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20화
에반의 벽안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테일러스 가문의 원로회장, 원탁에 앉은 원로들은 다들 벙찐 얼굴이었다.
온몸이 꽁꽁 묶인 홀스가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옆에는 루크 역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는 에반의 곁에서 지금의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고, 오셀로는 광기 뒤섞인 살기가 흐르는 눈빛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히이익!”
그가 잠시 고개를 든 홀스를 내려다보자 바르르 몸서리를 치는 것이 보였다.
홀스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얼마나 얻어맞은 건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나마 목숨이라도 건진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하나.
“원로회장 홀스 경은 자객을 써서 내 약혼녀에게 해를 가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가주의 권위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에반이 싸늘하게 원로들을 응시했다.
“전대 가주 시절부터 각고의 노력으로 윈체스터 공작가와 평화를 유지해 온, 테일러스 공작가 전체에 대한 반역입니다.”
그 말에 홀스가 억울하다는 듯 퉁퉁 부운 입술을 열었다.
“다…… 다, 테일러스가를 위해서였습니다! 어릴 적 윈체스터의 볼모로 있다가 감화된 가주가 윈체스터에게 가문을 홀라당 팔아넘길지 누가 압니까!”
원로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홀스는 웅성거림에 용기를 얻었는지 사람들을 선동했다.
“저…… 저…… 윈체스터의 공녀도 수상합니다. 분명 흑염을 다루지 못한다고 했는데, 흑염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그리고 나도 죽이려 했습니다! 성질이 무시무시한……!”
“뭐? 이 새끼가!”
오셀로의 눈에 불이 번뜩했다.
오셀로의 과격한 언사에 원로원들이 흠칫한 순간, 에반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
찬란한 청명의 광휘가 깃든 검에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휴…… 나이스 타이밍.’
흥분한 홀스마저도 겁은 집어먹은 듯 흠칫했다.
에반이 홀스의 곁에 선 루크에게 검을 겨누고 물었다.
“내 아버지이자 전대 가주인 체노아 테일러스의 부관이었던 그대가 대답하라. 그대의 선조부터 대대로 일생을 바쳐 테일러스 공작가를 지켜왔던 그대 집안의 긍지를 걸고.”
‘선조’라는 말이 나오자 루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홀스 테일러스는 죄가 없는가.”
무거운 정적이 회의장 내에 흘렀다.
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루크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홀스 테일러스 백작은 자객을 통해 윈체스터 공녀를 해하려 했으며, 하녀를 통해 그녀에게 가문의 독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말에 홀스는 떠지지도 않는 눈을 부릅뜬 모양으로 외쳤다.
“루크! 네가 감히!”
“본래 홀스 테일러스는 전대 가주께서 돌아가신 뒤 본인이 가주직을 차지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주께서 돌아가시기 전 현 가주께서 돌아오시며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제게 자신의 계획에 동조할 것을 강요하셨습니다.”
루크는 마침내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내의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돈이 필요해서…… 기사의 긍지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벌해 주십시오.”
“다 거짓이다!! 거짓이야!”
오셀로는 다 끝났군, 하는 표정으로 도도하게 부채를 부쳤다.
그래, 열 좀 가라앉히라고.
원로들 역시 더 볼일 없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에반은 입술을 달싹였다.
“원로회의 이의가 없다면.”
꿇어앉아 에반을 보는 홀스의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에반의 청명하고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 이 시간부로, 테일러스 가문에서 홀스 테일러스와 그의 직계 가족을 제명한다.”
홀스는 충격을 받은 듯 한참 동안 멈추어 있었다.
에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테일러스가의 가주, 에반 테일러스의 권한으로.”
자리에 있던 모든 원로들은 아무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땀을 흘리는 자도 있었지만, 감히 입을 열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은 알 것이다.
원로회를 이끌던 수장 홀스 테일러스가 오늘 새 가주에 의해 제명되었다.
완벽한 증좌와 증인을 통해서 말이다.
에반이 새로운 가주가 된 후 원로회장의 제명, 이것은 새로운 권력의 증명이었다.
“이…… 이럴 수는 없소. 이럴 수는…….”
“…….”
“나는 홀스 테일러스란 말이오! 체노아 테일러스의 동생이자 저 에반 테일러스의 숙부! 제명이라니! 제명이라니 말도 안 돼!!”
한참 뒤 정신을 차린 홀스가 반항했지만, 기사들에 의해 끌려갔다.
에반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홀스의 반역에 가담한 기사단장 루크 바리아스는.”
갈 길 잃은 루크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어떤 처분이 있든 감내하겠다는 표정 같아 보였다.
“석 달간 감봉에 처한다.”
파격적으로 가벼운 징계에 원로들이 웅성댔다.
루크는 당황한 표정으로 에반을 올려다보았다.
에반은 서늘한 눈빛으로 루크를 응시하고 있었다.
* * *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겉멋만 잔뜩 든 에반 테일러스 자식.”
오셀로의 중얼거림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루크를 용서해 준 일?”
“나라면 채찍을 때리고 발가벗겨서 저택 밖으로 내쫓았을 텐데. 한 번 주인을 배신한 자가 두 번 배신 못할 리가 있나.”
오셀로의 관점에서는 에반의 처분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윈체스터에서는 지은 죄보다도 과중하게 갚아 주는 경향이 있으니 더더욱 말이다.
나도 처음에는 조금 놀랐지만, 생각을 해 보니 이해가 되는 점도 있었다.
“글쎄, 에반은…… 루크의 주인이었던 적은 없잖아.”
나는 제멋대로 걸어 구겨지는 오셀로의 드레스 자락을 펴며 말했다.
오늘은 약혼일, 명목상으로 나는 윈체스터 공녀를 약혼식장으로 모시고 가는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루크 역시 칠 년이나 보이지 않던 에반에게 정 붙일 새도 없었을 테고…… 소중한 사람이 아픈 건 아무리 소중한 긍지라도 흔들릴 만큼 큰일이라고요.”
가문의 실권이 거의 홀스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루크는 자신의 아내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몸을 의탁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에반이 나타났으니 중심을 잡기 힘들었겠지.
기사로서 큰 실책이었지만 나중에 진실을 실토한 것을 보면 그는 긍지를 소중히 여기는 자였다.
내가 아는 에반이라면…… 사리에 밝은 에반이라면 그의 아내를 도와 줄 것이다.
그는 이번 용서와 자비로, 루크 바리아스라는 오랜 충신 집안의 기사를 완전히 제 사람으로 얻을 것이다.
이전의 회차에서 언제나 루크는 가문의 충성스러운 기사였다.
“약해빠졌어, 샤샤.”
오셀로의 핀잔에 나는 미소 지었다.
“그래도 그런 네 모습이.”
문득 오셀로가 나를 바라보았다.
오셀로의 얼굴은 잠시 멍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런 얼굴을 가진 여자라면 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싫지 않은 이유는 뭘까.”
긴 속눈썹 아래, 달빛을 받은 녹안이 일렁였다.
그 목소리가 들리고 한참 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볼에 따뜻한 열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나도…… 오빠가 좋아. 처음에는 완전히 고집쟁이였는데, 지금은 그래도 사람 말도 좀 들어 주고…….”
나는 걸음을 옮기며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리고 말을 이으며 오셀로를 돌아본 순간 놀랐다.
옆에서 걷던 오셀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배를 잡고 쭈그려 앉은 오셀로가 보였다.
“오빠!!”
오셀로에게 달려간 나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얼굴이 유독 창백해 보였다.
독인가? 아니, 테일러스의 독은 이미 내성이 있어서 들지 않는댔는데.
그럼 대체 왜……!
잔뜩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내게 오셀로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샤샤…… 윽…….”
오셀로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잠깐만 버텨, 사람을 불러올게.”
“아니야, 안 돼.”
오셀로가 다급히 나를 말렸다.
“큭…… 아픈 게 아니야. 지금, 문제가…….”
* * *
“약혼식인데, 윈체스터의 공녀께서 조금 늦으시는군요.”
가주의 약혼식에 참석한 테일러스의 혈족들은 여전히 들뜬 분위기였고, 원로들은 공녀가 나타날 입구를 몇 초에 한 번씩 힐끗거렸다.
날이 저물었는데도 공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홀스의 뒤를 이어 새로 뽑힌 원로회장은 가보 상자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백탑의 열쇠’, 이는 훌륭한 약혼 예물이 될 것이다.
간만에 저택을 찾은 가문의 혈족들에게서 인사를 받던 에반은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오오.”
원로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울리는 무도회장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뎅- 뎅- 뎅-
“…….”
아름다운 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은색의 베일을 걸치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베일로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제게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에반은 뭔가에 얻어맞은 듯 멈칫하더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조금 위태로운 듯한 걸음걸이였지만, 이전과의 차이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뎅- 뎅- 뎅-
영롱한 소리의 종이 느린 속도로 세 번 더 울렸다.
자신의 바로 앞에 다가온 그녀의 모습에 에반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뎅, 하고 종이 다시 울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잠시 휘청였다.
에반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지탱했다.
뎅, 하는 마지막 종소리와 함께 베일을 사이에 두고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
“…….”
종소리가 끝났음에도, 에반의 귀에서는 뎅- 하는 소리가 한 번 더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