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어린 회귀자 (1)
“검성 그란델 대공 및 7인의 제국기사단장들.”
“…….”
“대현자 바르무어 후작과 5인의 제국 마탑주.”
“…….”
“아퀴나스 추기경을 비롯한 최고위 이단심문관 12인, 신성군단장 8인.”
그것은 신성 제국이란 나라는 물론이고,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강자와 영웅들의 명단이었다.
“그들에 대한 암살 혐의를 인정하나?”
비록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한낱 전사자들의 명부에 불과했지만.
“…….”
시엔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전신의 근육과 힘줄이 갈가리 찢어진 탓에 고개를 들 수도 없다. 설령 고개를 들었다고 쳐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앞을 봐야 할 두 눈동자가 산 채로 뽑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텅 빈 어둠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시엔의 세계는 까마득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찬란한 황금으로 쌓아 올린 황성의 홀조차 시엔의 세계를 밝히지 못했다.
“그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력함 속에서 시엔이 조소했다.
“전부 내가 죽였다.”
차가운 한마디에 얼어붙을 듯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그레이트 홀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한 인파가 들어차 있었지만, 그중에서 누구도 함부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 설령 그곳이 제국의 승리를 과시하기 위한 영광스러운 자리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의 힘줄을 끊고 뼈를 분쇄했으며, 자기 의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망국의 포로 앞에서─.
마치 남자가 죽음의 신이라도 되는 듯 벌벌 떨며 겁내고 있었다.
어떤 용감한 기사나 오만한 귀족도 예외가 아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는 물론, 숨소리조차 용납되지 않는 적막이 깃털처럼 내려앉을 뿐.
“그렇다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인가?”
“……죄라고?”
시엔이 되물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공허한 목소리였다.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지?”
“무수한 제국의 영웅과 아들을 살해하고 이 나라의 평화와 질서를 어지럽힌 죄. 감히 인간의 몸으로 신의 제국에 맞서려 한 죄.”
목소리의 주인이자 제국의 주인이 말을 잇는다.
“그것이 네놈의 죄다, 시엔 나이트워커 공작.”
‘여기까지인가.’
제국은 승리했다. 시엔과 시엔의 조국은 패배했다. 지키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잿더미가 되어 불타버렸다.
‘다시 한 번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다면.’
생각 끝에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린다. 그런 덧없는 망상에 기대야 할 정도로 비참해진 자신의 처지를 조롱하면서.
죽는 순간까지도 시엔의 세계는 칠흑 같은 어둠에 파묻혀 있었다. 일찍이 시엔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 * *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려지고, 갈 곳 없는 시엔을 거두어준 것은 암흑가의 범죄 길드였다.
어설픈 온정에서 비롯된 안일한 선행이 아니었다. 범죄자들의 손에 거두어져 노예는커녕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일곱 살 때, 시엔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실패했을 때는 혼자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희생될 범죄 길드의 일회용 사냥개였지만, 시엔은 절대로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비슷한 용도로 키워진 ‘형제들’이 암살에 실패하고 살해당하거나, 도시 경비대에 발각되어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는 와중에도 시엔은 홀로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죽기 전에 죽인다. 살기 위해 죽인다. 그것이 술에 진탕 취해서 방심한 상대든, 잔뜩 주변을 경계하며 눈을 부라리는 상대든 다를 것은 없었다.
어린 시엔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그림자 속에서 기척을 숨기고 다가가, 정확히 상대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재능. 사람을 죽이는 재능.
암살자의 재능이었다.
“그 애송이는 지나치게 불길해.”
“글쎄, 기척도 없이 등 뒤에서 칼을 들고 멀뚱멀뚱 서 있더라니까? 염병,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무슨 망령의 자식도 아니고 말이야.”
“듣자 하니 ‘그분들’께서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까지 들리고…….”
날이 갈수록 시엔의 칼날은 점점 섬뜩하고 시퍼런 서슬을 머금었다. 시엔을 거둔 범죄 길드의 이들조차, 어느 순간 자신이 기른 사냥개의 끝 모르는 성장을 두려워할 정도로.
─그래서 버려졌다.
어린아이와 남색(男色)을 밝히는 적대 길드의 간부를 ‘상품’으로 위장해 암살했고, 그게 시엔의 마지막 쓸모였다.
배신당하고 버려진 시엔은 도망쳤다. 도망친 끝에 열 명의 추적자들을 죽이고, 산 채로 적대 길드에 사로잡혔다. 사로잡힌 후에는 알지도 못하는 정보와 진실을 실토하라며 죽는 것보다 끔찍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여기 있었구나.”
─그녀는 바로 그 지옥에 나타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 일색의 옷차림을 한, 검고 어두운 숙녀였다.
또각또각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까만 흑발과 칠흑의 벨벳 드레스 자락이 기품 있게 흩날린다.
“입구 지키고 있던 놈들은 대체 뭘 하는 거야!”
“계집이 여길 대체 어떻게 들어왔…….”
범죄자들이 말을 마칠 틈조차 없었다. 대신, 어디서 실이 끊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싹둑.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조차 없었다.
그러나 흑색의 드레스 자락이 나부낄 때마다 죽음이 춤을 춘다.
눈앞에 있는 범죄자들의 목이 잘리고,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린다. 피가 튀고 창자가 흩뿌려졌다.
당기면 풀리는 매듭을 푸는 것처럼, 인간의 형태를 엮고 있는 이음새가 너무나도 덧없이 풀려나갔다.
“조잘조잘 시끄럽기도 하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여신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어머니─?”
시엔이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 그 말을 듣고 검정 일색의 숙녀가 웃음을 터뜨린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웃고 나서 그녀가 되물었다.
“가족이 되고 싶니?”
그날, 어린 시엔을 향해 속삭여준 것과 같은 상냥하고 따스한 목소리. 퉁퉁 부르트고 갈라진 입술이 힘겹게 움직였다.
“가족…….”
“누구라도 우리의 가족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되묻고 나서 깨닫는다. 이것은 까마득한 과거 속의 풍경이었다.
아직 시엔이 진정한 나이트워커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첫 만남의 순간.
다시금 몸 상태를 점검한다.
지금 시엔을 집어삼키는 고통은 제국의 고문 기술자들이 안겨준 고통 앞에서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전신의 힘줄과 인대, 근육을 섬세하게 구별해 절단하지도 않았고, 뼈의 마디마디가 가루처럼 으스러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풋내기들의 손에 마구잡이로 자행된 구타와 골절에 불과했다.
단 하나 위화감이 드는 것은, 그 풋내기들의 손으로 자행된 고문조차 못 버티고 비명을 지를 만큼 연약한 어린아이의 육체였다.
‘……어린아이의 육체?’
꿈속을 거니는 것처럼 붕 뜬 의식이, 비로소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주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밝다.
눈동자를 뽑혀 어둠 속에 파묻혀 있어야 할 세상이, 어떤 황금보다 찬란한 금빛으로 가득 차 있다. 설령 그곳이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범죄 길드의 지하 아지트라 해도 다를 것은 없다.
아플 정도로 눈부신 세상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움직일 수 있겠니?”
“……네.”
“그래, 아주 대견하구나.”
시엔의 대답에 여성이 흡족한 듯 손가락을 튕겼다.
스릉!
직후 시엔을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이 잘려나갔다. 마치 두부를 자르듯 부드럽게. 금속이 부딪치는 마찰음조차 나지 않았다.
“자, 이제 너는 자유의 몸이란다.”
시엔의 쇠사슬을 자른 검정 일색의 숙녀가 말했다.
“이대로 도시를 벗어나서 자유를 손에 넣을 수도 있고, 혹은 우리와 함께─”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시엔이 대답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여성의 표정에 희미한 놀람이 깃든다.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니?”
“네.”
바란다면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일원이 되기 위한 길고 혹독한 시험을 치러야 한다.
하지만 시엔은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저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일원이 되고 싶어요.”
“…….”
이 대륙에서 가장 널리 이름이 알려진 암살자들의 가문.
암살자에게 있어서 그런 요란한 명성은 얼핏 모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모순이야말로 그들의 악명을 효과적으로 퍼뜨리고, 협상 테이블 위에서 정치적인 우위를 점하며, 공포와 두려움을 심어줄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들은 단순한 뒷골목의 범죄자들이 아니었으니까.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니?”
시엔의 말에,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여성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암살자들의 어머니(Mother of Assassin)」 라일라 나이트워커.
훗날 시엔이 가문의 일원으로 거듭나고 더 나아가 나이트워커 공작의 자리에 앉기 전, 당대 가주이자 나이트워커 여공작이 물었다.
“소문을 들었어요.”
“무슨 소문?”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시엔이 짐짓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고요.”
“재미있는 소문이구나.”
“그렇지만 저는 줄곧 믿고 있었어요.”
“뭘 말이니?”
“언젠가 제 앞에 ‘진짜 가족’이 나타나게 될 날을.”
뒷골목에 떠도는 괴담 같은 풍문이지만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여성이 흡족한 듯 웃었다. 시엔 역시 웃었다.
“우리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란다.”
“어째서요?”
여성이 즐거운 듯 대답했다.
“말했듯이,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거든.”
나이트워커 가문이 그들의 가족을 선택하는 방식.
그들은 피로 이어져 있지 않다. 단지 선택할 뿐이다. 대륙 전역에 깊이 뿌리내린 은밀한 네트워크를 통해 천부적인 암살자의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그리고 그 안에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재능의 원석만이,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남아 그들의 일원으로 거듭날 수 있다.
“저랑 같은 일을 하고 있네요.”
“같은 일이라니?”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요.”
시엔이 대답했다.
“저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걸요.”
“그렇구나.”
여성이 흥미로운 듯 미소를 머금는다. 시엔의 말에 깃든 진짜 의미를 이해할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엔은 이미 한 번 그들의 가족이 되었고, 그 안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를 손에 넣었다. 아니, 그녀의 손에 거둬지기 전부터 시엔은 이미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
훗날 자신의 앞에 다가올 파멸을 떠올린다. 벽돌처럼 견고한 어둠 속에서 제국의 주인이 고한 무수한 죄목들과 함께.
하지만 처음부터 시엔의 죄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약한 죄였다.
불패의 신화를 쌓아 올린 대륙 최강의 기사, 반신의 경지에 도달한 대마법사, 천벌의 대행자라 불리는 최고 수석 이단심문관, 단 한 번의 전투도 패주한 적 없는 전설적인 상승장군(常勝將軍)…….
제국의 가장 위대한 영웅들을 굴복시킬 만큼 강했지만, 정작 제국 그 자체를 쓰러뜨릴 만큼 강하지는 못한 죄.
“나를 따라오렴, 아이야.”
시엔의 속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