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12화
“셀리아의 엄마이자 제 여동생은 셀리아가 여덟 살 때 병으로 죽었어요.”
나는 발코니에서 라슬라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 애는 결핍을 가지고 자랐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까지나 스스로를 몰아갔을 줄은 몰랐지만요.”
어두운 밤, 정원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일찍 모친이 죽었다고 누구나 그런 식으로 남을 함정에 빠트리지는 않아요.”
내 말에 라슬라의 눈이 흔들렸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나라는 것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나는 심지어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죽었으니까 말이다.
잠시 말을 잃은 라슬라는 복잡한 시선으로 찻잔 안을 응시했다.
나는 조용한 정적 속에서 말을 이었다.
“셀리아는 하녀의 가족을 인질 잡아 나쁜 짓을 시켰고, 하녀를 죽여 증거를 없애려 했어요.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할 거예요.”
“공녀님의 말이 맞아요. 그 애는…… 분명 큰 잘못을 했어요.”
잠시 뒤 라슬라가 입을 열었다.
“아마 오늘의 일이 헤일로의 가주께 알려질 거예요. 그럼 양녀가 되는 계획도 취소되겠죠. 그리고 여러 가문들의 항의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걱정되는 점은…….”
라슬라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윈체스터 공작 전하의 분노예요.”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분께서 공녀님을 매우 소중히 여기신다고 들었어요. 아피니제를 폐지하실 정도로 아끼신다고요.”
다른 약소 가문들의 항의와, 4대 가문 중 하나인 윈체스터의 항의는 다르다.
만약 정말로 내가 라슬라의 열쇠를 훔쳐 발각된 것이라면, 레카르도도 헤일로에 정식 항의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카다의 지혜가 담긴 지탑의 열쇠는 셀리아의 이모인 라슬라의 소유이다. 헤일로가의 양녀가 될 셀리아의 파티에서 벌어진 일이니 헤일로의 명예에도 누가 될 문제였고.
나 하나가 두 가문에 피해를 끼친 것이니 그들은 나와 윈체스터에게 사과를 요구하겠지.
그러나 헤일로의 셀리아가 내게 감히 누명을 뒤집어씌우다 들킨 이 상황에서 윈체스터가 정식 사과를 요구한다면 헤일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은 호전적인 성격의 윈체스터 가문이니, 일이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대체 왜 겁도 없고 철도 없이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셀리아를 죽일 수는 없어요, 공녀님. 염치없지만 용서를 부탁드려요.”
라슬라의 말도 이해가 갔다.
아드리안이 셀리아를 귀히 여긴다고는 하나, 그는 잇속에 밝은 사람이다.
양녀로 들이는 것을 취소함에 더해 사과 선물로 셀리아의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그리고 라슬라는 아카다의 가주 엘리시온의 아내이지만, 이 문제는 헤일로의 일이기에 쉬이 간섭할 수 없다.
“흐음,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 열쇠, 공녀님께 드릴게요.”
나의 말을 라슬라가 끊었다.
라슬라는 결연한 의지로 제 목에서 열쇠가 달린 목걸이를 벗었다.
“……하지만 그건, 아카다의 가보이잖아요.”
네 개의 탑과 네 개의 열쇠.
“맞아요. 그래서 완전히 소유권을 드릴 수는 없지만, 점유권은 드릴 수 있어요. 적어도 저 라슬라 아카다가 살아 있는 동안 열쇠의 행방은 온전히 저의 권한이니까요.”
라슬라의 눈이 일렁였다.
“열쇠가 제 조카의 목숨만큼 귀하지는 않아요. 이 일을 알게 되면 엘리시온이 크게 화를 내겠지만, 그렇다고 아카다의 운영에 해가 되는 건 아니니 이해할 거예요.”
열쇠가 없어도 위대한 4대 공작가 중 하나인 아카다는 잘 굴러가겠지.
“열쇠를 저희가 원치 않는 누군가에게 양보하거나 건네지는 않으시리라 믿어요.”
“…….”
“공녀님께서는 ‘메키우스의 열쇠’라고 들었어요. 중요한 예언의 한 부분인 걸 알면서도, 협조와 함께 다들 견제하는 이유는 공녀님이 ‘윈체스터’이시기 때문이죠. 네 가문의 균형을 파괴하는 것을 누구도 원치 않으니까요.”
라슬라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저는 공녀님이 현명하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파티에서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답니다. 화 한번 내지 않고 불리한 상황을 멋지게 헤쳐 나가셨으니까요. 그러니 이번 일에 대한 공녀님의 자비를 부탁드리며 이걸 받아 주시길 간청드려요.”
잠시 생각하던 나는 라슬라가 내민 열쇠를 받았다.
“아카다의 공작 부인께서 이렇게 간곡히 청하신다면 저로서도 어쩔 수 없군요.”
금색 잔 모양의 열쇠는 다른 두 개의 열쇠만큼이나 영롱하고 정교한 생김새였다.
“언젠가 옳은 일에 쓰고, 돌려 드릴게요.”
내 말에 라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디 그렇게 해 주세요.”
“그리고 셀리아 영애의 일은…….”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제 꾀에 제가 빠진 애를 구해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내 아버지의 분노가 아니더라도 다시는 사교계에서 재기할 수 없는 아이.
목숨을 살리는 자비 정도는 베풀 수 있겠지.
“제가 아버지께 잘 말씀드릴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싱긋 미소 짓자 라슬라는 뒤늦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 * *
“아가씨,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돌아가는 마차 안, 마야는 샤샤에게 조용히 물었다.
“셀리아 아가씨의 생일에 처음 초대되었을 때 제게 말씀하신 거 있잖아요.”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샤샤는 입술을 달싹였다.
“응.”
“샤샤 윈체스터 공녀가 두 탑의 열쇠를 매우 갖고 싶어 한다는 소문을 헤일로에 퍼트리라는 거…… 혹시 다 계획된…….”
“마야.”
조심스레 말을 꺼내던 마야가 흠칫했다.
아직도 볼이 오동통한 세 살의 귀여운 샤샤 아가씨가 눈에 선한데, 맞은편에 앉은 지금의 샤샤 아가씨는 보는 것만으로도 멍해질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지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간식으로 말린 살구를 먹고 싶은데, 있지?”
그러다가도 이렇게 미소를 지으면 세상이 그녀와 함께 미소 짓는 느낌이다.
마야는 금세 제가 물어보았던 것을 잊고 대답했다.
“물론이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잠시 마차를 세우고 마야가 짐칸으로 간식을 가지러 간 사이, 샤샤는 제 인벤토리에 있는 ‘지탑의 열쇠’를 다시 확인했다.
이렇게 인벤토리에 넣으면 분실할 우려가 없어 좋았다.
‘이제…… 하나만 남았네.’
인벤토리를 끈 샤샤는, 다소 심란한 표정으로 새로 생긴 [특별 구역] 버튼을 응시했다.
남은 하나의 습득이 생각만큼 쉬울까?
어쩐지 그렇지 않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나는 에반에게 무사히 헤일로의 열쇠까지 얻었다는 답장을 보내며 테일러스의 열쇠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에반에게서 다시 답장이 온 것은 일주일 후였다.
‘네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으러 가겠다.’
대체 무슨 허락을 받으러 오는 건지, 문맥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어릴 적과 달라진 것 같으면서도 이런 자기중심적 언어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포탄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레카르도와의 저녁 식사 중.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눈을 반짝였다.
“파라메나에 보낸 반역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레카르도의 입술 끝이 피식, 올라갔다.
“너의 공이다, 샤샤.”
레카르도의 칭찬에 나는 기쁜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윈체스터에 도움이 되어 기뻐요.”
“많이 먹거라.”
레카르도는 이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눈짓했다.
확실히 레카르도가 오르테니안을 획득한 이후부터, 그와의 식사에 나오는 음식들이 더 다양하고 진귀해졌다.
자신이 먹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으면서도 그는 내가 잘 먹고 있는지 틈틈이 살폈다.
정말……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느낌이 든다.
내가 오버해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참, 저번에 로웬 경이 시녀장에게 어떤 목록을 받을 거라고 말했는데…… 다시 되물으니 제 말을 피하더라고요.”
나는 문득 생각난 일을 레카르도에게 물었다.
- 이제 데뷔탕트 무도회까지 하셨으니…… 공작 전하께서 승인하시면 시녀장을 통해 목록이 들어올 겁니다.
“아버지께서 승인하시면 제가 뭘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
내 말에 레카르도는 뭔가 떠오른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뒤 입술을 달싹였다.
“가문의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아…….”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것들이니.”
레카르도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 먹거라.”
레카르도는 내게 다시 음식을 눈짓했다.
문득 그가 낮게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감히 제깟 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