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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117화 (117/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17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억 저장소를 열어 보았다.

흑탑에 있던 수많은 책들은 책의 형태 그대로 내 기억 저장소에 꽂혀 있었다.

그중에는 요리에 관한 책도 있었다.

“찾았다.”

‘특별한 연금술 요리법’ 아카다의 마법사가 썼던 오래된 책이었다.

나는 책을 펼치다가 몇 가지 쉬워 보이는 요리를 골랐다.

살라미 알롱 차우더, 이건 수프 요리 같고…… 숙성 부르스게타?

대충 있는 재료들로 가능한 음식들이었다.

“그럼, 해 볼까.”

우선 시험 삼아 두 개만 만들어 봐야겠다.

* * *

“쉬고 있는데, 귀찮게 왜.”

나는 투덜대는 오셀로를 데리고 조리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휙 뒤돌아서서 오셀로를 반짝이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왜.”

영 딱딱한 오셀로에게 나는 내가 만든 차우더를 내밀었다.

“……뭐야?”

“저장고에 있는 음식들로 만들었어. 써도 된다면서.”

마석으로 꽁꽁 얼어 버린 냉동 해산물을 녹이는 데 꽤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요리는 성공적이었다.

“많이 만들었는데, 맛이 어떤지 궁금해서.”

“간 봐 달라고 부른 거야?”

오셀로는 수프 그릇을 받아 들며 물었다.

“내 첫 요리인데, 오빠가 봐 줘야 하지 않겠어?”

오셀로가 눈썹을 꿈틀했다.

그가 심술궂게 거절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오셀로는 심술을 덜 부리는 경향이 있으니까.

“……첫 요리를 무슨 이런 데서 해.”

투덜거리면서도 오셀로는 스푼으로 수프를 떠서 입에 가져다 댔다.

나는 오셀로의 표정을 관찰했다.

잠깐 눈썹을 찡그린 오셀로는, 한 번으로는 모르겠는지 한 번 더 떴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좋지도 않고.”

칭찬을 기대했던 나는 조금 맥이 빠졌다.

난 요리에는 큰 소질이 없나 보다.

“그런데 요리법은 어떻게 알았어? 첫 요리라면 다른 곳에서 해 본 적도 없을 텐데.”

“흑탑에서 봤던 요리책을 떠올려서.”

“흑탑에서?”

오셀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흑탑에 실용 서적 따위는 없을 텐데. 죄다 특별한 서적들뿐이라고.”

“아니야. ‘특별한 연금술 요리법’이라고 아카다의 마법사가 쓴 요리책이 있었어.”

“마법사 이름은.”

나는 아까 보았던 마법사의 이름을 떠올리며 말했다.

“파라티온 아카다.”

“……뭐…… 뭐라고?”

“파라티온 아카다의 특별한 연금술 요리법.”

쨍그랑-

오셀로는 들고 있던 차우더 그릇을 떨어뜨렸다.

그릇 깨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오셀로! 왜 그래?”

나는 놀라 굳은 채 서 있는 오셀로에게 물었다.

“그건 평범한 요리책이 아니야. 너, 파라티온 아카다에 대해 들어 보지 못했어?”

“아카다의 12대 안주인이잖아. 측량법 개량 업적이 있고, 테일러스와의 영구 평화 조약을…….”

“그거 말고, 사생활.”

오셀로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국에도 가십지가 있기는 했고, 역사적 가십을 모아 놓은 책도 있었지만 신뢰성이 별로라 읽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재차 말했다.

“저자의 사생활이 뭐가 중요해. 평범한 요리책이었다고. 이상한 재료를 넣으라는 말은 없었어.”

“주문은.”

“주문은…… 있긴 했지. 효과를 더하는 주문이라고, 에시 아나쟈이타 루프론…….”

마법사가 쓴 책이니 그런가 보다 했다.

오셀로는 천천히 제 미간을 짚었다.

오셀로의 입술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기랄.”

한 손을 가슴에 댄 그의 얼굴이 붉었다.

* * *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살벌한 허락까지 받을 필요는 없었을 것 같아요.”

마차에서 내린 나는 오셀로를 힐끔 보고 말했다.

“아니, 그래도 허락을 받아야 했으려나요. 딸이건 아들이건…… 약혼은 역시 중요하니까요.”

발끈한 오셀로의 눈썹 끝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샤샤, 너!”

평소보다 조금 얇으나 여전히 말투가 거친 목소리가 오셀로의 입에서 쩌렁쩌렁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들고 있는 부채로 오러라도 날릴 기세였기에 나는 그만 놀리기로 했다.

“……후…….”

오셀로가 피곤한 표정으로 눈앞의 테일러스 저택을 응시했다.

그리고 지금 오셀로의 모습은…….

“뭘 봐, 이 자식들아. 눈을 다 파내 버릴 테다.”

오셀로를 힐끔거리다가 볼을 붉힌 호위병들이 일제히 눈을 돌렸다.

“샤샤 윈체스터의 성격이 괄괄하다는 소문은 없어. 내 부하들은 입이 무겁지만 괜한 말이 나돌았다가는…….”

에반이 입술을 달싹였다.

“헛수고가 될 수 있으니 자제했으면 하는군.”

“맞는 말이긴 한데 당신 입에서 나오니 왜 더 열이 받지? 정말 죽여 버리고 싶은데?”

그럴 만도 하다.

오셀로는 지금 나 대신 드레스를 입고 있으니까.

가주의 남편이었던 파라티온 아카다는 여장을 즐기는 취향이었다고 한다.

그냥 여장을 하는 데에 더해 일시적으로 골격을 여자처럼 보이게 해 주는 약까지 개발했다고 한다. 머리카락도 급속도로 자라게 하고.

내가 멋모르고 만든 요리의 효과는 7일간 지속된다.

테일러스에서 머무는 기간과 비슷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했다.

오는 길에도 습격을 당한 것을 보면 테일러스의 저택에서도 내게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 골격이 여자 같아진 오셀로가 내 대신 샤샤 윈체스터의 행세를 한다.

대신 나는 이 청색 무복을 입고, 에반이 우연히 스카웃한 기사 역할을 하고 말이다.

- 테일러스의 원로들은 공자와 공녀의 생김새를 몰라. 그러니 속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레카르도의 용모는 알려져 있고…… 오셀로 공자 역시 그와 충분히 닮았으니.

체구가 줄어 170센티미터 정도가 된 오셀로의 모습은 나보다도 더 레카르도의 딸 같아 보였다.

염색은 귀족 여인들 사이에서 꽤 흔했으니 은발에 꽃물을 들인 듯한 연분홍빛의 머리카락도 의심을 살 일은 없을 테고.

요염하리만큼 날렵한 턱선에 높은 콧대와 도도하고 거만한 눈매. 누구라도 반할 만한 경국지색의 미모이다.

“그…… 많이 싫으면 그냥 내가 할게. 억지로 하지 않아도…….”

“어떤 개자식들이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에 널 밀어 넣으라고?”

“원래 그럴 계획이었잖아.”

“하지만 대안이 생겼잖아. 기분이 X 같긴 하지만.”

오셀로는 거친 언어로 짜증을 표하면서도, 이게 내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내 내게 살짝 얼굴을 들이댄 오셀로가 협박하듯 말했다.

- 꼬맹이 너, 나에게 평생 감사해.

서늘한 눈빛과 목소리가 뇌리에 꽂혔다.

‘응, 언니’ 하고 대답하려다가 후환이 두려워 참았었다.

오셀로는 앞서 걸었다. 드레스가 거치적거린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면서.

“성격적으로는 위화감이 없을 거 같군. 전통적인 윈체스터가 여자들과 크게 다름이 없어.”

에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통적인 윈체스터가의 여자들은…… 보통 이런 성격인 모양이다.

테일러스 저택 앞에는 흰옷을 입은 나이가 많은 남자 한 명과, 갑옷을 입은 기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저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심복이자 내 숙부, 홀스 테일러스.”

“아…… 본 적 있어요, 에반이 보여 준 기억에서.”

질이 좋은 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설에서의 에반은 저자의 비리를 밝혀내고 내쫓았으며, 이후의 다른 회차들에서도 빌런에 가까운 역할로 나왔었다.

“7년간 명계에 있느라, 이번에는 숙청하지 못했군요.”

“아마 일을 꾸밀 거다. 내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가주직을 먹어 치웠을 테니.”

이런 상황에서 기세등등한 윈체스터 공작가의 공녀와 약혼하는 에반이 곱게 보이지 않을 터.

“샤샤 윈체스터는 흑염의 이능을 발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으니, 누구를 공격할지는 정해져 있을 테고.”

‘오셀로에게 제대로 박살이 나겠군’도 정해져 있는 결말일 것이다.

“#@$%%!”

홀스가 제 대머리를 숙이며 인자하게 인사를 했지만, 앞서간 오셀로는 뭐라고 짜증만 내고 휙 돌아섰다.

“숙부님, 제 약혼녀 샤샤 윈체스터 공녀가…… 피곤한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가주님. 어쨌든 먼 길 수고 많으셨습니다. 루크, 방을 안내해 드리게.”

루크라고 불린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오셀로의 방을 안내했다.

“공녀님께서 오셀로 공자님을 참 많이 닮았군요. 하마터면 착각할 뻔했습니다. 그런데 뒤에는 못 보던…….”

나를 향해 홀스의 눈이 기민하게 빛났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지나던 마을에서 재주가 있는 듯해 들인 자이다.”

“무인이요? 그렇다기에는 어려 보이는데.”

“보이는 것과 속은 다르지. 내가 인정한 자입니다.”

에반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에반의 말에 루크는 흠칫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윈체스터 공녀의 보호에 주의를 기울이게.”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약혼의 목적은 윈체스터 가문과 테일러스 가문의 오랜 반목의 해소.

그러니 정치적으로 중요한 명분이 있는 약혼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래야죠, 가주님.”

그나저나 오셀로…… 정말 괜찮을까.

점점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창 쳐다보고 있을 때, 에반이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도 이만 들어가지.”

“……우리요?”

눈을 한번 깜빡인 내게 에반은 조금 더 가까이 얼굴을 대고 속삭였다.

“그대는 내 기사이니, 나와 함께 있어야지.”

에반의 입꼬리 끝이 미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시원한 향기가 코끝으로 흘러들며,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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