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가문의 병약한 막내님 124화
“내가 할게, 윈체스터.”
내가 훅 끼어들자 아이들은 모두 경계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누나는…… 누구세요?”
“음, 나는 가주님의 약…… 아니, 친구야.”
친구라고 하자 아이들은 경계의 표정을 조금 풀고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이요?”
“정말 가주님의 친구세요?”
“물론이지. 길을 지나는데 너희들이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끼고 싶거든. 괜찮을까?”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정말 윈체스터 역할을 해도 괜찮으시겠어요?”
“다들 윈체스터는 싫어하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난 윈체스터가 좋아.”
내 말에 아이들이 헉, 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윈체스터가 좋다고요? 윽, 그 사람들은 다들 악당들이잖아요.”
“맞아, 우리 아빠가 윈체스터는 다들 나쁜 놈들이랬어요.”
“어린애들을 납치해서 잡아먹는대요. 머리에는 크게 뿔이 달렸고, 송곳니가 턱 끝까지 내려와서는 엄청 흉하게 생겼다고 했어요!”
“응! 그래서 약혼식 때에도 베일을 썼을걸요! 뿔을 가리기 위해서!”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반(反)윈체스터 교육을 철저히 받은 애들인 모양이었다.
내가 베일을 쓴 탓에 그 오해는 더욱 짙어진 것 같았고.
“가주님이 불쌍해요. 가문을 위해서 결혼을 하신 거라는데…… 그렇게 무서운 여자와 살아야 한다니.”
“맞아요. 얼마나 무서우실까요.”
“우리가 언젠가 힘을 길러서 가주님을 윈체스터의 그 악당 여자로부터 구해 줄 거예요.”
아이들은 에반까지 동정하고 있었다.
나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건 오해야, 윈체스터는 악당이 아니-.”
그래도 양심적으로 설명해야겠지.
“아니진 않지만, 그래도 테일러스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라고. 예쁜 꽃을 보면 향기를 맡고, 재미있는 놀이를 하면 같이하고 싶어 하는…… 조금 삐뚤어지긴 했지만 제국의 균형을 지키는 그런 사람들.”
“에이, 거짓말.”
“우리가 어리다고 놀리는 거죠?”
“안 믿어요. 정말 우리 가주님의 친구는 맞으세요? 그것도 거짓말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세뇌 교육이 확실하게 된 모양이다.
“진짜라니까. 사실 난 윈체스터 출신의 친구들도 아주 많이 아는데 그 친구들에게 배운 놀이들을 알려 줄까?”
내 말에 아이들이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위험한 것을 하자고 할까 봐 두려워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윈체스터에서 배운 건 아니지만…… 가끔 마야랑도 했고, 어린 하녀들에게 가르쳐 주기도 했으니.’
“싸움 놀이도 재미있지만, 이건 훨씬 재미있을 거야.”
아이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내가 과장되게 손을 크게 뻗자, 흥미가 생긴 듯 눈에서 조금씩 빛이 나기 시작했다.
* * *
- 기다리지 마세요. 부담스러운 건 싫어요.
‘싫어요’라는 샤샤의 목소리가 에반의 뇌리 깊이 박혀 있었다.
백탑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니까 그리도 단호히 거절했었지.
에반은 그녀의 마음을 굳이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다섯 번째로 백탑 앞을 향해 걷는 중이었다.
“아! 또 내가 술래야!”
“오예! 얼른 시작해. 난 준비 완료!”
“누나, 선 넘어가지 마요!”
문득 아이들의 신난 목소리가 덤불 너머에서 들려왔다.
‘저 목소리는…….’
테일러스의 방계 조카들이다. 아이들의 부모는 테일러스에서 탄탄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고, 현재는 에반과 협력적인 관계를 쌓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사교 모임을 하고 있는 중일 테고, 테일러스의 저택은 누구에게든 안전하니 아이들은 저녁이 깊었는데도 신나게 놀고 있었다.
에반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보이는 풍경에 멈춰 섰다.
“에라시니스 꽃~이.”
나무에 이마를 박고 있는 아이가 천천히 의미 모를 구호를 말했다.
그러는 사이 샤샤와 아이들은 살금살금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피엇씀돠!”
그리고 재빠르게 뒷말을 외치자 다가가던 모두가 훅 멈추었다.
“너, 움직였어.”
하지만 곧바로 멈추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
돌아본 술래의 날카로운 지적에 아이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술래의 옆에 섰다.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구호.
“에라시니스꽃이 피~었~슴돠!”
“…….”
“다시, 에라시니스꽃이…….”
마침내 샤샤가 나무 쪽에 다다라 도망치자 다른 아이들도 깔깔대며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쳐! 도망쳐!”
결국 뜀이 느린 아이가 붙잡히자 게임은 끝이 났다.
“누나, 너무 재미있어요. 아까 공기놀이도 재미있었는데, 이거 정말 최고!”
“그럼 다음에는 오징어 게임 해 볼래? 그것도 진짜 재미있는데.”
“네, 그것도 알려 주세요. 정말 윈체스터에는 재미있는 놀이가 많은 것 같아요.”
“또 다른 건요? 혹시 많은 친구들과 할 수 있는 놀이도 있어요?”
‘윈체스터’라는 말에 에반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말뚝박기라는 놀이도 있는데, 내 오빠는 병사들이랑 같이하는 걸 좋아했어. 내가 알려 줬는데 한동안 꽤 즐거워했기 때문에 병사들이 매일 녹초가 되었지.”
샤샤는 어느 시절을 떠올리며 피식 미소 지었다.
잠깐 샤샤를 바라보던 아이 하나가 입을 열었다.
“윈체스터에서도 이런 재미있는 놀이를 한다면…… 아마 우리가 오해했던 거 같아요.”
“윈체스터 사람들은 매일 끔찍한 짓만 하고 사는 줄 알았거든요. 동물들을 죽이거나, 매일 독을 만들거나 하는 것 말이에요.”
“그럴 리가. 걔들도 노는 거 좋아해. 뭐, 조금 어둡고 거칠기는 하지만…….”
샤샤의 말에 아이들이 씨익 웃었다.
“언젠가 윈체스터의 아이들을 만나면 저희랑 같이 놀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함께 놀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누구든 분명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샤샤의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즐거운 마음은 통하는 거니까.”
에반은 아이들과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는 샤샤를 응시했다.
어둑한 저녁인데도 그녀의 주변만은 은은히 빛나는 것 같았다.
어둠을 밝히는 새벽녘의 종처럼 말이다.
“…….”
에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이번에는 편 먹기 게임 해 볼까?”
뒤로 돌아서는데 샤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지는 아이들의 즐거운 외침도 함께 말이다.
스물일곱 번의 회귀로 에반은 편견이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자신조차도 윈체스터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런 그의 어둠을 밝힌 것은, 틀에서 벗어나도록 제게 손을 내민 것은……
언제나 샤샤 윈체스터였다.
* * *
새들조차 전부 잠에서 깨지는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에반과 함께 마차 앞에 서 있었다.
약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베일도 쓴 채 말이다.
에반의 앞에, 부관 루크가 와서 섰다.
“가주님.”
그는 잘못을 뉘우치고 테일러스가의 충실한 기사로 복귀했다.
에반이 아내의 약값으로 큰돈을 내주자, 평생 충성을 다하겠다고 눈물로 맹세했다고 한다.
“내 약혼녀를 윈체스터까지 데려다주고 오는 동안 가문을 잘 방비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부디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말을 마친 루크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
그리고 고개와 허리를 숙여 내게도 예를 차렸다.
베일 속 미소로 답한 나는 테일러스 저택을 바라보았다.
신전 느낌이 나는 대리석 저택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언젠가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하던 차였다.
“앗, 가주님이다.”
“공작 전하, 안녕하세요!!”
저 멀리서 발랄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침 바람을 맞으며 세 명의 꼬마들이 줄줄이 달려와서 우리의 앞에 섰다.
이 아이들은 이틀 전 같이 놀았던 애들이다.
놀이와 규칙을 가르쳐 주니 어찌나 좋아하던지…….
하지만 나를 보고 흠칫한 것 같다.
무서운 윈체스터의 공녀라고 생각해서겠지.
“그래.”
에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에반이 나를 마차 안으로 에스코트했다.
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멈추었다.
그리고 깜짝 인사를 하기 위해 살짝 베일을 위로 올렸다.
그 순간 아이들의 표정이 굳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아이들은 입을 벌렸다.
“누…… 누나가…….”
“윈체스터 공녀님……?”
“가주님의…… 약혼자?!”
나는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을 보고 피식 웃은 뒤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때, 이마에 뿔 난 것 같아?”
아이는 멍하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곁에 있던 아이가 뒤늦게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희의 실례를 용서해 주세…….”
“나도 재미있었어.”
내 말에 아이들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다음에 또 놀자.”
나는 아이들에게 한 마디를 건네고 마차에 올랐다.
아이들의 얼굴은 불그스름했고 눈은 빛나고 있었다.
루크는 이미 내 정체에 대해 알고 있어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에반의 피식 웃는 모습이 곁눈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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