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18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샤샤 윈체스터 공녀’를 준비된 방에 안내하고 온 루크는 홀스에게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차를 마시던 홀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일전에 샤샤 윈체스터 공녀를 본 적 있습니다. 아마 두 살쯤 되셨을 때…… 제가 전대 가주님을 따라 메치스 소년 사냥 대회의 무도회에 갔을 적에 말입니다. 그런데 분명 저렇지 않으셨던 기억이 나는데…….”
“멍청하긴!”
홀스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헛소리를 하나 들어주려 했더니 두 살 때와 지금의 모습이 달라? 당연하지! 네놈은 두 살 때 세 걸음에 한 번씩 바닥에 코를 박았을 것이다. 애가 그대로 큰다고 생각하느냐.”
“……아…….”
“물론 재수 없는 에반 녀석은 태어날 때와 지금이 놀랍도록 똑같지만.”
루크는 고개를 숙였다.
홀스의 말이 맞는다.
고작 두 살 아이가 열여섯으로 알려진 지금까지 비슷한 외모일 리는 없다.
하지만 기사로서의 어딘가 설명할 수 없는 감이 있었다. 자라며 변화한 것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이 순간 성격 괴팍하던 윈체스터가의 둘째 공자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얼굴이 닮긴 했지만…….
‘말도 안 되지.’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이내 홀스의 매서운 목소리가 들렸다.
“네놈은 허튼 생각 하지 말고 계획이나 잘 실행해라.”
“알겠습니다. 제아무리 성격 나쁜 윈체스터가의 공녀라고 해도, 테일러스라면 치를 떨고 질겁할 만하게 만들겠습니다.”
홀스의 입술이 쭉 찢어져 위로 올라갔다.
체노아 테일러스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에반 테일러스가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가주의 자리에는 저 새파란 녀석이 아니라 자신이 앉아 있을 것이다.
가주의 자리를 차지함에 더해, 어떤 수를 썼는지 윈체스터의 공녀까지 꼬드겨서 약혼을 하려 한다.
윈체스터와의 관계가 끈끈해진다면 에반의 가주직은 더욱 공고해질 것.
그러니, 반대로 윈체스터와 척을 지게 만들면 된다. 공녀는 사생아 출신이라고 해도 꽤 사랑받고 있으니, 공녀가 다친다면 윈체스터 공작이 가만있지 않겠지.
그때 에반의 책임을 물어 그를 밀어내면 된다.
‘완벽한 계획이야.’
홀스의 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 * *
에반의 집무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레카르도의 집무실은 자주 갔었지만, 테일러스가 가주의 집무실은 처음이었다.
책장에는 책이 빽빽이 꽂혀 있고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햇볕도 정면으로 들어오고 말이다.
“…….”
문득 나는 에반의 시선을 느끼고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선명한 벽안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의 정적…… 어색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반이었다.
“아버지께 푸른 복종을 사용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흠칫한 표정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푸른 복종…… 에반의 과거 회차들을 본 나는 그 기술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1년 전 이미 기가 다해 의식이 소멸하셨으나, 푸른 복종으로 이어진 끈을 통해 내가 명계에서 돌아올 때까지 억지로 수명을 연장시켰어. 그러지 않았으면 가주직은 이미 홀스에게 넘어갔을 거다.”
사람의 의지를 가두고 제게 복종하게 하는 무서운 기술이다.
여기에서 꽤 많이 엇나가게 되면 시체를 조종하는 ‘카이사의 저주’가 되는 것이고.
“이전의 회차들에서도 여러 번 사용했었지. 패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에반이 체노아에게 처음으로 ‘푸른 복종’을 사용했던 때가 9회차일 것이다.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던 아버지가, 어느새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질투한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한 번 깨어진 신뢰는 다음 회차부터는 경계로 바뀌었다.
세상에 그 무엇도, 자신조차 믿지 못했던 에반의 슬픈 과거…… 그리고 현재이기도 하다.
“무수한 상황들 속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사람의 인격을 만들더군. 아직도 궁금하기는 해, 내 아버지는 어떤 자일까.”
에반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손아래, 체노아가 사용했을 두꺼운 책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거겠지.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에반의 말대로 환경이 인격을 만들긴 하죠.”
내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에, 에반은 눈썹을 움직였다.
“내 상황이 극악했어도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 있었을까,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거든요.”
“…….”
“지금은 어지간한 보석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지만, 매 끼니 먹기 위해서 고군분투해야 했던 때도 있어서.”
에반의 짙은 시선이 나를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환생하기 전 삶을 떠올렸다.
부끄러움 없이 살려 노력했지만, 열등감과 탐욕은 가난과 함께 딸려왔었다.
내가 윈체스터가의 딸인 샤샤 윈체스터가 아닌 한미하고 가난한 가문의 딸로 환생했더라면 성격이 달라졌겠지.
환생 전과 지금의 마인드가 많이 바뀐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성격이 바뀌었다고, 그 사람이 아닌 건 아니잖아요. 못되고 불완전한 모습도 여전히 나인걸요.”
내 말에 에반의 눈이 짙게 일렁였다.
“스물여덟 회차의 체노아 가주님은, 스물여덟 번 모두 체노아 가주님이었어요. 에반을 질투해 엇나갔을 때도 있지만…… 좋은 기억도 있잖아요.”
나는 3회차와 4회차 때의 체노아 가주를 떠올렸다.
15회차와 19회차의 모습도 떠올렸고.
에반이 예기치 못하게 큰 부상을 당하자 체노아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었다.
어린 에반을 위해 베루스 회의 도중 뛰쳐나가기도 했었고.
일부의 회차에서 체노아는 아버지다운 아버지였다.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태풍이 되는 나비 효과처럼, 작은 균열에 내면의 중심을 잃고 크게 휩쓸리는 성격이어서 그렇지.
“죽은 자가 산 자에게 해명할 수는 없으니, 그 스물일곱 번 중 어떤 기억들을 추억할지는 가주님의 몫이 아닐까요?”
그의 입술 끝이 조금 올라갔다.
“……그렇군.”
한참의 정적이 흘렀다.
괜한 말을 했나 쑥스러워질 무렵, 에반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대와 대화하고 있으면 신기한 기분이 들어.”
나는 흠칫 에반의 눈을 보았다.
“미워하지 않게 해 주거든, 미워한다고 여기는 사람을, 그리고 미워할 자격이 있다고 믿어 왔던 사람들조차.”
그의 짙푸른 눈동자의 표면에 내가 담겨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미움은 저주 같은 거잖아요. 원치 않는데도 사람을 조종하는.”
내 말에 에반의 입술 끝이 옅게 위로 올라왔다.
기분 좋은 느낌이 드는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 들린다.
“회의감에 빠져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청명을 재건했지. 그에 더해 내게 무수히 걸려 있는 저주를 풀고 있군.”
“…….”
“한때는 나를 이끌 메키우스의 마지막 가호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에반이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그와의 거리가 좁혀지는 만큼 심장의 속도가 빨라졌다.
서늘한 눈매 속 짙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가 되어 버렸어.”
잠깐의 침묵을 뚫고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유? 무슨 이유를 말하는 걸까.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이다.
에반의 유리잔처럼 차가운 톤의 흰 피부가, 조금 붉어 보이기도 한다.
일순간 에반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그의 목울대가 크게 한번 움직였다.
잠시 뒤 눈썹을 굳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젠가 페르세토스를 패배시키게 된다면…….”
에반의 손이 내 어깨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진지한 눈빛에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던 그 순간,
퍼어엉-!
바깥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려 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에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시작했나 보군.”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 * *
홀스는 루크를 통해 모집한 네 명의 자객을, 이 계획에 써먹을 예정이었다.
하녀에게 이끌려 테일러스 저택 외곽부를 산책하던 샤샤 윈체스터를 외부의 사내들이 습격한다.
사내 하나는 샤샤 윈체스터의 소지품을 다 털고, 다른 한 명은 그녀를 구타한다.
그녀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여운 말 샤샤 윈체스터는 세상을 잃은 비련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에반 테일러스는 제 약혼자를 지키기는커녕 제 저택의 영역조차 관리하지 못해 가문에 윈체스터의 위협을 불러온 공적이 될 것이고…….
여기서도 저기서도 비난받고 책임을 요구당하다 보면…….
“내 자리가 되는 거지.”
홀스는 망원경이 설치된 발코니에서 자신의 계획이 실현되는 것을 느긋이 감상하기로 했다.
“음…… 하녀를 따라 나가는군.”
과연 눈썹을 찡그린 채 윈체스터 공녀가 외곽부로 가는 것이 보였다.
남쪽의 외곽부는 숲과 접해 있었다.
“숙녀로서의 기품 따위는 배우지도 못한 천박한 걸음걸이야.”
사내들처럼 과격한 걸음걸이에 드레스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홀스는 혼잣말을 했다.
윈체스터 공녀가 하녀에게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잠시 뒤 하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무슨 말을 나누는 거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리 준비해 둔 네 명의 자객들이 나타났다.
몰락한 하급 귀족 출신 자객들은 이능을 사용할 수 있는 A급 자객이었다.
홀스의 사재에서 상당액을 털어야 할 만큼 비쌌고, 아마도 비싼 값어치를…….
“……웃고 있어?”
자객을 대면한 윈체스터 공녀의 얼굴을 살피던 홀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뻔히 칼 차고 나타난 수상한 남자들의 모습에 저리 입술 끝을 잔뜩 올리며 웃다니.
“미친 여자가 틀림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