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08화
“어제저녁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들었다.”
레카르도와의 티타임, 나는 움찔했다.
어젯밤 에반과 만난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네, 몸이 좋지 않아서요.”
레카르도는 조용히 나를 응시하다 찻잔을 입술에 대었다.
조용한 정적이 흐른다.
어쩐지 레카르도가 우리의 만남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조마조마하다.
레카르도는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내게 말했다.
“사흘 전…….”
“…….”
“바쉬론 경이 제 영지의 농민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그 말에 나는 흠칫했다.
바쉬론이 오빠들의 서임식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구나.
페르메티스의 사망 소식 이후에도 어둠의 기일에는 꼬박꼬박 참여하던 그였는데 말이다.
레카르도는 말을 이었다.
“농지의 세금을 7할이나 떼었다고 하더군. 물론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그와 제스티아가 함께 운영하던 노예 시장이 무너진 이후로 수익 사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다고 경작한 것의 10분의 7을 가져가다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생각하지?”
이내 레카르도의 물음의 끝은 나를 향했다.
나는 흠칫 놀랐다.
가문의 정치나 일에 관한 것을 그가 내게 직설적으로 물은 적은 처음이었다.
배운 것을 시험하기 위해 읊어 보라는 명령은 했어도 말이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바쉬론 남작의 봉토를 압수하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내 말에 레카르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왜지?”
“지나치게 세금을 갈취하면 반란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그분은 후일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이익만을 생각했고요.”
“고작 농민들에게 습격을 당해 땅에 떨어진 윈체스터의 위신은.”
레카르도의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대로 넘어간다면 기강이 해이해질 것이다. 감히 윈체스터를 해치고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러한 자들이 늘어가겠지.”
레카르도는 그들에게 어떤 벌을 줘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일을 꾸민 자들을 파라메나로 이주시키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내 말에 레카르도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수년 전 다크 이글이 파라메나를 습격한 이후, 그곳의 주민들 많은 수가 죽었고 지금도 인구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요. 저희는 포탄을 만들 자들이 필요하고요.”
일순간 묘하게 서리는 감탄의 기색, 나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바쉬론 남작의 봉토를 압수하면 인명부는 아버지의 것이 되니, 일손이 부족한 곳에 일손을 공급할 수 있을 거예요.”
“군역이라.”
“네, 저들도 당장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군역을 지는 자들을 위해 가족들이 먹을 식량도 보내 주니 서로 만족할 수 있을 거예요. 대외적으로는…….”
나는 북쪽 산맥을 응시했다.
파라메나는 윈체스터 영지의 최북단, 다소 혹독한 환경이다.
“……감히 윈체스터에 대항한 벌인 거죠.”
이내 레카르도의 잔잔한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는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제법 마음에 드는 대답이군.”
나는 레카르도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영특한 샤샤 아가씨’는 저택 모든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레카르도는 그 점에 대해 언제나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다.
윈체스터의 본질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이능은 윈체스터의 본질에 정면으로 반항한다.
‘희생을 통해 남을 돕는다’니.
그러니 만약 내가 반란을 일으킨 자들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풀라고 했다면…… 그는 분명 실망했을 것이다.
“모든 일에는 원칙이 필요하나 누릴 수 있는 이익까지 저버릴 필요는 없지.”
레카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셀로의 대답보다는 마음에 드는군.”
오셀로의 대답은 들으나 마나 뻔했다.
바쉬론도 죽이고, 반란을 꾀한 자들도 다 죽이자.
“어떤 상을 받고 싶으냐.”
레카르도의 목소리에 나는 움찔했다.
레카르도는 종종 우리가 뭔가 기특한 것을 해냈을 때 상을 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 * *
집무실에 들어온 로웬이 서류를 가져가며 물었다.
“오늘은 생각이 많아 보이십니다, 공작 전하.”
창밖을 보고 있던 레카르도의 입술이 달싹였다.
“창의적이고 효용적인 답변이더군.”
“아, 바쉬론 남작님의 일을 물으셨습니까?”
얼마 전 오셀로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카르도의 짙은 녹안이 옅게 일렁였다.
감탄인지, 체념인지 모를 감정이 그 안에서 잠깐 넘실대었다.
레카르도에게 어울리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런 소원을 빌 줄이야.”
로웬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주군을 보았다.
언제 저런 얼굴을 하셨더라…… 떠올려 보니 오래전이 생각났다.
트리샤 부인이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던 것 같다.
“아가씨께서 어떤 소원을 비셨습니까.”
레카르도의 입술 끝이 움직였다.
“……무덤을 만들어 달라 하더군.”
샤샤는 언제나 예상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살면서 깊게 생각해 보지 않거나 잊고 있던 것들을 되살아나게 한다.
“항상, 새로워.”
* * *
“제기랄, 내가 왜 여기에 조의를 표해야 하는데.”
“…….”
“알았어, 하면 되잖아.”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오셀로는 툴툴거리며 에라시니스 한 송이를 비석에 올려 두었다.
이곳은 에반의 환상 속, 그가 페르메티스의 목숨을 끊었던 장소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페르메티스의 비석이 있었다.
― 바쉬론은 페르메티스가 ‘소녀의 재앙’이었다는 사실을 숨겼어요. 그것까지는 비난이 두려워서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나는 책에서 읽어 많은 고대 마물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 베르시는 본인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나쁜 마음을 가진 자가 일부러 베르시를 끌어들인 거예요. 더구나 계약까지 해야 하죠.
언젠가 에시르의 금공에서 그녀의 기억을 본 적 있었다.
카이사가 에시르에게 하려던 시험도 아마 베르시에 관한 실험일 것이다.
카이사는 당사자인 에시르가 원치 않아 해서 베르시의 정착에 실패했겠지만, 페르메티스는 나를 미워하는 강렬한 의지로 강력한 마물 ‘베르시’의 희생양이 되었다.
― 그러니까, 경고하는 거예요. 우리는 다 알고 있다고.
저택에 만들어진 그녀의 무덤을 통해서 말이다.
나는 페르메티스의 비석에 에라시니스 한 송이를 더 올려놓았다.
반듯한 비석에 페르메티스의 이름과 사망한 연도가 새겨져 있었다.
‘안녕, 페르메티스.’
나는 처음 만났던 때의 페르메티스를 떠올렸다.
세 살이었던가. 그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애가 끈질기게 나를 질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살의에 가까운 마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하긴, 그러기에 베르시 같은 마물에게 영혼을 판 것이겠지.
‘만약 네가 살아 있을 때로 돌아간다면…… 돌아간다고 해도 너와 친해질 수는 없을 거야.’
나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 비석을 바라보았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까지 포용해야 한다는 마음씨 좋은 자들도 있겠지만, 레카르도의 바람대로 나는 그 정도로 이타적인 성격은 아니다.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된 건 네 책임이야.’
내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타락하지 않았을 텐데, 하며 눈물을 쥐어짜는 성격도 아니고.
‘그래도…….’
에라시니스의 향이 바람에 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이제는 잘 쉬어.’
돌아서며 나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서 있는 오셀로를 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아. 널 괴롭혔던 애에게 왜 호의를 베푸는 거지?”
오셀로는 중얼거렸다.
“그것도 하녀의 가족에게 돈을 주던 것과 같은 맥락인 건가. 아니, 하녀는 널 괴롭히지는 않았잖아.”
오셀로는 모를 것이다. 에반의 1회차에, 자신이 얼마나 절절한 마음으로 이 무덤의 주인을 사랑했는지.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모두를 위해서야.”
그리고 저택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지 않아, 정원에 서 있는 에반의 모습이 보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망토가 휘날린다.
높이 솟은 콧대와 서늘한 눈매 속 짙은 푸른 눈동자.
서서히 나를 돌아보는 모습에 어제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뱉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저도 모르게 잠시 입술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에반의 시선은 오로지 나만을 향해 있었다.
“아주 한가하신 모양…….”
“좋은 오후예요.”
옆에서 빈정대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 오셀로의 말을 내 목소리가 덮었다.
에반은 여전히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오셀로의 잡음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는 듯.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손이 간질간질했다.
나는 에반을 보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