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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122화 (122/124)

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22화

밤이 깊어졌을 때, 에반은 내 방…… 아니 오셀로가 쓰던 ‘샤샤 윈체스터 공녀의 방’ 앞까지 나를 마중했다.

하인들도 그렇고, 보는 눈이 있으니 오늘은 여기에서 자야 할 것 같다.

부하 노릇을 할 때 내가 쓰던 방은 에반의 방 곁에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문 앞에서 에반을 마주 보았다.

“저…… 아까는…….”

두근, 두근, 심장이 뛰고 있었다.

“발 밟아서 미안했어요.”

오늘의 만남이 최선이라고 하던 에반의 말이 무색하게, 나는 몇 번이나 그의 발을 밟았다.

처음에 음악의 박자가 느릴 때만 해도 따라갈 만했었는데, 박자가 빨라지자 내 발을 통제할 수 없었다. 역시 나는 춤에는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대답 없이 빤히 나를 보던 에반은 잠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피식, 웃은 거 맞지?

잠시 후 다시 나를 본 에반이 말했다.

“오늘은 공녀의 새로운 모습을 본 것 같군.”

무슨 의미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베일이 우리의 사이에 있었지만 너무 얇아 내 표정이 다 드러날 것 같았다.

“뭐…… 저도요.”

나의 대답 이후 정적이 몇 초간 흘렀다.

아, 어색하다. 이런 순간에 면역이 없는 나로서는 괜히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샤샤.”

에반의 입술이 달싹이며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내 그는 내 오른손을 올려 다시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댄스 파트너나 연인을 향한 인사법이라고 하지만, 간질간질한 느낌이 심장까지 올라와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귓속에 흘러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약혼 예물로 백탑의 열쇠를 받았고, 파혼을 할 경우에는 이를 돌려줘야 한다.

그러니 약혼을 파기하는 시기는 아마 백탑의 열쇠가 더 이상 쓸모없을 때가 될 것이다.

페르세토스의 파멸이라든지.

나는 에반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언젠가 에반은 날 자신의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협력 관계를 표현하기에 동료만큼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우리는 동료 이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얼핏 했다.

‘필요 없는 생각은 그만하자.’

생각을 지운 나는 에반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내 에반이 돌아가고, 나는 마음을 가다듬는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방 안으로 들어왔다.

* * *

높은 구두를 신고 몇 시간 동안 무도회장에 있다 보니 다리가 아팠다.

곧장 구두부터 벗은 나는 어둑한 방 안을 향해 걸었다.

“왜 이렇게 어두컴컴하게 해 뒀어. 어둠의 자식이야? ……뭐, 맞긴 하지만.”

오셀로 들으라고 투덜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드레스를 갈아입고 약혼식장으로 향했고 오셀로는 그동안 방에 박혀 있기로 했었다.

“오셀로, 어디 있어?”

그리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낯선 냄새가 코끝을 타고 흘러들었다.

이내 들리는 오셀로의 목소리.

“약혼은 잘했어, 샤샤?”

나는 흠칫 오셀로를 돌아보았다.

단추가 세 개나 풀린 셔츠를 입은 오셀로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앞의 테이블에는 술병이…… 몇 개야?

수도 없이 놓인 빈 술병을 보고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술 마셨어?”

화들짝 놀란 나는 오셀로에게 다가갔다.

“…….”

어쩐지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더니.

참고로 진이나 오셀로가 술을 마시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영지의 업무가 워낙 많기도 했고 레카르도는 자식들이 술 마시고 흐트러져 있는 것을 쉽게 용인할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응, 조금 마셨어. 재수 없는 테일러스가의 술병이라도 거덜 내자는 의미에서.”

오셀로의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고, 눈매는 평소보다 가늘었다.

그리고 얼굴은 조금 붉은 기가 돌았다.

“그런데 왜 내 질문에는 대답 안 해. 약혼은 잘했냐고.”

오셀로는 눈썹을 조금 위로 치켜뜬 채 내게 물었다.

반항기 청소년 같은 얼굴이다.

“그럭저럭 끝냈어. 다행히 알아보는 사람은 없더라.”

“그 녀석과 춤도 췄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나오는 오셀로의 질문.

나는 한숨과 함께 답했다.

“응.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

“그럼 그 녀석과 손도 잡았겠네.”

“응?”

“그럼 그 녀석이 네 손등에도 키스했을 테고.”

나는 멈칫 오셀로를 바라보았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저건…… 살기?

갑자기 오셀로가 급발진하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몸에서 정돈되지 않은 흑염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개자식, 죽여 버리겠어.”

“자, 잠깐만! 뭐 하는 거야!”

나는 오셀로를 급히 붙잡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술 냄새가 더욱 짙게 풍겼다.

“X 같은 자식이 감히 누구 손을 잡아! 그 더러운 입술을 내 검으로 저며서…….”

“그만해! 그만!”

또 거친 언사를 내뱉으려는 오셀로를 말리며 말했다.

이러다가 정말 에반을 찾아 나서기라도 하면, 애써 한 위장 약혼이 다 허사가 된다.

“진짜 약혼도 아니잖아. 서로 이렇게 될 걸 약속하고 온 건데…… 갑자기 이 타이밍에서 화내면 어떡해.”

나는 작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오셀로에게 타일렀다.

“……그렇지만…….”

오셀로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며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분노 어린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열 받는다고! 샤샤 너는…… 샤샤 너는…….”

오셀로의 젖은 녹안의 표면에 내가 비쳤다.

억울해 죽을 것 같다는 오셀로를 보며 나는 손을 올려 그의 볼에 갖다 대었다.

오셀로의 입술이 힘없이 달싹였다.

“……아무한테도 주기 싫어. 절대 안 줄 거야.”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문득 오셀로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른다.

심술궂고 제멋대로였던 오셀로.

“오셀로.”

손바닥에 닿은 오셀로의 볼은 뜨거웠다.

“잘 시간이야.”

오셀로는 가늘게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재워 줘, 꼬맹아.”

진한 술 냄새가 다시 풍겼다.

무릎베개도 해 주고, 자장가도 불러 줘.

이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애가 따로 없다니까.’

샤워를 마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셀로는 침대에서 쿨쿨 잠이 들었다.

재우기도 어려웠을뿐더러,

- 샤샤, 결혼하면 안 돼.

잠든 뒤 중얼거리는 잠꼬대마저 오셀로답다.

- 샤샤는 평생 나랑 같이 사는 거야.

‘이래 놓고 자기가 먼저 결혼하기만 해 봐…….’

조금 가볍게 옷을 갈아입은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내일 하녀들이 와서 기겁할 것 같다.

윈체스터 공녀의 주량에 대해 소문이 떠돌게 되겠지.

‘휴…… 어쨌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이거지.’

나는 [조합]을 실행시켰다.

고대 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원형 돌의 형태가 눈앞에 떠올랐다.

네 귀퉁이에는 여전히 황금 접시가 있었다.

[인벤토리]

내 인벤토리에는 생명력 증진 아이템들, 흑탑에서 선물로 받은 물건들, 지금 목에 걸고 있는 흑탑의 열쇠를 제외한 세 가지 탑의 열쇠들이 있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흑탑의 열쇠를, 우리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황금 접시에 올렸다.

묵직한 물건이 올라온 것처럼 접시가 아래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다음은…… 수탑의 열쇠.’

바네사 헤일로에게 받은 수탑의 열쇠이다.

나를 죽이려 했던 바네사는 마지막에야 이를 반성하며 내게 열쇠를 주었다.

바히모스에게 죽을 뻔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의 고생을 생각하며 헤일로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황금 접시에 올렸다.

그 접시 역시 아래로 기울어졌다.

‘이번엔 지탑의 열쇠.’

셀리아의 이모, 라슬라 아카다가 내게 준 열쇠였다.

셀리아는 하녀를 통해 내가 열쇠를 훔쳤다고 뒤집어씌우려 했다.

하지만 이는 이미 예상했던 것이었고 나는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라슬라는 조카를 용서해 주는 대가로 지탑의 열쇠를 내게 무기한 양도했다.

지탑의 열쇠가 놓인 접시가 기우는 것을 보던 나는 마지막 열쇠로 손을 뻗었다.

‘백탑의 열쇠.’

오늘 얻은 열쇠였다.

28회차 회귀자, 에반 테일러스와의 약혼 예물.

이내 마지막 열쇠를 올리자 접시가 기울더니 원형판의 문구가 빛나기 시작했다.

‘네 개의 열쇠가 메키우스의 열쇠가 되어 빛난다.’

그리고 곧이어 각 접시에 올려진 열쇠도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나는 가슴을 졸였다.

그 순간 원형판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여러 색의 빛깔들.

‘무지개……?’

무지개처럼 일곱 가지의 색깔이 섞인 빛이었다.

용의 형태를 한 채 위로 솟아오른 그것은 어느새 내 주변의 모든 공간을 밝게 메웠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뒤 눈을 떴을 때 그 빛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원형판 위에 놓인, 조합의 결과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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