중의 목소리가 놀라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놀란 마음을 다스렸다.

‘푸른 매의 비밀’에서 본 에반의 과거를 떠올려 보면, 늘 스물셋 이전에 가주가 되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말이다.

아마도 지금 에반의 나이는 스물하나…… 시기가 얼추 맞다.

“체노아 테일러스가 죽었다는 말을 하는 건가.”

레카르도는 서늘한 표정으로 에반에게 물었다.

“……오랫동안 병을 앓고 계셨습니다.”

에반은 낮은 목소리로 레카르도의 질문에 답했다.

그의 청안은 무거운 빛을 담고 있었다.

“그…… 그런데 왜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은 겁니까. 이틀 전이라면서요.”

듣고 있던 아드리안 헤일로가 나서서 물었다.

한발 물러서 있던 엘리시온도 눈썹이 굳은 채 물었다.

“아카다에서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가주의 장례라면 알려질 법도 한데요.”

엘리시온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몰래 장례를 치르라는 유지라도 남겼단 말입니까?”

가주 사망의 자세한 경황은 베루스에서 밝힌다고 치더라도, 갑작스러운 소식은 모두에게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아니요.”

에반은 서늘한 눈빛으로 말을 끊었다.

그의 시선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주직을 이어받은, 저 에반 테일러스의 의지였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귀를 타고 흘러들어 가슴 깊이 박히는 것 같았다.

‘테일러스의 가주.’

진정했던 심장이 쿵, 쿵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 * *

나는 몸이 좋지 않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아가씨.”

‘가주가…… 되었구나.’

7년 만에 본 그와의 재회였다.

페르세토스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나도 방안을 찾아보고 있었지만, 에반은 소식도 없었고 접점도 없었기에 일부러 생각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알았지만…… 갑작스럽다.

“저…… 아가씨께서도 놀라신 건 알겠지만…… 기다리고 있는 영애들에게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마야의 속닥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 전하와 춤추시는 모습, 정말 눈을 뗄 수 없게 아름다우셨어요. 환호성이 나올 정도였다니까요.”

나는 거울 속 나를 바라보았다.

“다들 아가씨를 궁금해하실 거예요.”

아름다운 드레스에 살랑이는 부드러운 은발, 에메랄드빛의 눈동자.

내가 에반을 오랜만에 봐서 놀랐듯, 그도 조금 놀랐겠지.

“그래.”

어쨌든 지금은 그의 생각을 접고, 내 또래의 손님들을 맞을 차례이다.

서임식은 끝나도 내 데뷔탕트 무도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지금 내 일에 집중하자.

드레스와 차림새를 다시 정비하고 나가자 귀족 영애들 몇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다행히도 사람들이 워낙 붐벼, 에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제 이름은 다이애나, 바하인 백작가의 딸이에요.”

“너무 아름다우세요. 저는 록시아, 말른 남작가의 딸입니다.”

“카슈리나 윈체스터, 방계입니다. 저번 어둠의 기일 때 인사드렸는데 기억하시나요?”

열여섯에서 스물 사이로 보이는, 내 또래 영애들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게 다가온 이들은 윈체스터 영향권 내에 있는 가문들의 딸로 보였다.

테일러스나 헤일로 영향권 가문의 영애들도 있었지만 내게 적극적인 영애들에 밀려 차마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었고.

나는 나름 연습한 겉치레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가워요, 샤샤 윈체스터예요.”

내가 미소를 짓자 그녀들은 더욱 눈을 반짝였다.

“영광이에요. 윈체스터 직계 공녀님의 데뷔탕트 무도회에 초대되다니…….”

“소문으로 들은 것보다 훨씬 우아하세요.”

에반과 오빠들이 다 함께 모이는 것도 8년 만이다.

시간은 빠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문득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앞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 모여 있는 영애들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환한 금발이 인상적이라서 기억하고 있었다.

“셀리아 헤일로예요. 헤일로 가주님의 조카랍니다.”

나보다 한 살 많던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요.”

나의 데뷔탕트 무도회라고 해도, 모든 영애들이 나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닐 테다.

제국에는 가문에 따라 여자들 사이에서도 네 분파가 있고, 내게 확실히 호의적인 것은 윈체스터의 영향력하의 가문들뿐일 테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데뷔탕트 무도회는 결혼 시장에의 본격적인 진입을 의미했다.

나처럼 가문의 배경이 좋은 데다가, 사교 활동에 취미도 없다면 견제받을 수밖에 없다.

“세상에.”

마야가 그랬었지, 셀리아 헤일로를 조심하라고.

“이 브로치의 보석은…… 페리도트 아닌가요. 굉장히 귀한 보석인데, 역시 윈체스터가의 공녀님은 데뷔탕트 무도회 드레스부터 남달라 보이세요.”

대충 들어 보면 칭찬으로 들린다.

“제국에 소문이 자자하시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네요. 윈체스터 공자님들이 아니었다면 영식들의 춤 신청이 줄을 이었을 텐데요.”

그러나 그녀의 어조에서는 차분하면서도 오묘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저희가 초라해 보일 정도라니까요.”

나를 올려 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과도해서 반발심을 부추겼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교계에 새로 진입한 나를 그녀들과 분리시키는 듯했다.

무엇보다 내 가문은 악명높은 ‘윈체스터 공작가’이다.

고귀한 돈이 아닌 암흑가의 돈이 윈체스터로 흘러드는 일은 모두가 아는 일.

적의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마워요, 영애.”

하지만 그건 내가 호락호락할 때의 이야기.

십육 년간 그 무서운 윈체스터 가문에서 자라며 나는 정신적으로 꽤 단련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영애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어요.”

사람을 휘어잡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역시 재물이지.

견제의 심리가 섞인 눈빛들이 잦아들고, 셀리아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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