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07화
나는 머리가 멍해진 채 테이블에 앉아 맞은편의 에반에게 물었다.
“한 번 죽어서 베르시의 저주에서 벗어났다는 말인가요?”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위해서, 나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에반이 죽었다고?
“하지만 가주님은 죽으면…… 회귀하잖아요. 그럼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뭔데요.”
에반 테일러스는 죽으면 곧장 회귀한다. 매 회차 그랬다.
“아니, 이제 회귀하지 않아.”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대체 그게 무슨…….”
“위험한 짓이지만 해야만 했어. 그 저주를 실현시킬 수는 없었으니까.”
“……저를 죽이는 저주요?”
“…….”
나는 푸른 매의 비밀에서 본 페르메티스의 저주를 떠올렸다.
네 가지 재앙 모두 나에 대한 적의가 있었고, 베르시를 잡는 대가로 에반은 그런 류의 저주를 뒤집어쓰게 된다는 것을 이미 간파했던 모양이다.
“……나는 저주를 충돌시켰다.”
에반이 손으로 자신의 귀 아래쪽을 만지자 갑자기 어떤 문양이 드러났다.
나는 그것을 본 순간 놀라 말을 잃었다.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저것은 100년 전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카이사의 저주…….”
내 입술에서,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에반이 목에서 손을 떼자 저주의 문양이 사라졌다.
“카이사의 술법은 테일러스의 혈족만 가능한 금지된 사술이며, 인간을 의식 없이 시전자의 노예로 부릴 수 있다.”
“…….”
“나는 시전자가 됨과 동시에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명령했지.”
에반의 푸른 눈 속에 멍한 내 얼굴이 담겨 있었다.
“뭘 거 같나.”
쿵, 쿵, 가슴이 뛰는 박동이 들렸다.
― 샤샤 윈체스터를 지켜라.
‘샤샤 윈체스터를 죽여라’와 상반되는 저주라면 이것밖에 없다.
스퀘어에서 본 에반의 마지막 모습이 서서히 지금의 에반과 겹쳐졌다.
심장이 미친 듯 뛰고 있었다.
에반의 입술이 달싹였다.
“서로 상반되는 강력한 저주가 충돌하면 무효가 된다. 하지만 인간은 죽고 말지.”
“…….”
“하지만 회귀하면 세상은 다시 되돌아가기에, 대가주 헥토르 윈체스터의 힘을 빌렸어.”
― 제가 스스로에게 카이사의 저주를 거는 순간, 제 몸에 흑염을 흘려넣어 주십시오.
나는 뛰는 심장에 손을 올린 채 입술을 열었다.
“흑룡의 힘을 빌린 건가요……?”
“응. 흑룡과 소통하기 위해 대가주의 도움이 필요했다. 청명의 반발이 극심한 내 몸에 흑염을 주입하기 위해 그는 꽤 무리를 했지. 회복하는 데만 수년이 걸렸을 것이다.”
헥토르 할아버지가 저택으로 되돌아오지 못한 것이 이 때문이었던 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소통에 성공하자 우호적이더군.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회귀의 힘을 잃은 거군요.”
나는 맞은편의 에반을 응시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유독 깊고 짙어 보였다.
테일러스의 가주, 회귀의 사슬을 스스로 끊어 낸 자.
* * *
무의식의 세계를 유영하던 에반은 제 앞에 나타난 거대한 생명체를 보았다.
회귀의 빛과 함께 본 백룡이 아닌, 다른 존재였다.
― 당신이 마중 나올 줄 알았어, 흑룡.
흑룡 윈체스터의 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며 전달되었다.
― 고약한 꼬마로군. 나의 종 헥토르까지 이용하다니. 게다가 두 개의 저주라……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들이야.
― 예상이 들어맞아서 다행이야. 혹시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에반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 죽음의 순간, 내가 당신을 소환한 거 맞지? 이전에는 백룡을 소환해서 회귀를 얻었고.
― 얼굴을 보아하니 백룡의 선물을 썩 즐겁게 사용한 것은 아닌 모양이군.
에반의 눈빛이 조금 씁쓸해졌다.
― 너의 몸은 저주로 더럽혀져서 이제 백룡의 회귀를 쓰지 못한다. 어찌할 생각이냐.
― 그건 당신이 말해 줘야지 않겠어?
― 뭐라고?
― 내 앞에 나타난 이유는 도움을 주기 위해서잖아. 어쩌면 회귀의 특권조차 내가 버렸기에, 완전한 파멸에 이르게 될 세상을 구하라는 메키우스의 명령일지도 모르고.
너무도 당당한 에반의 말에 흑룡은 허, 하고 한참 동안 노란 눈으로 에반을 응시했다.
― 참으로 오만방자한 녀석이로군.
― …….
― 이런 녀석에게 용의 힘을 받아들이는 자아가 있다니 눈살을 찌푸릴 일이고.
에반은 어깨를 으쓱했다.
― 운명이란 참 예측하지 못하겠군.
흑룡이 콧김을 내뿜었다.
― 고약한 저주로 청명을 배신한 그대는 회귀의 특권을 다시 쓸 수 없으니, ‘부활’의 특권을 흑룡 윈체스터의 이름으로 부여한다.
흑룡의 언령과 함께 에반의 몸 주변을 새카만 안개가 뒤덮기 시작했다.
에반의 귀로, 망자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 그러나 지엄한 세계선의 인과율에 따라 부활의 특권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 아낌없이 주는 백룡과는 다르군.
― 스물일곱 번이나 네놈을 회귀시키며 제 영혼을 갉아먹던 그 멍청한 놈과는 달리 남의 자식에게 고운 대접을 해 줄 생각은 없어서 말이야.
검은 안개에서 파리한 손이 하나둘 뻗어 나오고 있었다.
흑룡의 눈은 사악한 빛을 띠며 번뜩였다.
― 일곱 년간 명계에서 떠돌거라. 약속한 날 너는 저주에서 벗어나 완전한 몸으로 바로 설 터이니…….
검은 구름에서 뛰쳐나온 망자들이 에반의 몸을 잡고 끌어당기고 있었다.
― 영원히 죽지 않았던 자여, 죽음의 무게를 깨닫거라.
선연한 전언과 함께 에반은 검은 구덩이 속으로 끝없이 떨어졌다.
* * *
“그래서…… 그 기간 동안 명계에 있었다는 말씀이세요?”
명계는 죽은 자들의 세계이다.
물론 다녀온 자는 없기에 전설로만 전해지는 꿈같은 이야기.
에반은 입술을 달싹였다.
“……응.”
샤샤 윈체스터를 죽이라는 페르메티스의 저주와, 카이사의 저주를 충돌시켜 상쇄시켰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저주를 두 개나 받아 낸 에반의 대가는 죽음.
그리고 죽음의 순간, 흑룡을 만나 ‘회귀’ 대신 ‘부활’이라는 특권을 받았다.
부활을 위해서는 명계에서 버텨야만 했고 말이다.
나는 울컥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명계는…… 어땠어요?”
“끔찍한 곳이지만.”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에반의 입술 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견뎠다.”
그의 표정은 별반 다를 것 없었지만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에반의 새파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그대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심장이 계속 뛰고 있었다.
에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왜 나를 이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난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고, 인내하더라도.”
언젠가 내가 그를 만나 지하 감옥에서 했던 말이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그리고…… 같이 있겠다고 했잖아. 평생.”
언젠가 에반의 이능이 폭주할 때 그를 진정시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길들여진 어린 짐승처럼 사나운 눈으로 나를 보던 그의 눈동자도 생생하다.
그 에반은 이제 키가 엄청나게 큰 성인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평생’이라는 말을 했었던가.
“…….”
그 말은 덧붙이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푸른 벽안에 비친 나의 모습에 나는 시선을 조금 내렸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오해했어요. 미안해요.”
몰랐다. 에반이 어떤 세월을 견디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혼자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는지도.
그런지도 모르고 그에게 서운함을 느꼈던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어쩌면 조금 많이.
“그런데 혹시…… 거기에서…… 저를…….”
나는 에반에게 물었다.
“……저를 만난 적 있어요?”
퀘스트를 수행하다가 슬라임형 마물 때문에 죽을 뻔한 적이 있다.
그 일을 계기로 <강령>이라는 스킬까지 얻게 되었고.
어쨌든 그때 정신을 차리게 해 준 것은, 어렴풋이 보이던 에반의 얼굴이었다.
분명 환상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응시하던 에반은 낮게 중얼거렸다.
“……기억할 줄은 몰랐군.”
나는 에반 테일러스를 바라보았다.
연락이 안 되는 동안, 에반이 윈체스터 저택에서의 일을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을 뿐.
“어떻게 한 거예요?”
“그냥 그대가 위험에 처한 것을 알고 도와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잠시 고개를 숙여 무릎을 바라본 나는 입을 뗐다.
“가주님, 저는…….”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까, 입술을 뗐는데도 입이 바싹바싹 마른다.
에반의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서늘한 목소리로 내 말을 정정했다.
“……에반이라고 불러, 둘만 있을 때는.”
나는 손을 움찔했다.
“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