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21화
레시피대로 요리를 했다고 해도 첫 요리라서, 당초에 레시피 고안자가 의도한 만큼 긴 효과를 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셀로의 몸은 급격히 다시 남자의 몸으로 돌아갔다.
드레스의 허리선과 어깨 부분이 장렬히 찢어지는 소리가 났고, 경국지색의 미모는 어엿한 남자의 얼굴로 바뀌었다.
- 돌아왔군, 하하하! 드디어 돌아왔어!!
물론 오셀로는 매우 기뻐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오늘이 바로 약혼식 날이라는 것!
이미 오셀로의 얼굴을 본 자들이 많아서 ‘사실은 제가 진짜였어요.’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 좋아할 때가 아니야. 여기까지 온 보람도 없게 된다고.
- ……제기랄. 그건 그렇군.
그러던 순간 어디에선가 날아온 천 조각이 오셀로의 얼굴을 덮어 버렸다. 오셀로는 그것을 바로 뗐지만 그 모습에 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 ……방법이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이렇게…….
“…….”
두근, 두근,
“…….”
급하게 다시 기운 드레스를 입고 베일을 쓴 채 내가 나타나게 되었다.
오셀로가 여자로 변했을 때의 키는 나보다 훨씬 컸기에 높은 구두까지 신어야 했고, 익숙하지 않은 구두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다가 에반에게 안겨 버렸다.
에반은 나를 알아본 듯 흠칫한 모습이었다.
짝짝짝-
주변에서 우리의 약혼을 축하하는 박수와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베일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에반의 시선은 베일 속을 꿰뚫어 보듯 나를 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잠시 후 에반은 힘을 실어 나를 지탱해, 다시 똑바로 설 수 있게 해 주었다.
테일러스 혈족들의 무수한 시선이 느껴졌다.
우리의 앞에는 커다랗고 화려한 3단 케이크가 보였다.
아름다운 초와 꽃 장식, 약혼식에 어울리는 케이터링…….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르며 주목받은 적 있었기에, 잘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긴장되었다.
내 곁에 에반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짜이기는 해도 이게 ‘약혼식’이기 때문일까.
일순간, 긴장해 있던 내 손을 에반이 스르르 잡았다.
“……!”
나는 움찔 놀라 에반을 바라보았다.
에반의 입꼬리 끝이 옅게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이내 그의 입술이 나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달싹였다.
“……예뻐.”
“…….”
화르륵, 다시 얼굴에 화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이건 분명 가짜 약혼식이다. 백탑의 열쇠를 얻기 위한 절차 중 하나. 그런데 왜 이렇게 진짜 같은 느낌인 걸까.
에반은 왜 그런 진지한 눈으로 나를 보는 거고.
그래, 다 에반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긴장한 와중에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두근- 두근-
우선 지금은 들키지 않고 약혼식을 마치는 것에 집중해야지.
이내 에반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약혼을 축하하는 자리에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반의 말에 다시 박수가 쏟아졌다.
“경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가주님!”
어둠의 기일에서 보던 윈체스터가의 혈족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이다. 윈체스터의 혈족들이 대부분 우중충하며 새카만 느낌이었다면, 여기 사람들을 고대 로마 사람들처럼 대체로 하얀 의상과 활기찬 표정을 했다.
이래서 ‘빛의 테일러스’ 가문인가.
“윈체스터가의 공녀님 말이야. 엄청 아름다우시다는데 베일을 쓰고 나오셨네.”
“얼굴 궁금하다아…….”
꼬마들이 기대를 품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성격은 엄청 무섭대. 마녀처럼…….”
“맞아, 윈체스터 사람들은 뿔이 달렸댔잖아!”
“헉, 설마아.”
오셀로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널리 퍼졌나 보다.
이내 나는 에반의 손에 이끌려 가보 상자를 들고 있던 원로회장의 앞에 섰다.
긴 레드 카펫이 우리의 뒤로 이어져 있었다.
약혼을 축하하는, 왈츠 분위기의 클래식이 연주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에반의 손을 잡고 있었다.
“테일러스가의 가주 에반 테일러스 공작, 그리고 윈체스터가의 딸 샤샤 윈체스터 공녀. 오늘 두 사람은 위대하신 메키우스의 권속, 백룡의 비호 가운데 신성한 혼약을 약조한다.”
엄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성한 혼약의 기일이 다가올 때까지 정결한 마음으로 서로만을 향한 지고지순하며 진실한 사랑을 유지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에반의 목소리에 나는 흠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베일 너머로 보이는 그의 벽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잠시 멍하니 그를 보던 나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맹세…… 합니다.”
그리고 나도 입술을 열어 맹세했다.
그저 형식상의 대답일 뿐인데 왜 이렇게 떨리는 것일까.
내가 대답하자 사람들의 커다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제, 끝난 건가?’
잠시 후 기사 한 명이 나와서 원로회장이 들고 있는 가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붉은 천 위에 올려져 있는 백탑의 열쇠가 드러났다.
“성스러운 약혼의 증좌로 테일러스의 역사를 의미하는 백탑의 열쇠를 수여한다.”
“…….”
별 모양의 백탑의 열쇠는 찬란한 금색이었다.
‘저게…… 백탑의 열쇠.’
네 가지 열쇠 중 마지막 열쇠이다.
원로회장이 양손으로 들고 있는 상자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저 열쇠가 말이다.
에반은 상자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열쇠를 꺼내 나에게 천천히 그것을 건네었다.
“우와아-.”
“멋져요.”
아까의 아이들과 젊은 아가씨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미래의 안주인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장갑 위에는 이 여행의 진짜 목적이었던 백탑의 열쇠가 놓여 있었다.
‘드디어 얻었어.’
나는 베일 너머의 에반을 향해 미소 지었다.
에반 역시 미소를 띤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 * *
케이크를 자른 뒤 댄스 타임이 시작되었다.
약혼식의 꽃, 무도회이다.
그리고 이 파티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약혼녀인 나였다.
베일을 쓰고 있어서 시야가 트여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춤을 추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진과의 훈련으로 주변시를 익혔으니까.
에반이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에반에게 손을 얹었다.
이내 우리는 음악에 맞추어 발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약효가 다해 다시 남자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이 순간은 우리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속삭여도 충분히 들릴 만큼 가까이 붙어 있었고, 무도회의 음악 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게 가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일을 쓰겠다는 생각을 한 건가.”
샹들리에 아래, 절도 있게 이끄는 그가 선명한 벽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공녀가 그동안 기사인 척했다는 걸 들킬 수는 없잖아요.”
이내 에반이 팔을 펴자 나는 두 바퀴 돌았다.
“확실히 이 정도면 누구도 사람이 바뀌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을 것 같군.”
그리고 에반이 다시 내 허리를 감싼 채 젖혔다.
그의 가슴에 손을 얹은 나는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아까는 놀라지 않으셨어요?”
에반의 입술이 달싹였다.
“……놀랐어. 아주 많이.”
일순간 쿵, 쿵, 내 심장도 뛰었다.
밤과 무도회는 사람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
천천히 허리를 펴며 그와 가까이 마주한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냥 차악을 선택했을 뿐이에요. 드레스가 찢어져 버려서 꿰매느라고 힘들었어요. 오셀로가 있었더라면…….”
“글쎄.”
가쁜 숨에 따라 베일이 사르륵거렸다.
에반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에게는 차악일지 몰라도.”
그의 입술이 느긋이 움직인다.
“내게는 최선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군. ”
“에반…….”
에반이 내 오른손을 잡고 천천히 위로 올렸다.
그리고 나의 손등에 천천히 입술을 대었다.
샹들리에 아래, 에반의 선명한 벽안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스물여덟 회차 동안, 이라는 말이 입술의 달싹임 끝에 배어 나왔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오늘만큼은 이상한 마법에 걸려 버린 것처럼 말이다.
아까부터 뛰던 심장은 여전히 최선을 다해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에반이…….’
뇌리에는 지금까지 부정하던 생각이 더는 피할 수 없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꾹 쥐고 있던 다른 손의 힘이 천천히 풀렸다.
‘……너무 잘생겨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