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03화
똑똑―
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흐음…… 왜……?”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고, 다시 ‘똑똑’ 소리가 들렸다.
“마야, 왜?”
다시 물었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는 없었다.
‘똑똑’ 소리만 재차 들려올 뿐.
결국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급한 일인데 자는 사람을 깨워! 대답도 안 하고!’
그리고 문 쪽으로 가려는데 다시 소리가 들렸다.
“…….”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문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황급히 창문 쪽을 보았다.
“……!”
그리고 스스로 내 입을 막았다.
창밖에 에반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문밖에서 내 기척을 느낀 하녀가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외쳤다.
“아니야, 악몽을 꿔서…… 이제 괜찮아.”
그리고 에반을 바라보았다.
밤바람에 검은 머리칼이 살랑이고 있었고, 달을 등진 푸른 눈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에반은 허락으로 받아들인 듯, 창문을 열고 내 방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어쩌지, 비명이라도 질러 줄까?
그랬다가는 또 가문 간 문제로 일이 커질 테니 귀찮다.
에반 이 녀석은 이제 테일러스의 가주이니까.
나는 팔짱을 낀 채 다른 곳을 보고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이건…… 예의에 어긋나는 출입 방식인데요.”
내가 존대를 쓰자 에반은 눈썹을 꿈틀했다.
“어색하군, 그런 말투는.”
8년 전과는 딴판으로 달라진 낮은 목소리.
“이제 테일러스의 가주이신데 반말을 할 수는 없죠.”
“…….”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키가 정말 크기는 하다.
달빛만이 들어오는 잔잔한 어둠 속 그의 벽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난 건가. 저번에도 모른 척하더니.”
에반의 입술이 달싹였다.
나는 에반의 스퀘어 초대를 무시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그럴 리가요.”
나는 에반을 보고 말했다.
“옛 손님을 만나서 어색할 뿐이에요.”
“…….”
“저희가 서운해하거나 화낼 사이는 아니잖아요.”
내 말에 에반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
에반이 그렇게 떠난 뒤, 나는 굳이 에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페르세토스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바이나, 그가 계속 애매모호한 비협조 모드로 들어간다면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나를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그동안 그저 ‘메키우스의 열쇠’라는 운명을 가진 내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간간이 퀘스트를 하며 능력치를 높이고, 신수를 잘 보호하며 엘릭서 제조에 신경을 기울이고…….
물론 감감무소식인 에반 테일러스에 대한 약간의 서운함은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있었다.
“재회의 인사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은데요. 이만 나가주시겠어요? 쉬어야 해서.”
나는 다소 피로한 표정으로 에반에게 말했다.
에반은 한참 동안 나를 응시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의 표면에 말하지 못한 어떤 막막함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에반은 물러서는 대신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꽤 변했군.”
바깥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부탁드려요, 이만 나가 주…….”
그러나 내 말이 끊기기 전 에반이 내 팔목을 잡았다.
놀라 에반의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여긴…….”
에반의 스퀘어였다.
“……하…….”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정갈한 책상과 책장…… 책과 장식장…… 그리고.
[특별 구역 소유자의 의지로 ‘스퀘어 자유 입장권’을 획득하였습니다.]
갑작스레 뜬 메시지.
나는 차갑고 차분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짓이죠?”
물론 속으로는 화를 내는 중이었다.
“이 순간을 생각했어.”
그러나 귀에 스미는 그의 저음과, 오롯이 나를 담고 있는 벽안.
나는 흠칫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의 모든 시간 동안.”
서늘하고 형형한 눈빛에 오묘한 슬픔이 서려 있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 * *
“샤샤.”
“왜…….”
“샤샤…….”
“아, 왜!”
오후의 티타임. 내가 신경질을 내자 카실리온은 황홀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방금 표정 좋았어. ……이건 비싸게 팔 거야.”
카실리온이 들고 있는 네모난 것은 카메라 기능을 하는 영상석이었다.
그는 요즘 티타임 때마다 그것을 들이밀어 나를 찍고 있었다.
‘내 얼굴, 좀 깡패이긴 해.’
아무 각도로 찍어도 화보처럼 나오는 모습은 조금 흡족하기도 하다.
“주 고객은 따로 있었지만 이제 슬슬 경매를 붙여도 될 거 같아.”
“내 사진을 누가 산다고.”
카실리온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샤샤는 주위에 너무 무심하다니까.”
카실리온 아카다. 아카다의 가주 엘리시온의 친척인 그는 어릴 때 우리 가문으로 위탁 교육을 와서 열여섯이 된 지금까지 함께 지냈다.
아름다운 금발과 자주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소년이라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늘 드레스를 입고 다니니, 가끔은 모르는 사내들에게 ‘레이디’라고 불리며 고백 편지를 받기도 했다.
“우량 고객 하나에 샤샤 아가씨 모습이라면 주급을 털어서라도 가지고 싶다는 하녀들이 수도 없는데…….”
그가 남자임을 뒤늦게 알게 된 오셀로와는 영 껄끄러운 사이지만, 진은 카실리온의 후원자 역할을 하며 그를 꽤 대우해 주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데뷔탕트 무도회 이후로 영애들 사이에서 샤샤의 인기가 얼마나 치솟았는지 모르지?”
참, 카실리온의 엘릭서 연구 현황은 80퍼센트 정도로 꽤 진척되었다.
100퍼센트가 될 때까지 내보낼 생각은 없다.
본인도 나갈 생각이 없는 것 같고.
“뭐 주된 목적은 따로 있지. 이 영상석이 보급되며 이제는 상점에서 홍보용 모델을 쓰게 되었어. 진 공자님이 내게 위탁한 약국에 샤샤의 얼굴이 나붙는다면 손님이 더 많아질 거야.”
“그러니까, 내 사진을 무단으로 쓴다고?”
“허락받고 찍었는데 무단은 아니지.”
“찍는 건 허락했지만, 공짜로 상업적 이용을 허락하지는 않았다고!”
“돈이 필요해? 샤샤는 부자잖아.”
카실리온의 말에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기는 했다.
“그래도, 부자라고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되지. 모든 일에는 정당한 대가가 필요하다고.”
레카르도가 고작 열 살인 내게 윌너스 광산을 넘겼던 일 때문이다.
데뷔탕트 무도회 때 영애들에게 보석을 뿌릴 수 있었던 이유도 그래서이고.
“그러니까 내 사진을 상점 홍보용으로 쓰고 싶으면 모델료를 내는 게 맞아. 물론 내가 모델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럼…… 엘릭서 결과물에 대한 영구 귀속 어때? 모델 조건 말이야.”
카실리온의 말에 나는 그를 보았다.
“어…… 어차피 그건 내 거잖아.”
“재료와 장소 제공이 샤샤는 맞지만, 결과물에 대한 계약서는 쓰지 않았잖아?”
나는 흠칫 카실리온을 보았다.
계약서라니.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쓰자.”
“그래, 샤샤도 모델 계약서 쓰고?”
현대에서 온 것을 잊고 지냈나 보다.
그 중요한 것을 아직 쓰지 않았다니.
뭐 조금 껄끄럽기는 하지만, 한동안 내 얼굴이 카실리온의 약국에 나붙는 것만 견디면 될 것이다.
“잠깐, 이 조항은 뭐야.”
‘샤샤 윈체스터는 ‘순간 영상석’에 대해 카실리온에게 월 10회가량의 촬영에 응한다.’
‘해당 순간 영상의 모든 이용권은 카실리온 아카다에게 있다.’
나는 독소조항에 선을 그으며 카실리온을 노려보았다.
“이거 꼼수인 거 알지?”
“흐음, 판로를 넓힐 기회라서 꼭 잡고 싶었는데.”
카실리온은 내가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본 게 아쉽다는 듯 작은 한숨을 쉬었다.
“새로운 테일러스 가주에게 팔면 아주 잘 팔릴 것 같았단 말이야.”
순간 나는 멈칫했다.
“에반 테일러스?”
“응.”
나는 어제 보았던 에반의 모습을 떠올렸다.
‘스퀘어 자유 출입증’이라…… 시스템에 떠서 반납할 수도 없고 난감하다.
아무튼 이제 와서 불쑥 찾아오고, 재수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에반과 연락하며 지냈어?”
“그건 아니지만…….”
카실리온은 눈을 들어 멀리 보이는 눈 쌓인 산맥을 응시했다.
입술에 의미 모를 미소가 맺혔다.
“늘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어. 멀리 어딘가에서.”
가치 없는 소리라 판단한 나는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테일러스에서 어련히 잘 지냈겠지.”
* * *
윈체스터 저택의 정원.
에반 테일러스는 딱딱한 돌벽에 등을 대고 서 있었다.
떠들고 있는 샤샤와 카실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반의 짙푸른 눈동자가 일렁였다.
― 뭘…… 생각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듣고 싶지 않아요. 전 이만 나가겠어요.
예상했지만, 차갑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
“…….”
어느 순간, 에반은 인기척에 몸을 벽에서 떼었다.
서늘한 흑염의 기운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레카르도 윈체스터…… 그를 본 에반은 멈추어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레카르도가 에반의 앞에 멈추어 섰다.
일전에도 거인 같은 남자였으며, 이 순간 역시 레카르도의 존재감은 그러하다.
아니, 오히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대가주에게서 너의 일을 들었다, 에반 테일러스.”
“…….”
“‘소녀의 재앙’을 제거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