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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113화 (113/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13화

[특별 구역의 주인이 당신을 초대합니다.]

알람을 타고 스퀘어로 입장하자, 에반이 보였다.

‘음, 인테리어가 또 바뀐 것 같은데.’

테이블은 대리석으로 바뀌어 있었고, 심플한 느낌의 향초 접시가 보였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고 서 있는 에반의 모습.

나는 그의 앞에 가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가주님.”

에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조금 표정이 딱딱한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이내 눈썹을 굳힌 채로 그가 의자를 빼며 말했다.

“앉아, 샤샤.”

나는 그가 빼 준 의자에 앉았고 이내 에반도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푸딩과 다기가 보였다.

“준비…… 하신 거예요?”

원래 이런 먹을거리까지 구비해 놓지는 않았었는데, 점점 취향이 변하는 걸까.

내 찻잔에 차를 따라 준 에반이 지그시 나를 응시했다.

“마셔.”

얼떨떨한 눈으로 차를 받은 나는 그를 마주 보았다.

“아, 네…….”

차를 마시며 드는 생각은 하나뿐.

‘잘생겼다.’

어쩜 이렇게 잘생길 수 있을까. 이게 남자 주인공 버프란 말인가.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선명히 뻗어 있고 눈매 속 벽안은 차가운 분위기를 풍긴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지만, 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지탑의 열쇠를 구했어요. 저번에 편지로 도움을 주셔서 감사해요.”

에반의 편지로 하녀의 가족들이 어디 갇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백의 기폭제가 되었고, 셀리아에게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게 해 주었다.

“이제 테일러스의 것만 남았군.”

“네.”

에반의 짙은 눈동자 속에 내가 보였다.

잠시 후 그가 입술을 열었다.

“네 개의 열쇠를 모으면 강력한 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은 어디에서 왔지?”

“전에 얼핏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방법이 있어요.”

시스템이니 ‘조합’ 창이니 설명해 봤자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메키우스의 열쇠로서의 특권인가.”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부정하지 않았다.

“아무튼 열쇠를 모으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확신해요.”

“그렇다면…… 마지막 열쇠를 갖기 위해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겨도 감안할 수 있어?”

에반의 말에 나는 잠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테일러스에는 아직 안주인이 없으니 분명 가문의 어른이 열쇠를 관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테일러스의 가주가 테일러스의 열쇠를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해도 분명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겁을 주는 것에는 역시 이유가 있겠지.

“……네.”

내 말에 그의 입술이 열렸다.

에반의 표정은 확실히 굳어 있었다.

“……혹시, 지금 오가고 있는 혼담이 있나?”

그의 저음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담고 있었기에 나는 잠시 흠칫 놀랐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

그 말에 에반의 미간이 더욱 굳는 것 같았다.

뭐지, 긴장이라도 한 것 같은 이 모습은.

에반이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의 짙은 벽안이 조금 일렁이고 있었고 볼 부근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샤샤.”

* * *

그날의 식사 자리는 매우 조용했다.

앞에 호화로운 음식들이 하나둘 차려졌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도 어쩐지 조마조마했고 말이다.

레카르도는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오셀로는 척 봐도 에반을 경계하는 것이 보였다.

진도 오셀로처럼 티 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경계하는 듯한 느낌인 것 같고.

“꼭 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식기를 들고 스테이크를 썰던 레카르도가 입을 달싹였다.

“무엇이지?”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그날 스퀘어에서 에반이 했던 말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네 아버지와 오빠들이 나를 죽이려 하겠지.

- 설마요.

- 틀림없다. 그래도, 각오는 되어 있다.

에반의 저음에는 강한 확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에반의 예측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카르도와 진, 오셀로 모두 눈에서 은은한 살기를 피우고 있었으니까.

에반이 내 옆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불쾌해하는 얼굴.

그냥 같이 설득해야 하기에 내 옆자리에 앉힌 것뿐인데.

그리고 이미 레카르도에게는 사정을 다 말했단 말이다!

에반은 무거운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오늘 제가 윈체스터 저택을 찾은 이유는.”

“……벌레는 죽여야지.”

일순간 눈을 희번덕거리며 오셀로가 말을 끊고 나이프를 날렸다.

나이프는 운 나쁘게 식사 자리를 찾았던 날파리를 죽이고 에반의 옆쪽을 스쳐 벽에 박혔다.

나는 놀라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오셀로, 테일러스가의 가주 앞이다. 예의를 차리도록.”

오셀로의 옆쪽에 앉은 진이 제 나이프 하나를 오셀로에게 소리가 쾅, 나도록 건네었다.

진과 오셀로의 눈빛…… 너무 살벌해.

“그래, 다음번에는 불편할 새도 없이 죽여야지.”

둘이 싸운 거 아니었냐고. 왜 갑자기 죽이 맞는 건데.

에반은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윈체스터 가주를 찾아뵌 이유는, 저와 샤샤 윈체스터 공녀의 약혼을 제안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일순간 무거운 흑염의 기운이 이곳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아피니제 폐지 때 헥토르가 내보이던 위압적인 흑염보다 더욱 거대했다.

레카르도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에반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분명…… 말씀드렸어요. 그런데도 이 모양이네요.’

다짜고짜 에반을 데려와 이런 말을 꺼냈으면 정말 이곳이 날아갔을 것이다.

에반은 침착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공녀께서 필요로 하는 백탑의 열쇠는 테일러스의 원로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열쇠를 건네주는 조건은 단 하나, 가주에게 배우자가 생겼을 때뿐입니다.”

나도 스퀘어에서 에반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약혼하자’니, 심장이 떨어질 뻔했지.

가주가 약혼을 하게 되면 원로회에서 약혼 예물로 열쇠를 넘겨준다고 한다.

혹여 파혼하게 된다면 돌려주어야 하지만, 그 말은 파혼을 하기 전까지 열쇠를 쓸 수 있다는 것!

“아버지께서는 샤샤를 위협하는 아피니제를 폐지하셨어. 그런데 당신은 그깟 원로회 하나도 이겨 먹지 못하는 거야?!”

오셀로는 발끈해서 에반에게 외쳤다.

에반은 오셀로의 말에도 동요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유감스럽지만, 그렇습니다.”

깔끔한 인정의 표현은 오히려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하긴, 에반은 가주가 된 지 고작 일이 주밖에 지나지 않았다.

7년간이나 명계에서 견디느라 가문의 일을 보지 못했을 테고 말이다.

벌써 테일러스 가문의 대내외를 장악했다면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

“언젠가 제 뜻대로 원로회를 주무를 수 있겠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솔직하고 깔끔한 대답이었다.

레카르도의 서늘한 시선이 여전히 에반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레카르도를 향해 말했다.

“에반이 어릴 적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 세상은 악의 화신 페르세토스의 위협을 받고 있어요. 저는 메키우스의 열쇠이고, 제 안에 위협을 이겨 낼 힘이 있다고 믿어요.”

진과 오셀로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했다.

“페르세토스는 제가 두려워하며 주저앉기를 원하겠지만.”

나는 결연한 의지로 그들에게 말했다.

“저는 계속 나아갈 생각이에요. 저는…… 윈체스터이니까요.”

내 말에 오셀로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진 역시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말이다.

형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레카르도가 입술 끝을 비틀었다.

“과정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의지는 인정해야겠지.”

이내 그의 눈에서 에반을 향해 서늘한 기운이 쏘아졌다.

“그러나 종종 남의 순수한 의지를 이용해 발목을 잡으려는 작자들이 있어. 매우 불쾌하게도 말이지.”

레카르도를 응시하던 에반이 시선을 아래로 낮춘 채 입을 열었다.

“저는 공녀의 의지를 존중하며, 혹여 공녀께서 모든 일을 끝내고 난 뒤…… 파혼을 원하신다면.”

에반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뜻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에반의 눈매가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하는 것처럼.

그런데 애초에 위장 약혼 아니었어? ‘원한다’라는 전제가 왜 들어가는 거지?

그 말에 오셀로는 다른 포인트로 발끈했다.

“누가 감히 파혼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야! 당연히 그건 샤샤가 결정할 거라고!”

“같은 말이다, 오셀로.”

진이 곁에서 참견했다.

“제기랄, 알아. 아무튼 열받잖아. 감히 누구 동생과……!”

오셀로는 다시 씩씩대더니 영 불쾌한 표정으로 에반을 노려보았다.

“오셀로의 말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아. 남의 것을 빌리려면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비는 것이 예의인데.”

진 또한 서늘한 살기가 어린 눈빛으로 에반에게 말했다.

“테일러스의 가주께서는 예의가 없군.”

저기요, ‘위장 약혼’이라고 설명했는데 다들 왜 이러는 거야!

“…….”

에반이 이 점을 상기해 줬으면 좋으련만 결혼 허락이라도 받는 것처럼 저 굳은 표정은 뭘까.

그리고 정말 사위나 동생의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아 트집을 잡는 저 모습은…….

현대에 있을 때 내가 종종 보던 K-드라마의 성별 반전 시집살이 풍경과 다를 바 없다.

“아버지, 오빠들.”

나는 분위기 타파를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어쨌든 약혼 진행을 위해서는 가족의 허락이 필요하다.

“저를 믿어 주세요.”

레카르도와 진, 오셀로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에반의 눈도 나를 향했다.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한참의 정적 후 레카르도가 입술을 열었다.

“샤샤.”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지만 긍정의 뉘앙스를 찾을 수 있었다.

“넌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지.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믿는다.”

진과 오셀로는 불만스럽다는 듯 여전히 눈매가 날카로웠지만, 나는 레카르도의 허락에 싱긋 미소 지었다.

나를 향한 레카르도의 눈빛에는 확실하고 분명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잠시 후 레카르도의 시선이 내 옆의 에반을 향했다.

착각이겠지, 따뜻하던 온도가 갑자기 영하권으로 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내 딸은 몸이 약하니.”

레카르도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어후, 추워.

“성의를 다해 받들고 무사히 되돌려보내도록, 테일러스의 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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