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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109화 (109/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09화

아버지의 부름을 전하는 하인이 와서 오셀로는 자리에서 빠졌다.

그 과정에서 에반에게 눈으로 레이저를 쏘고 가기는 했다.

― 샤샤, 딴 길로 새지 말고 들어가.

정말, 아직도 애 같다니까.

“…….”

그리고 나와 에반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에반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지난 회차들에, 무덤을 가져 본 자들은 많지 않았어.”

페르메티스의 무덤…….

이내 우리는 조금 더 울창한 정원으로 들어섰다.

“대부분이 한때에 죽었으니까. 페르메티스 역시 그랬고.”

한때라면 역시 페르세토스의 강림을 말하는 거겠지.

“저도, 같았겠죠.”

병들어서 죽었을 것이다. 때로는 에반의 검에 죽었을 테고.

어느 회차에서는 내가 지금의 나이 무렵에는 아파서 방에 처박혀 있을 때이니.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서서히 죽어 가고 있겠지.

[이름 : 샤샤 윈체스터(LV.16)]

[직업 : 중급 구원자]

[특성 : 메키우스의 열쇠]

[능력치: 체력 69 / 근력 77 / 이능 91 / 지능 89/ 생명력 72]

[스킬 : 검은 지배(SS/LV.10), 피해 반사(A/LV.8), 강령(B/LV.3)]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70이 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고 신수 알약은 8살 이후로 하나도 쓰지 않았다.

스킬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고, 레카르도 윈체스터는 세계관 최강이나 다름없는 오르테니안의 힘을 가졌으며 진과 오셀로 또한 모든 회차들 중 제일 강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내게 깊은 호의를 가지고 있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군.”

바람결에 에반의 목소리가 들린다.

“바네사, 그 여자가 죽었을 때도 그렇고.”

“적을 추모하는 이유 말인가요?”

에반의 시선이 느껴졌다.

“죽으면…… 뭐든지 아무것도 아니게 되더라고요. 나름대로 치열했던 삶도, 좋아하던 사람도 싫어하던 사람도 그냥 꿈을 꾼 것처럼.”

“…….”

“결국 짐처럼 무거운 미움과 적의는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죠. 그걸 꽃 한 송이로 덜어낼 수 있다면 제가 이기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에반을 보고 물었다.

에반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입술을 닫고 있었다.

한참 뒤 새어 나오는 옅은 미소와 더욱 짙어진 시선은 어쩐지 나를 민망하게 한다.

“꽃을 꺾으러 갈까요? 에라시니스 꽃밭으로요.”

나는 에반에게 활기차게 말했다.

“페르메티스가 살아 있었다면 저보다는 가주님의 꽃을 기뻐할 거예요.”

하지만 곧바로 에반은 멈추어 서서 나를 마주 보았다.

가는 길을 막듯 키가 큰 그가 내 앞에 서자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다.

“좋은데 한 가지 계속 거슬리는 부분이 있군.”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내게 그는 말했다.

“에반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

“샤샤.”

에반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언젠가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에게 그냥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그건 여덟 살 때의 일이고, 지금의 우리는 다 컸잖아.

― 불편해요.

― 불러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오늘도 끝까지 말을 씹는 나를 보는 에반의 입꼬리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녹음이 우거진 정원, 푸른 시선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살짝 옆으로 비켜 걷기 시작했다.

“…….”

하지만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어느새 내 곁에서 다시 걷고 있다.

덥지도 않은 날씨인데 손에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우리는 에라시니스 꽃밭에 도착했다.

산들거리는 꽃들은, 바네사가 쓸어버렸을 때보다 더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에라시니스의 생명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열심히 관리한 덕이기도 하다.

에반조차 잠시 멈추어 눈썹을 꿈틀 움직일 정도로, 몽환적으로 예쁜 풍경이다.

조금 돌아서서 보면 에라시니스의 바다에 작게 보이는 붉은 윈체스터 저택이 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에라시니스의 저택이라.”

“에라시니스 벌꿀은 달콤해요. 아버지께서는 벌꿀을 싫어했는데, 이 벌꿀만은 좋아하시더라고요.”

나는 허리를 조금 숙여 꽃의 향기를 맡아 보았다.

“그래서 더 정성을 들일 수밖에 없어요.”

에반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는 제 가족이 행복하기를 원해요. 그분들이 제게 베푸는 것만큼 돌려줄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거죠.”

잠시 후 그의 입술이 조금 비틀렸다.

“착각을 하고 있군.”

“……네?”

내가 눈을 살짝 찌푸리자 그는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이미 열 배로 돌려받았다고 생각할 거야.”

풀벌레들의 울음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건 에반이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윈체스터가 얼마나 셈에 강한데. 암흑가에서는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윈체스터의 수중에서 허튼 방식으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열 배로 돌려준단 말인가.

“하물며 나도.”

에반의 목소리가 들린다.

꽃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에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꽃은 꺾지 마.”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 표면에, 의아한 내 표정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페르메티스의 비석에 놓을 꽃을 꺾으려던 거 아니었어요?”

에반은 가만히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애초에 그런 것은 관심에도 없었다는 듯, 그는 저벅저벅 다가왔다.

“아니…….”

그리고 내 옆에 서서 꽃향기를 맡았다.

“꽃을 꺾으러 온 거 아니야. 나는 그대를 다치게 할 뻔한 애를 용서할 만큼 도량이 넓은 자가 아니거든. 그저…….”

짙은 벽안에 창백한 에라시니스가 비쳤다.

“……함께 있고 싶었어.”

이내 그는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나직한 목소리에 가슴이 덜컹했다.

* * *

“아가씨, 카실리안 님이 운영하시는 약국이요…… 대박이 났대요.”

저녁 즈음 내 머리를 빗기며 마야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내 사진의 사용권을 허가해 주었다.

“제국의 귀족 영애들에게 인기 폭발이래요.”

분명 데뷔탕트 무도회에서의 내 호의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배분율을 높여 달라고 해야겠어.”

그래서 요즘 카실리온이 잘 보이지 않았구나.

나는 피식 미소를 흘렸다.

생각해 보니 책 속의 카실리온은 사회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자기가 몰입하는 것에만 몰입해서, 그나마 동료인 에반 테일러스를 제외하고는 누가 말을 붙여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

그런데 지금의 카실리온은…… 성공한 사업가쯤 되는 건가.

이 사업 자금은 진이 대 주고 있는 것이라 진의 사업 성공이나 다름없기도 하다.

‘윈체스터 저택에서의 위탁 교육이 카실리온의 성격을 바꾼 건가.’

아무래도 어릴 때의 환경이 성격 형성에 중요하다던데, 이곳에서의 생활은 은근히 그와 잘 맞았던 모양이다.

‘그럼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오랫동안 공부하며 나는 아카다의 마법사들만큼이나 많은 지식을 쌓았다.

여러 가지 자료를 볼 때 다음 단계는 분명하다.

그것은 네 가지 열쇠의 합치.

흑탑의 열쇠, 백탑의 열쇠, 지탑의 열쇠, 수탑의 열쇠.

[조합] 기능의 접시와 각 가문의 문양을 보았을 때 네 열쇠의 수집은 내가 나아가야 할 가장 가능성 있는 길이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흑탑의 열쇠와 수탑의 열쇠이다.

헤일로에는 새 주인이 생겼지만 우리는 당분간 수탑의 열쇠를 돌려주지 않기로 했다.

이전 가주 바네사가 윈체스터를 공격했다는 것을 무마하는 대가이기도 하다.

남은 것은 아카다…… 지탑의 열쇠, 그리고 테일러스 가문의 백탑의 열쇠.

백탑의 열쇠를 얻으려면…….

‘에반의 도움이 필요하겠지.’

명계에서 살아 돌아와서 그런지, 무슨 이유인지…… 언젠가 내가 보았던 ‘푸른 매의 비밀’에서 보았던 에반의 청년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이다.

회차를 거듭하며 에반은 점점 피폐해지며 자아를 잃어가는 혼돈스러운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눈의 초점부터 또렷을 넘어 형형하다고 해야 할까.

‘스물일곱 번의 회귀와 7년의 명계 생활이라.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그 고초를 이겨 내고 내 앞에 서서 하는 말이…….

― 같이 있겠다고 했잖아. 평생.

어려운 문제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작게 박동하며 뛰고 있었다.

나를 복잡하게 하는 남자들은, 지금은 내 오빠들만으로도 충분한데.

‘백탑은 뒤로하고, 지탑의 열쇠부터 알아볼까.’

* * *

에취―

오셀로는 어쩐지 재채기를 했다.

밤중, 연무장에 온 그의 검에는 새카만 오러가 가득 서려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이룬 성취는 대단했다.

진과 싸워도 근접전에서는 피장파장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진도, 오셀로도 모두 언젠가 닥쳐올 위험에 대해 알고 있었다.

네 가지 재앙은 끝났지만…… 끝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 에반 테일러스는 회귀자이다.

레카르도는 에반에 대해 말했다. 더 큰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오셀로는 검을 휘둘렀다.

훈련용 목각 인형은 오셀로의 검에서 날아간 오러로 산산조각이 났다.

오셀로의 녹안이 짙게 일렁였다.

‘……난 진과 달라.’

그 빌어먹을 장식장에 진이 샤샤를 넣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배에서 난 동복형제라도, 가족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진정한 가족이란, 그 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

예를 들어 그 애를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고,

그 애를 손가락질하는 자가 있다면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태로 만들어 놓고,

그 애를 넘보는 자가 있으면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죽이는 건 싫다고 했으니까.’

오셀로의 서늘한 눈동자에 아쉬운 빛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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