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16화
“난 진부한 게 싫어, 샤샤.”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오셀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흠칫 놀라 오셀로를 보았다.
“응?”
창밖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는 오셀로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기로 예정되어 있는 일들 말이야. 뻔하고 지루한 일들.”
그리고 그 순간 억, 하는 소리와 함께 호위병 하나가 피 묻은 얼굴을 창에 부딪쳤다.
“악!”
나는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오셀로의 팔을 잡았다.
오셀로가 서서히 창에서 고개를 들며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나를 제 품에 끌어당기듯 해서 옆자리에 앉혀다.
쿵, 쿵,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넌 아직도 이런 장면에 익숙하지 못하지.”
사람이 죽는 것에 어떻게 익숙해지겠어.
하지만 이제……
“익숙해져야지.”
내 대답에 오셀로의 눈이 짙게 일렁였다.
[이능이 발현하였습니다.]
“……너…… 누가 함부로 이능 쓰래. 몸도 비실거리면서.”
[대상의 인과율이 높아 이능의 효율이 개선됩니다.]
일순간 오셀로의 몸이 빛에 휩싸였다.
“이미 썼으니까 잔소리 그만.”
“…….”
“다치지 마. 오, 라, 버, 니.”
그는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결국 마차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창밖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이름: 샤샤 윈체스터(LV.16)]
[직업 : 고급 구원자]
[특성 : 메키우스의 열쇠]
[능력치 : 체력 69 / 근력 77 / 이능 91 / 지능 89 / 생명력 72]
[스킬 : 검은 지배(SS/LV.10), 피해 발산(A/LV8), 강령(B/LV.3), 제3의 감각(S/LV.1)]
생명력은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생명력을 보충해 주는 아이템들도 충분했고 말이다.
“그리고 진부하더라도, 저것들을 페르세토스가 보냈다면.”
나는 창밖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한 놈도 돌려보낼 수는 없지.”
8년 만에 적들과의 첫 대치이니, 완벽한 승리를 거두어야 의미가 있다.
지루한 듯한 오셀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닭 잡는 칼로 감자 써는 꼴이군.”
그리고 이내 검에 강력한 오러를 담아 적들에게 휘둘렀다.
“너희들은 죽어 줘야겠다. 꼬맹이의 이능을 헛되이 쓸 수는 없어서 말이야.”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 몇이 장렬히 쓰러졌다.
오셀로는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고 적들은 주춤거렸다.
하지만 잘 훈련된 자들인지 몇몇 이들이 간격을 벌려 자세를 잡았다.
그들의 뒤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습격자들과 한패인가?
“카이사의 저주야.”
말을 타고 돌아온 에반이 바닥에 사뿐히 내렸다.
그래, 어딘가 익숙하다 싶더니.
“…….”
에반은 검을 들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살랑이고, 망토가 뒤로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들고 있는 검끝은 저무는 붉은 해의 빛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번뜩였다.
에반이 검을 휘두르자 선연한 빛의 보라색 상흔이 저주에 걸린 자들을 집어삼켰다.
오셀로 역시 화려한 검술로 적들을 쓰러트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게 꾸물꾸물 기어드는 사내들은 족히 수백 명은 넘어 보였지만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한 놈은 용케 마차의 창문까지 당도했으나, 검은 지배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후우, 끝났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오셀로와 에반이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고 내리라는 듯이.
일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부딪쳤다.
대번에 눈썹을 일그러뜨리는 오셀로와, 태연한 표정임에도 물러남이 없는 에반의 얼굴.
얘들 왜 이래……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누구의 손도 잡지 않은 채 마차 밖으로 깡총 뛰어내렸다.
* * *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누구를 노려.”
우리가 서 있는 지역은 헤일로와 맞닿는 경계 지역이었다.
원래 각 영지들 간의 경계 지역은 치안이 가장 좋지 않다.
“어쨌든 놈들도 처리했고, 시간이 애매하니 쉬어 가는 게 나을 듯한데.”
저무는 해를 응시하던 에반은 오셀로에게 물었다.
“오셀로 공자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길에서 노숙을 할 수는 없으니, 그렇게 하지.”
“그럼 부하들을 보내 쉴 만한 곳을 찾아보…….”
“그럴 필요 없어.”
오셀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태양을 보고 반대 방향을 보더니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에반과 눈을 맞춘 나는 오셀로를 따라갔다.
한참 뒤, 황무지 가운데에 멈추어선 오셀로는 그곳에 있는 돌판에 제 흑염을 불어넣었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흑염이 주입된 돌판이 부르르 떨리더니,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어, 어어억!”
에반의 병사들 몇이 그대로 떨어질 뻔하다가 서로 붙잡아 참사는 면했다.
오셀로는 그들을 보며 사악한 미소를 피식 지었다.
잠시 뒤 완전히 땅이 갈라지자 보인 것은 지하로 이어지는 거대한 통로였다.
처음 보는 석조 통로가 나타나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뭐야, 이게?”
오셀로는 태연히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가 괜히 어둠의 윈체스터인지 알아?”
제국의 악당들과 지하 세력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는, 그들의 지배자 윈체스터.
그런데 정말 지하라는 게 이 ‘지하’를 뜻하는지는 몰랐다.
“네놈들은 지금 본 거 잊어버려. 안 그러면 죽는다.”
오셀로가 에반의 부하들에게 으르렁대자 그들은 땀을 뻘뻘 흘렸다.
“어차피 흑염으로만 작동되는 거 아니야?”
“그냥 협박하고 싶었어.”
오셀로다운 대답이었다.
나와 에반은 오셀로를 따라 지하의 통로로 들어갔다.
우리가 완전히 들어가자 입구가 닫히고, 캄캄해지는가 싶더니 벽에 있던 마석이 전구처럼 차례로 켜지기 시작했다.
“……상상 이상이군.”
뒤에서 에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게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내 말에 에반이 대답했다.
“윈체스터의 지하도가 제국 전체에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규모일 줄이야.”
오셀로는 영 껄끄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멸망 어쩌고 지껄이지만 않았어도, 테일러스의 가주 따위를 여기 데려오는 일은 없었을 거야.”
5분 정도 걷자, 거처로 보이는 돔 형태의 장소에 도착했다.
다섯 개의 문이 있었고, 문을 열면 방이 나왔다.
식량과 모포도 충분했고, 매우 깨끗했다.
어지간한 여관보다 시설은 나을 것이다.
멈추어 선 오셀로는 말했다.
“마을로 가는 건 위험하니 오늘은 여기에서 묵고, 바로 출발하지.”
오셀로의 말이 맞았다.
이미 습격을 한번 당했는데, 이동 동선이 뻔한 마을에 갔다가 괜히 시끄러워지는 수가 있었다.
뭐가 나타나도 에반과 오셀로가 있는 한 큰 위험은 되지 않겠지만, 굳이 떠들썩하게 사건을 늘일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 * *
많은 인원은 필요치 않다는 데 동의했었다.
에반과 오셀로만 해도 성인 남자들 수백…… 어쩌면 그 이상의 전력이었고, 사람이 많을수록 요란해서 눈에 띄니까 말이다.
마야는 당연히 따라오려 했지만 나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두고 왔다.
백날 천날 있을 것도 아니고, 형식상의 약혼 절차를 한 뒤 열쇠를 받아 돌아오면 되는 일.
‘그래도 요리사는 데려올걸.’
하지만 조리실을 보고 뒤늦게 아쉬움이 들었다.
두 가문의 거리는 테일러스의 마차로 사나흘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단기간의 여행을 위한 음식은 대부분 말린 육포와 견과류, 물이 전부였다.
왜냐면 복잡한 음식은 꺼내먹기부터 귀찮았으니까. 하녀들이 얼음 팩에 내 디저트부터 온갖 것들을 싸 준다고 했지만 사양했었고.
“그래도 이곳에는 불도 있고 재료도 있는데 육포만 먹는다는 건 조금…… 아쉽잖아. 빨라도 내일 저녁에나 도착할 텐데, 한 끼 정도는 제대로…….”
지하 거처에는 숙성된 고기와 몇 가지 식재료들이 있었다.
이걸 놔두고 저녁에도 육포만 먹는 것은 영 아쉬운 느낌이다.
문제는 오셀로는 요리를 할 줄 모른다는 것.
- 저장고의 음식도 마석을 사용한 거라 신선할 거야.
에반 역시 검으로 써는 것 빼고는 모르는 듯하고.
호위병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요리를 못하는걸…….”
조리실의 식재료들을 살피던 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때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맞아, 기억 저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