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06화
하늘에 붉은 노을 기가 보였다.
지나치게 가까이 마주 서 있던 에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 오늘 밤…… 스퀘어에 와.
시릴 정도로 푸르게 빛나는 그의 눈은 나를 짙게 응시하고 있었다.
붉은 입술이, 나만 알아들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다시 달싹였었다.
― 기다리고 있겠다.
그 순간을 회상하던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나를 도와준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내가 초대에 응할 의무는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 내게 연락 한번 없었던 에반 테일러스이다.
“그래도…….”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겠지.”
종말의 날이 4년 뒤로 다가왔다.
에반 따위야 신경 쓰지 않겠다고 생각한 지가 꽤 되었지만, 어쨌건 그는 스물일곱 번의 회귀를 한 먼치킨 남주인공이다.
레카르도가 일전의 회차에 전례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고는 하나, 에반의 말대로 종말이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라면…… 페르세토스가 부활하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에반은 나를 구했었다.
나는 감사 인사도 하지 못했고.
* * *
“……무슨 냄새지?”
스퀘어에 들어서자마자 어딘가에서 맡아 본 방향제 냄새가 났다.
뭐야, 전에는 이런 향기 같은 거 안 났었는데.
그리고 앞을 보자 우두커니 서 있는 에반이 보였다.
반듯하게 차려입은 제복, 그리고 오늘따라 반듯반듯해 보이는 가구들.
잠깐 사이에 인테리어가 살짝 바뀐 것 같기도 하고.
“……앉아.”
나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에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원래 테이블에 꽃병이 있었던가.
“…….”
의아한 표정으로 에반을 보았다.
다시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헤어질 때 열세 살이었던 꼬맹이는 어디 가고, 내가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절세미남이 앉아 있었다.
“아깐 고마웠어요.”
나는 무뚝뚝하게 말을 꺼냈다.
나를 바라보는 에반의 눈동자는 담담해 보였다.
“……별거 아니야.”
무뚝뚝한 에반 테일러스다운 대답이었다.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걸 보면,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러 여기 부른 것은 아닐 테고…….”
나는 에반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요?”
우리의 사이에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에반이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였다.
“우리가 이전으로 돌아가길 원한다.”
그의 입술 새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보고 있다가 입술을 비틀었다.
“이전이라면 어릴 때를 말하는 건가요?”
에반은 그저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저는 가주께 뭔가를 캐묻고 가주께서는 속내 한번 드러내지 않으면서 혼자 폼 잡고,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떠나는 것까지 독단적이었던 그 시절로?”
내 입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반은 말없이 무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가주님과 정보를 나눌 생각은 있어요. 가주님께서 그에 합당한 정보를 준다면. 하지만…….”
나는 에반에게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이제 가주님의 동료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생각하는 감정 그대로를 그에게 뱉어 냈다.
에반이 떠난 뒤 나는 생각했었다.
내가 스스로 만든 그에 대한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에반과, 스물일곱 번을 회귀한 에반은 분명 다른 사람인데 말이다.
세상이 더는 책 속의 상황이 아닌 것처럼.
그렇기에 그에게 내심 구세주가 될 것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방적인 관계의 단절에 조금 실망했었고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에게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페르세토스의 부활과 종말이 앞에 있더라도, 어떻게든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본다.
“……사정이 있었다.”
한참의 정적 후 에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나는 더 들을 거 없다는 듯 반응했다.
“제가 꼭 알아야 하는 사정은 아닐 듯한데요.”
그러나 에반은 짙은 시선 그대로 내게 말했다.
“알아야 하는 사정이야.”
나는 눈썹을 찌푸렸고 에반은 내게 말했다.
“곁에 있겠다고…….”
“뭐……?”
에반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내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아까와 다름없는 서늘한 표정인데, 왜 이렇게 눈빛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하지만 제 곁을 떠나 8년간 감감무소식이었던 사람은 가주님이잖아요.”
에반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내 손에 그것이 닿자마자 눈앞에 창이 떠올랐다.
[스퀘어의 주인이 ‘기억 재생 장치’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 * *
“크어억, 컥. 콜록.”
페르메티스가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장소는 우거진 숲속, 시간은 밤중인 듯 보인다.
저 멀리…… 윈체스터 저택이 보였다.
‘대체 저 애가 왜…….’
페르메티스는 어떤 사정이 생겨 자택으로 급히 돌아갔는데,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7년쯤 전이었던 것 같다.
에반이 떠나고, 레카르도가 오르테니안을 흡수한 이후의 일이니 말이다.
어떤 치명적인 전염병이 발병해 갑자기 죽었다고 했는데…….
화면 속 페르메티스는 꿇어앉아 피를 계속해서 토해 댔다.
그리고 페르메티스의 맞은편에는 에반이 서 있었다.
“죽어, 베르시.”
에반의 말에 페르메티스는 벌게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베르시라면 책에서 읽어 알고 있다. 비틀린 욕망과 질시를 가진 사람에 씐 괴물.
씐다기보다는 본래의 인격과 괴물의 인격이 혼합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물리적인 힘 자체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물리적인 힘으로는 죽이는 데 한계가 있으며, 다크 이글도 떨게 할 만한 비장의 무기가 있다.
“닥쳐……!”
아랑곳하지 않고 거세게 내질러지는 검의 궤적.
검에 베인 페르메티스는 다시 신음했고, 금세 살은 차올랐지만 또 피를 토해 냈다.
에반의 짙푸른 눈동자에는 조금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페르메티스는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너는 한때 제국민의 절반을 죽인 살인마이니 나를 베는 건 눈을 깜빡이는 것만큼 쉽겠지, 회귀자여! 하지만…….”
페르메티스의 눈은 붉었다.
“나는 반격할 힘을 모아 네게 저주를 내린다.”
베르시의 저주라고 불리는 비장의 무기는 참으로 고약한 저주였다.
베르시가 죽기 전 단 한 번 할 수 있으며,
“너는 샤샤 윈체스터를…….”
그것은 100퍼센트의 확률로 이루어진다.
페르메티스의 목소리에 악다구니가 들어차 있었다.
“네 손으로 죽일 거야.”
페르메티스를 내려다보는 에반의 눈에 차가운 분노가 차올랐다.
“네가 구하려 했던 그 애를, 그 재수 없는 애를, 네가 죽일 거라고! 에반!”
그리고 그 순간 에반의 검에서 다시 짙푸른 청명의 날이 뻗어 나와 페르메티스를 찔렀다.
저주를 사용한 베르시는 비로소 약해져 죽게 된다.
“…….”
페르메티스는, 아니, 괴물은 피를 토하며 푹 쓰러졌고, 에반의 눈동자에는 서늘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잠시 뒤 눈앞의 장면은 설산으로 바뀌었다.
만년설 지대의 설산, 언젠가 이능을 각성할 때 바히모스를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에반은 관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
관은 에반의 키보다 컸지만 에반의 표정은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산의 정상까지 올라간 에반은 청명으로 거대한 구덩이를 만든 뒤 페르메티스의 관을 그 안에 던져넣어 버렸다.
그 뒤 청명으로 그것을 덮어 버렸다.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종종 바라보던 그 산에 페르메티스…… 아니, 베르시가 묻혀 있다니.
“잘 가라, ‘소녀의 재앙’.”
페르메티스의 최후를 보던 에반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재앙이라면…… 설마, 소녀의 재앙이 페르메티스였다는 거야?!
왜 레카르도가 ‘소녀의 재앙’의 정체를 알면서도 진에게조차 쉬쉬했는지도 이해가 간다. 페르메티스는 윈체스터 가문의 사람이니 정체가 밝혀지면 가문의 명예에도 타격이 간다.
‘내게까지 말씀하시지 않은 이유는…… 뭘까.’
답은 곧 떠올랐다.
‘내가 무모한 짓을 할까 봐 걱정하신 거겠지.’
오르테니안을 활성화시키고 근신 3개월을 받았을 때로부터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치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놀라 눈을 깜박이자 서서히 보이는 것은…….
“……헉!”
에반의 모습이었다.
“…….”
나는 조용히 에반의 눈을 응시했다.
페르메티스에 씐 베르시는 분명 에반을 저주했었다.
필시 에반이 제 손으로 나를 죽일 것이라는.
“…….”
설마 지금 그 저주에 걸려 있는 건 아니겠지, 라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쿵, 쿵 뛰며 목뒤가 싸늘해졌다.
책에서 읽기로 베르시의 저주는 풀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최악의 저주라고도 할 수 있고.
“베르시의 저주를 봤어요.”
내 질문에 에반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 이후의 일, 보지 않았나?”
“가주께서 페르메티스를 설산에 매장하고 끝났습니다.”
잠시 후 에반은 손을 들어 제 미간을 짚었다.
충격적인 장면을 본 이후라 그런지, 나는 그의 작은 손짓에도 움찔하고 말았다.
에반의 입술이 달싹였다.
“……명계의 일이라 기록되지 않았던 모양이군.”
그리고 손을 내린 뒤 내게 말했다.
“나는…….”
베르시의 저주는 대상자가 죽지 않는 한 끝까지 따라다닌다.
어떻게든 성취한다는 뜻이다.
마치 페르세토스에 무의식적으로 조종되는 것처럼 저주의 영향을 받고 있다면…….
지금 그를 마주하고 있는 것도 위험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 오히려, 묘하게도 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 느낌이야.’
내 직감을 믿고 그를 바라보았다.
에반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샤샤.”
에반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던 사람이었던가.
눈썹은 바싹 굳어 있었고 그의 푸른 눈동자와 표정에는 처절할 만큼 간절한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일전에 보았던 스물일곱 회차 중 단 한 번도…… 이런 표정을 지어 본 적 없는 에반이었다.
“나는 그대를 다치게 할 수 없어.”
거친 그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내 기억 속 그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본 적 없었다.
“그대를 죽이지 않기 위해 내가 죽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