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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115화 (115/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15화

내가 찾지 못할 줄 알았던 걸까.

내가 진을 보며 싱긋 웃자 진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일렁였다.

적이 진처럼 힌트를 주지는 않으니, 적을 감별하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걸 어떤 방법으로 식별할 수 있는지 그 느낌을 알 수 있었다.

“…….”

진의 짙은 녹안의 표면에 내 얼굴이 보였다.

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독특한 해석이군. 사랑이라.”

그는 한참 동안 나를 복잡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윈체스터답지는 않아.”

그리고 그 짙은 정적을 끝내며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의 표정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나직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흘러들었다.

“……잘했어.”

나는 진을 보고 싱긋 웃었다.

“윈체스터답지 않다 소리, 그건 빼 주세요. 전 누구보다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윈체스터라고요.”

내 말에 그의 입가에 조금 비틀린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진은 입을 열었다.

“샤샤.”

“네, 오라버니.”

“부디…… 조심해.”

서늘한 명령조의 목소리에는 근심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리고 일순간 선명하게 일어나는 살기 어린 흑염.

나는 그것이 짙어지기 전에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저를 아시잖아요.”

* * *

테일러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화려하고 아름다운 마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에반 테일러스.

190센티미터에 육박한 큰 키의 단단한 몸에 가주의 옷을 입은 그는 7년 전과는 딴판이었다.

‘언젠가 상상했던 원작 속 모습 그대로네.’

어린 시절에는 야생에서 키워진 새끼 야수 같은 눈빛과 행동이었는데, 지금의 에반은 잘 자란 고귀한 귀족 그 자체였다.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미모에 후광이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이다.

에반이 한 발짝 내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그와 함께 테일러스가로 가는 날.

그곳에서 약혼식을 하고 사나흘의 시간을 보낸 뒤, 열쇠를 들고 돌아가면 된다.

“드레스…….”

에반의 입술이 달싹였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잠깐.”

에반은 손을 뻗어 내 소매의 풀린 리본을 잡았다.

“아.”

마야가 한번 확인했는데, 바람 때문에 풀려 버린 모양이다.

에반의 장갑을 낀 손이 내 리본을 깔끔하고 유려하게 매었다.

이내 리본을 다 맨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시선을 내리며 그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에…… 반.”

내 목소리를 들은 그의 손이 잘게 꿈틀하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비켜.”

쿵, 쿵, 소리가 나게 걸어와서 내 옆을 지나친 오셀로는 마차의 문을 벌컥 열었다.

열린 문이 쾅 소리는 내며 부딪치자, 기다리던 마부와 하인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마차에 오르기 전 오셀로가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안 타고 뭐 해, 꼬맹이.”

이 분위기를 기필코 깨겠다는 듯한 표정에 어쩐지 쿡, 하고 웃음이 났다.

에반 또한 비슷한 생각인지 내게 타라는 듯 손짓했다.

“테일러스의 가주께서는…….”

“말을 타고 가겠다.”

하긴, 오셀로와 에반이 같이 마차에 탔다가는 매우 불편한 여행이 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오셀로가 탄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는 꽤 넓고 안락했다.

“퀴퀴한 냄새가 나.”

“응? 사과향밖에 안 나는데?”

“색감은 왜 이렇게 구려? 자재도 싸구려만 썼군.”

“우리 마차랑 내부는 같아 보이는데…….”

오셀로는 마차 안의 모든 것을 트집 잡기에 바빴다.

몇 번 대답해 주던 나는, 내 말은 들을 생각이 없는 오셀로를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짜건 진짜건, 그는 내가 테일러스와 약혼하러 간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았다.

레카르도의 집무실이 있는 북쪽 건물의 창문이 보였다.

그리고 앉아서 나를 보고 있는 레카르도와 눈이 마주쳤다.

“아…….”

손을 흔들 만큼 격 없는 부녀 사이는 아니지, 하고 나는 저도 모르게 흔들려던 손을 내렸다.

고개라도 숙여야 하나 생각했을 때 레카르도의 입술 끝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

레카르도의 미소는 매우 희귀하다.

사냥을 마무리 지을 때, 저세상으로 향할 사냥감에게나 보여 주는 것이 그의 미소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순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가 몸을 돌렸다.

다시 업무를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레카르도의 집무실 안, 문이 열리고 서류철을 든 로웬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왜?”

내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앉자 오셀로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야.”

히히힝-

바깥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말씀하신 대로 아가씨의 약혼 관련 서류들을 테일러스가에 발송했습니다.”

로웬의 말에 레카르도는 고개를 까딱했다.

이내 결재를 앞둔 서류를 책상에 올린 로웬은 잠시 머뭇하더니 레카르도에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

레카르도의 시선이 로웬에게 향했다.

“파혼을 하신다 해도 약혼 이력은 아가씨가 장차 신랑감을 구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겁니다. 그것도 테일러스의 가주라니…….”

누가 테일러스의 가주와 파혼한 이력이 있는 여자에게 감히 들이대겠는가.

“그보다 더 대단한 신랑감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여자의 눈이 어마어마하게 높다는 방증일 텐데 말이다.

“상관없다.”

“……예?”

로웬은 의아한 표정으로 레카르도를 바라보았다.

로웬이 보기에 레카르도는, 겉으로 티 내지는 않지만 딸을 아끼는 아버지였다.

“오히려 세상에 머저리들뿐이라면, 시집보내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

“겨…… 결혼을 안 하게…… 네?”

로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카다의 마법사들을 제외하고 귀족이 결혼을 안 하는 일은 드물었다.

가문에 따라 결혼에 대한 가풍은 달랐지만,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일은 더더욱 드물었고.

샤샤 윈체스터처럼 공작가의 공녀로 곱게 자란 아가씨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에반 테일러스는 최소한의 기준선이다.”

레카르도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 기준선에 못 미쳐.”

그의 머릿속에는 마차에 타서 어색하게 손을 흔들던 샤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 그 녀석보다 못하면 감히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 자격조차 없지.”

“…….”

샤샤의 파혼을 염두에 둔 약혼을 허락한 일에, 혹시 레카르도의 샤샤에 대한 깊은 호의가 변했는지 의심스러웠던 로웬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어째 점점…….

“주제넘은 놈들을 베어 버리는 명분으로도 편하지 않겠느냐. 감히 전 약혼자들보다도 못한 것들이 내 딸을 입에 올린다면 말이지.”

레카르도의 짙은 녹안이 서늘하게 일렁였다.

일전에도 다른 가문에서 온 청혼서를 레카르도가 다 소각시켜 버린 적이 있었다.

외국의 왕족들 혹은 4대 가문의 적당한 청년들로 제국에서 제일가는 신랑감들이었지만 말이다.

로웬은 생각했다.

‘역시 아가씨는…… 평생 혼자 사실 가능성이 높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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