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104화 (104/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04화

윈체스터 공작가의 응접실, 레카르도의 앞에 에반이 앉아 있었다.

에반을 응시하는 레카르도의 눈동자는 서늘했다.

“……그 과정에서 늙은 몸으로 너를 돕느라 꽤 힘들었다고 투덜대더군.”

레카르도를 보던 에반이 입술을 열었다.

“윈체스터 대가주의 도움이 없었다면 세상이 위험에 처했을 겁니다.”

에반은 레카르도에게 고개를 숙였다.

“윈체스터가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레카르도는 알고 있었다.

대가주를 움직인 것은 ‘세상’ 따위가 아닌 손녀 샤샤의 이름이라는 것을.

“그럼 슬슬 형식적인 잡설은 집어치우도록 하지.”

레카르도는 비스듬히 고개를 들고 물었다.

“7년간 정말 ‘그곳’에 다녀온 것인가.”

에반은 레카르도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과거에 자신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밝혔었고, 지금 이 순간도 어쭙잖은 거짓말을 한다면 그는 곧바로 알아챌 것이다.

스물여덟 번째의 삶임에도 여전히 어려운 인물이었다, 레카르도는.

“…….”

레카르도를 응시하던 에반이 입을 열었다.

“그 애를 지키기 위해 유일하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레카르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에반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이제는.”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회귀의 특전을 잃었습니다.”

* * *

끼익―

하인 둘은 낑낑대며 장식장 앞에 박스를 내려놓았다.

이내 그들이 그것에 손을 대려 하자, 진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 보아라.”

“제가 진열해 드리겠…….”

신입 하인은 공자의 호의를 사려 친절히 제안했으나, 이내 진에게서 흘러나오는 무시무시한 흑염의 기운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죄…… 죄송합니다, 공자님.”

그리고 황급히 진의 방에서 나왔다.

하인들이 나간 뒤 진은 장식장을 작동시켰다.

장식장이 돌아가며 더 큰 공간이 펼쳐졌다.

북쪽 건물에서 본관으로 이사하며 방을 넓혔기 때문이다.

장식장에는 은발에 녹안을 한 인형이 수도 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잠시 후 진이 손을 뻗자 박스가 부서지며 새 인형이 드러났다.

인형은 사랑스러운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등의 중간까지 닿는 아름다운 은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들고 있었는데 표정이 조금 우울해 보였다.

얼마 전 카실리온에게서 받은 사진을 본떠 제작한 것이다.

“…….”

진은 제 무릎까지의 길이 정도 되는 그 인형을, 허리를 숙여 들었다.

그리고 비어 있는 장식장 칸 하나에 진열했다.

“윈체스터의 후계자로서 예술적인 안목을 갖춰야 한다고 교육받았지만.”

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너처럼 가치 있는 예술품은 보지 못했어, 샤샤.”

언젠가 이 진열장을 다 채우게 되겠지.

한때 그 애를 직접 진열할 생각도 충분했으나, 지금은 밝게 빛나며 성장하는 모습이 더 흥미롭다는 것을 알았다.

― 축하드려요, 오라버니.

진의 뇌리에 밝게 미소 짓는 샤샤의 모습이 스쳐 갔다.

똑똑―

하지만 눈앞의 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문을 연 진은 샤샤의 맑은 눈빛에 손을 움찔했다.

샤샤는 바구니에 고소한 냄새가 나는 쿠키를 가득 담고 있었다.

“오라버니, 놀러 왔어요.”

* * *

“……에반이요?”

아삭, 쿠키를 베어 문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그가 7년 전에 소녀의 재앙을 처치했다더군.”

예언자 ‘다크 이글’이 예언한 네 가지 재앙이 있었다.

늑대의 재앙은 바히모스, 뱀의 재앙은 라비아탄, 독수리의 재앙은 다크 이글 자신…… 하지만 소녀의 재앙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여러 소문이 떠돌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 실체 없는 것일 뿐.

“설마요.”

다른 세 재앙과 마찬가지로 소녀의 재앙도 분명 나를 노렸을 것이다.

“…….”

하지만 진이 농담을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소녀의 재앙이 뭐였다고 말씀하셨나요?”

“그건 내게도 말씀하지 않으셨어.”

진의 말에 나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레카르도가 이를 비밀로 한다는 것은, 사실이 알려지면 윈체스터에 타격이 가는…… 그런 종류의 일이었나.

그리고 그것을 에반이 조용히 처치했다고?

그것도…… 무려 7년 전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진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정보를 내게 말할 리가 없었다.

‘결국 에반에게 물어봐야 하나…… 아니야, 이미 끝난 일이라면 왜.’

나는 생각을 돌렸다.

소녀의 재앙과, 그가 지금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중요한 일을 내게 알리지 않았다는 건 역시 나를 동료 비슷하게라도 생각하지 않았단 방증이겠지.

오히려 속만 쓰려졌다.

“그런데 오라버니.”

나는 시선을 전환하며 진에게 그의 방에 대해 물었다.

“오라버니의 방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바깥에서 창문 숫자를 보면 이보다 더 큰 것 같은데…… 들어와 보면 항상 생각보다 작다고 느끼니까요.”

그러고 보니 창문들 중 둘은 언제나 검은 커튼이 가리고 있었는데, 방에 들어와 보니 가려진 창문은 없었다.

“…….”

진은 대답 없이 입꼬리만 옅게 올릴 뿐이었다.

“혹시 비밀 공간이라도 있는 건가요?”

“…….”

그냥 농담을 한 것뿐인데, 진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대화가 뚝뚝 끊기는 분위기.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서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과자 맛있게 드세요.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

오늘따라 유독 인위적인 진의 미소를 뒤로하고 나는 그의 방을 나섰다.

‘뭐지……? 반응이…….’

이내 나는 진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혼잣말했다.

“카실리온에게나 가 볼까. 엘릭서 개발 속도를 높이라고 잔소리나 해야겠어.”

* * *

“제기랄, 탯줄만 잘 잡으면 장땡이라니까.”

네빌 윈체스터, 바몬트 윈체스터는 회랑을 걸으며 투덜거렸다.

이들은 윈체스터의 방계로, 수년 전까지 윈체스터 저택에서 위탁 교육을 받은 바 있다.

장차 제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아 각각 남작과 자작이 될 신분이고 말이다.

“페리만 있었어도 우리도 살 만했을 텐데.”

“하다못해 그 꼬맹이 때문에 아피니제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도, 발언권이 있었겠지.”

“인생 참 불공평하다니까.”

진과 오셀로의 서임식 이후 관례상 며칠간 저택에 머무는 중이었다.

아버지들의 공부하라는 성화를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참, 오늘은 메리 안 만나? 곱슬머리에 주근깨 있는 애.”

네빌의 질문에 바몬트는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글쎄.”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안 보이던데. 서임식 날은 만났잖아.”

메리는 바몬트가 위탁 교육을 받고 있을 때부터 짝사랑하던 하녀였다.

바몬트보다 두 살 많은 하녀로 그는 집에 돌아간 이후에도 종종 메리를 만나기 위해 저택에 들렀었다.

“만난 적 없어.”

“뭐? 하지만…….”

분명 두 사람이 함께 있던 것을 보았던 네빌이 고개를 갸웃하자, 바몬트의 입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만난 적 없다고, 네빌.”

갑자기 서슬 퍼런 흑염을 드러내는 바몬트의 모습에 네빌은 움찔했다.

“아, 알았어. 내가 잘못 봤나 보지. 그런데 이렇게 화낼 필요까지는…….”

그리고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하녀들의 비명이 들렸다.

“아아악!”

“누군가 떨어졌어!”

바몬트의 입술 끝이 잠시 실룩였다.

네빌은 놀라 바몬트에게 말했다.

“가 보자!”

이내 그들은 회랑을 나와 비명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빠르게 걸었다.

도착하자, 하녀복을 입은 어느 아이가 바닥에 떨어져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가 봐도 즉사한 상황.

그녀를 보던 바몬트의 시야가 옥상 쪽을 향했다.

그리고 외쳤다.

“저자가 밀어 떨어트렸다. 윈체스터가의 하녀를 죽였어!”

모두의 시선이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 위에는 드레스를 입은 카실리온이 서 있었다.

“감히 윈체스터 가문의 재산에 손해를 입히다니!”

바람에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과 레이스 자락이 휘날리고 있었다.

바몬트는 제 사랑을 거절하던 메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 말했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 정말 그 변태 새끼를 좋아한다는 거야? 남자이면서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놈보다 내가 못하다고?

― 옷은 취향일 뿐, 그리고 카실리온 님은 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다우시잖아요. 물론 카실리온 님이 저를 봐 주실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래도 저는 그분을 좋아하고 있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재수가 없었다.

헛간에서 혼쭐을 내주려고 했는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 그 이후에는 손을 대지 못했었지.

그 뒤에도 추잡스럽게 8년 동안이나 윈체스터 저택에 붙어 있으며 하녀들을 유혹하고 다니다니.

“살인자! 윈체스터의 혈족으로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바몬트는 차고 있던 검까지 꺼내 옥상 위의 카실리온에게 겨누었다.

‘글씨가 지워지는 잉크로 옥상으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으니 증거는 남지 않을 거야.’

레카르도 윈체스터는 제 것을 상하게 한 외부인을 곱게 보지 않는다.

“하녀를 죽이다니. 내가 너를 대신 단죄…….”

“끼어들어서 미안하지만.”

그러나 말을 마치기 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필시 하녀라고 생각한 바몬트는 눈썹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가 움찔했다.

샤샤 윈체스터가 눈썹 끝을 조금 올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말도 들어 봐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