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114화 (114/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14화

“지금도 내 목을 따지 못해 다들 안달이니, 진짜 허락을 받는 날에는 목을 잘 씻어 두어야겠군.”

식사 자리를 마치고 나를 데려다주며 에반이 입술을 달싹였다.

“……네? 진짜 허락이라니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내 눈빛에 그는 피식 웃었다.

후광으로 비치는 달빛이 어쩐지 근사해 보인다.

“그럼에도.”

일순간 그가 내게 살짝 상체를 숙였다.

그의 이목구비는 그림자가 져 더 선명해 보인다.

“목숨이 아깝지는 않을 것 같아.”

두근, 두근,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제는 하나뿐인 목숨일지라도.”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며들어 뇌리를 파고든다.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던 나는 겨우 시선을 돌렸다.

심장아, 왜 이러니. 드디어 미친 거야?

* * *

- 아버지, 오빠들. 곧 에반이 올 거예요. 제가 드릴 말씀은…….

샤샤는 네 개의 열쇠를 수집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 개의 열쇠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유일하게 얻지 못한 것 하나는 테일러스 가문의 백탑의 열쇠이다.

“너무 뻔뻔하지 않습니까!! 감히 누구에게 약혼을!! 아직도 못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제의 일이 떠오른 오셀로는 서늘한 분노를 담은 목소리로 레카르도에게 말했다.

“죄다 죽여 버리고 빼앗으면 안 됩니까? 차라리 전쟁을…….”

“오셀로.”

분노를 드러내던 오셀로를, 레카르도가 나직이 타일렀다.

“감정적인 대처는 일을 그르친다.”

레카르도가 눈썹을 찡그리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셀로는 그제야 화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 녀석의 이야기, 정말 이대로 실현되는 겁니까.”

잠시 후 입술이 열리고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페르세토스가 부활해서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이야기.”

일전에 들었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첫 번째 재앙인 바히모스가 오셀로의 어깨를 꿰뚫었던 일이 있었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

레카르도는 눈발이 휘날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또 겨울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윈체스터에게는 가장 익숙한 계절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도 하다.”

레카르도의 말에 오셀로는 움찔 아버지를 보았다.

레카르도의 짙은 눈동자에 서늘함이 감돌고 있었다.

다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미래를 만드는 것은 현재의 무수한 선택이니.”

잠시 뒤 레카르도와 오셀로가 독대 중인 방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자는 진 윈체스터였다.

오셀로는 아는 체를 하려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오셀로를 보는 진의 시선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아버지.”

진은 레카르도의 앞에 섰다.

레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나는 테일러스를 믿지 않는다.”

무거운 음성이 내려앉았다.

“속내가 뻔히 다 드러나는 그 녀석이라면 몰라도, 겉이 희며 속이 새카만 녀석들은 늘 간계를 꾸미지. 그러니, 진.”

“네, 아버지.”

“테일러스에 가기 전까지 네가 샤샤를 훈련시켜라.”

진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 * *

나는 약혼을 위해 일주일 뒤, 에반과 함께 테일러스가로 떠나기로 했다.

귀족 가문끼리 약혼과 결혼을 하면, 약혼은 남자의 집안에서, 결혼은 여자의 집안에서 주관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전에도 아버지의 장례를 조용히 치른 전적이 있는 에반이니 이번에도 그 뜻을 이어 조용한 약혼식을 표방할 예정이다.

우리 가문을 대표해 참석하는 자는 오셀로. 말이 대표이지…… 호위나 다름없다.

뭐, 이건 진짜 약혼도 아니니까.

‘네 개의 열쇠를 얻는다면 내 이능이 강화되는 걸까?’

지난 회차들과 달리 오르테니안을 흡수한 레카르도는 세계관 최강자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명계에 다녀온 에반은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 것 같았으며 진과 오셀로 역시 내가 이전에 푸른 매의 비밀을 통해 본 어느 회차보다 강해졌다.

여기에 내가 이능을 사용하여 그들을 강화한다면…… 페르세토스에 대항할 큰 전력이 될 것이다.

“집중하지 못하네, 샤샤.”

뒤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뒤돌아섰다.

“……오라버니.”

진이 서 있었다.

저 뒤에서 로빈이 어깨를 으쓱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

내 앞에는 훈련용 마물이 있었다.

아카다에서 훈련해서 파는, 슬라임형의 마물로 귀족가의 아이들이 이능을 연습할 때 사용한다.

나는 훈련용 마물을 사용해 훈련한 적은 없었지만, 오늘은 스킬 연습 겸 처음으로 꺼내 놓았다.

“네, 자꾸 다른 생각이 들어서.”

진은 내 앞으로 걸어와 나와 마주 섰다.

“뒤에 서 있는 적을 알아채고 싶어요. 저는 감이 부족해서, 기습을 받으면 당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레카르도나 진, 오셀로는 천장에 달라붙어 있는 적마저 숨을 쉬듯 알아챌 정도로 감이 좋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윈체스터뿐 아니라 모든 가문에서는 이능이 발현하면 지척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는데, 나는 아직 그 감각을 사용하지 못했다.

이능을 가진 자라면 사용할 수 있는 ‘주변시’.

진은 내게 그것을 훈련시키려 하는 중이었다.

“있잖아, 샤샤.”

“…….”

“솔직히 말하자면 세상이 멸망해도 나와 큰 상관은 없다고 생각해.”

진의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짙은 시선에 어쩐지 심장이 옥죄이는 것 같았다.

“나는 소중한 것을 넣은 장식장만으로도 만족하지만, 너는 아닐 테니까…….”

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네 눈은 나보다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으니까.”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멸망하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세상을 잃고 빛을 잃은 너의 눈을 보면 장식장도 위로가 되어 줄 것 같지는 않거든.”

일순간 진의 등 뒤에서 새카만 흑염의 구름이 산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의 이런 힘은 본 적이 없었다.

힘의 농도는 일전의 것과 비교해 다르지 않지만, 기술이 더욱 정교해진 느낌.

“눈을 감아 봐.”

주변에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시야는 이내 검은 흑염의 구름에 덮여 아무것도 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나는 불안했지만 서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본다는 것은.”

진이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늘 생각하는 거야.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진에게 들릴 것 같았다.

진답지 않은 다정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완전히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

서늘한 안개가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장식장에 넣은 것이 너인지, 나 자신인지, 세상인지 헷갈릴 정도로.”

이내 목덜미에 숨결이 와닿았다.

“결국 보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야.”

진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그것은 내 머리를 일깨우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을 더욱 집중했다.

“한 치 앞부터 소유해 봐. 그것이 반경이 되고, 전체가 된다면.”

힘의 흐름과 움직임이 바람처럼 움직이고 있다.

“너는 네가 소유하는 공간의 전부를 볼 수 있어.”

나는 한 치 앞을 느끼려 애쓰며 말했다.

“……사랑 같네요.”

내 말에 진이 대답했다.

“사랑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랑과 비슷한 느낌이에요.”

늘 생각하고, 일부를 통해 전체를 본다.

가족을 향한 사랑, 혹은 연인을 향한 사랑, 어쩌면…… 세상을 향한 사랑.

그리고 다시 찾은 내 삶을 향한 사랑.

놓치기 싫어하는 느낌도, 속박되는 개념도, 내가 생각하기에 사랑과 비슷했다.

‘가슴으로 느껴 보자.’

나는 몸을 편안하게 하고 감각에 집중했다.

사랑은 부자연스럽지 않다.

눈을 감고 있어도 볼 수 있다.

일순간 어째서인지 전에 에반에게 올라타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내가 네 옆에 같이 있을게.

그리고 이에 감응하여 번뜩이는 선명한 벽안.

- 너는…… 네가 한 말에 책임져야 해.

그 벽안은 내가 죽음의 위기에 빠진 순간 나를 향해 절절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이전에도 그는 나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명백히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 시간선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내 머리 위로 떨어지던 화분이 머리 바로 위에서 산산조각이 났던 일.

넘어지려 했을 때 누군가가 손을 뻗어 잡아 주었던 일.

-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나는 그의 벽안을 보지 못했다.

보지 못한다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죽기 바로 직전, 그를 보았다.

‘그게 눈을 뜬 느낌이었던 거야.’

다시 한번 그의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맴돈다.

쿵, 쿵, 쿵.

심장이 뛰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보는 것, 생각하는 것, 소유하는 것.

눈을 뜬다는 것이 사랑처럼 따스하며 깊은 힘이라면.

“…….”

나는 이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였다.

“찾았어요, 오라버니.”

서늘한 안개는 모두 가셨다.

내 앞에 서 있는 진의 짙은 녹안이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스킬 ‘제3의 감각(S/LV.1)’을 획득하였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