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10화
에반은 며칠 뒤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볼모로 왔을 이전과 달리, 그는 이제 테일러스의 중심인 가주이니 돌아갈 수밖에 없다.
― 스퀘어에서 만나.
라는 말을 남기고.
“찝찝한 날씨야.”
그리고 오늘, 내가 탄 마차는 로젠토로 가고 있었다.
셀리아 헤일로로부터 자신의 생일 파티 초대장이 왔기 때문이다.
이전 무도회에서 나를 쪽 주고 싶어 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에 사실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이모인 라슬라 아카다가 생일 파티에 참여할 것이라는 소식만 없었으면 말이다.
라슬라 아카다, 그녀는 현 아카다 가주인 엘리시온 아카다의 아내이다.
그리고 ‘지탑’의 열쇠를 소유하고 있다.
열쇠는 지식과 번영의 상징.
가주도 아닌 그 소유자에게만 권리가 있으니, 지탑의 열쇠를 얻기 위해서는 그녀를 설득해야 할 것이다.
“…….”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헤일로 가문의 별장이 보인다.
아드리안 헤일로의 조카인 셀리아는, 바네사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방계 중의 방계였지만 이제는 아드리안의 양딸이 될 거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녀가 정말 아드리안의 양녀가 된다면 종래의 위치는 나와 비슷할 것이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추고 나는 하인들의 호위를 받아 로젠토의 헤일로 별장으로 들어갔다.
“셀리아 아가씨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오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샤샤 윈체스터 공녀님.”
뒤에서는 마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빗방울을 털고 몸을 정돈하셔야겠어요. 공녀님이 머무실 방을 안내해 주세요.”
마야의 말에 그들은 나를 준비된 방으로 안내했다.
곧 생일 파티의 시작이군. 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아드리안이 셀리아를 위해 준비한 생일 파티는 화려했다.
그는 정무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이 파티의 규모는 아드리안이 얼마나 셀리아를 예뻐하는지 충분히 드러낼 수 있었다.
자신의 삼촌이 헤일로의 가주가 된 뒤, 사교계의 중심으로 떠오른 셀리아는 자신의 파티를 찾은 손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중에는 이모인 라슬라 아카다가 있었다.
“셀리아, 열일곱 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단다.”
그녀는 잘 포장된 선물을 건네었고, 안에는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가 들어 있었다.
셀리아는 조각의 정교함에 감탄하며 라슬라에게 말했다.
“이모님, 감사해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라슬라는 어린 시절 모친을 잃고 혼자 꿋꿋하게 커 온 셀리아를 자랑스레 여겼다.
“생일 축하드려요, 아가씨.”
“축하해요, 셀리아 영애.”
이어서 많은 영애들이 셀리아에게 선물을 했다.
조금 늦게 나타난 샤샤 윈체스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일 축하해요, 셀리아 영애.”
미미하게 눈썹을 굳힌 셀리아가 포장을 풀자 여기저기서 감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슈타르테 광석이야. 귀한 보물을……!”
“그런데 보석보다 윈체스터 영애님이 더 아름다우시지 않나요?”
보석을 보는 셀리아의 눈도 휘둥그레하게 변했지만, 그녀가 보석에서 시선을 돌리자 사람들의 주의가 온통 샤샤 윈체스터에게 쏠려 있는 게 보였다.
아름다운 붉은 드레스를 입은 샤샤 윈체스터는 누가 봐도 하늘에서 선물을 가지고 내려온 여신 같았다.
본디 아름다운 그녀가 건넨 선물이 그리 진귀한 것이었으니 다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샤샤 윈체스터 공녀님이세요.”
“저렇게 아름다운 선물을 주시다니. 부러워요, 셀리아 아가씨.”
셀리아의 입가에서 감탄의 기색이 서서히 가셨다.
기쁜 마음으로 받은 선물들이 어쩐지 모두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샤샤 영애.”
샤샤는 싱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유는 이 애 때문이리라, 셀리아는 생각했다.
참으로 사치스러운 드레스였다. 헤일로의 영토는 사정이 좋지 않아, 생일이어도 변변찮은 드레스를 입을 수밖에 없지만, 샤샤의 드레스는 보석이 셀 수 없이 박혀 있어서 가격을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샤샤는 이내 셀리아의 옆에서 조금 빠져나와 라슬라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샤샤 윈체스터예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우리 남편이 샤샤 양에 대해 관심이 지대하거든요. 아주 특별하신 존재라고…….”
“엘리시온 가주님은 탐구욕이 참 지대하신 것 같아요.”
“맞아요. 어떨 때 보면 골칫덩어리라니까요. 혹시 남편이 영애에게 무례한 부분이 있었다면 대신 사과드려요.”
“그럴 리가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곁귀로 듣던 셀리아의 눈에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잠시 후 그녀는 서늘한 눈으로 샤샤를 힐끔 쳐다보았다.
* * *
“다시 만나 봬어 정말 반가워요, 공녀님.”
일전의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내게 보석을 선물받았던 영애들이 내게 차례로 인사를 했다.
다른 4대 가문의 적녀가 없는 상황에서는 내가 가장 고귀한 신분이었다.
언젠가 셀리아가 장내의 소문처럼 아드리안의 양녀가 된다면 몰라도 말이다.
“공녀님, 그들의 신병을 확보했어요.”
내가 시킨 일을 한 마야는 내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나는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나!”
무도회가 끝날 즈음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라슬라가 창백해진 얼굴로 외쳤다.
“열쇠가 사라졌어요, 분명 목에 잘 걸어 두었는데!”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열쇠란 틀림없이 ‘지탑의 열쇠’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카다의 지탑은 네 탑들 중에서도 상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식과 번영의 보고, 아카다의 지탑에 담긴 지혜는 차마 헤아릴 수도 없다고 한다.
“이모님!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기억 안 나세요?”
황급히 셀리아가 다가와 라슬라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그냥 여러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문득 허전해져서 보니까…….”
과연 라슬라의 목은 휑해 보였다.
“어쩌죠. 지탑의 열쇠라면…… 아카다의 보물일 텐데.”
걱정 많은 영애들이 함께 입을 모아 걱정을 해 주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펴는 셀리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문득 느낀 것은 오묘한 독기. 듣자 하니 사교계에서 셀리아와 정식으로 맞섰던 영애들은 모두 추문에 휩싸여 더는 사교계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셀리아의 찻잔에 독을 넣으려고 하다가 발각되거나, 셀리아의 물건을 훔쳤다가 발각되기도 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와중에 들키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수치스러운 짓.
“모두 이곳을 주목해 주세요.”
셀리아의 말에 시끌벅적하던 파티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영문을 모르는 손님들에게 셀리아는 말했다.
“제 이모님께서 목걸이를 잃어버리셨어요. 습득한 분이 계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웅성웅성한 목소리 속 샤샤는 셀리아를 응시했다.
셀리아는 확실히 또래의 아이들보다 영리했다.
사교계의 적들을 아주 깔끔하게 제거한 전적을 보면 죽은 페르메티스보다도 똑똑할 것이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셀리아는 말했다.
“지탑의 열쇠는 아카다의 가보예요.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가문 간의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헤일로는 심히 곤란해질 테고 그것을 막기 위해 여러분의 몸수색을 해야 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웅성웅성했다.
파티에 초대되어 왔는데 도둑을 의심하여 몸수색이라, 누구든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부디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습득하신 분은 스스로 말해 주세요.”
물론 누구도 반론을 말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의심당할까 염려돼서이겠지.
‘무모하네. 범인을 알고 있지 않다면 말이야.’
도둑을 잡을 수 있다면 모두의 원망은 그 도둑에게 쏠릴 것이다.
몸수색조차 정당한 절차로 치부될 것이고 말이다.
“셀리아 영애, 이건 합당하지 않아요.”
모두가 웅성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항의가 없는 상황에서 나는 소리를 내어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셀리아의 눈썹이 잠시 꿈틀하더니 그녀가 내게 말했다.
“열쇠가 누군가에게 도용된다면 더 안 좋은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요. 저 또한 제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의 명예를 소중히 여긴답니다.”
셀리아의 말에 몇몇 영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지금까지 친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분들 몇이, 셀리아 영애의 명예를 더럽히려다 발각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분명 지금도 그러기만을 바라고 있을 거예요.”
얼마나 잘 꾀어넘긴 걸까. 몸수색을 하겠다고 해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너는 나도 그 정적들과 다름없이 보고 있겠지.’
나는 셀리아의 속내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내 주변을 떠도는 하녀들과 그녀 사이에 어떤 눈빛이 오갔는지도.
‘하지만 네가 집어삼키기에는 나는 너무 크단다.’
셀리아는 내 속도 모르고 말을 계속했다.
“이 일은 헤일로의 일일 뿐 아니라, 아카다의 일이기도 하니까요.”
만약 내가 열쇠 사건의 범인이 된다면, 내게서 아카다의 호의마저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윈체스터의 공녀인 나는 불명예를 안게 되어 철저한 외톨이 포지션으로 밀려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저것 봐, 악독한 윈체스터 같으니.’ 하면서 말이다.
“어떠한 핑계를 대건 무고한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그렇다면…….”
셀리아는 ‘걸려들었다’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자신이 걸려든지도 모르고.
“공녀님부터 결백을 증명해 주시는 건 어떨까요.”
나를 향한 노골적인 지목에 모두가 크게 웅성거렸다.
누가 봐도 지금의 셀리아의 말은 크게 무례했다.
그걸 뒤집을 수 있는 수는 단 하나, 내게서 지탑의 열쇠가 발견되는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