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2화 (2/200)

2화. 어린 회귀자 (2)

시린 달빛이 깨진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사륜마차 한 대가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의 대로를 가로질렀다. 마름모꼴 쇄석(碎石)을 깔아 조악하게 포장된 도로를 달릴 때마다 바큇살이 위태롭게 덜컹거린다.

‘……정말 과거로 돌아온 건가?’

흔들리는 차체 속에서 시엔이 생각했다. 몇 번이고 의심해도 별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시엔이 고개를 돌린다. 차창 너머로 스미는 달빛을 등진 채, 검정 일색의 옷차림을 한 숙녀가 마차의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게 그대로다.’

암살자들의 어머니, 대모(Godmother) 라일라 나이트워커.

벌써 수십 년도 넘은 과거의 풍경이었지만, 시엔에게는 이 모든 게 바로 어제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리고 지금, 시엔은 바로 그 까마득한 과거의 풍경 한복판에 내던져져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뭐가 말이니?”

“제가 여기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시엔의 말에 라일라가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감스럽지만 꿈이 아니란다.”

“그럼 뭐죠?”

“진실이지.”

그것은 그녀의 입버릇이었다. 동시에 가문의 암살자들이 가슴 깊이 새겨넣은 신조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 번 노린 표적을 절대로 살려두는 법이 없었다. 그 어떤 강대한 귀족이나 기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세상 누구도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를 피해갈 수 없다는 진실.

“진실은 우리가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거든.”

“그렇군요.”

진실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시엔은 당장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일원이 될 거예요.”

“그러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시엔이 말했다. 그것을 어린아이의 당찬 포부라고 생각했는지, 라일라가 싸늘한 웃음을 터뜨리며 되묻는다.

“우리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다.”

“할 수 있어요.”

시엔이 말을 잇는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가족이라…….”

시엔이 나고 자란 「가장 고귀한 베네토 공화국」은, 석호(潟湖) 위에 쌓아 올린 보잘것없고 척박한 소국이었다.

그리고 변변찮은 영토나 자원조차 없는 그들 나라가, 무수한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들을 지킬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압도적인 비대칭 전력.

나이트워커 가문의 시조는 그런 공화국 정부 방침에 따라, 수백 년 전 극동의 대륙에서 고용된 이국의 암살자였다.

산상노인(山上老人) 카산과 그가 거느린 고대 암살자 교단.

그 활약을 인정받아 공화국 정부에게 공작의 작위를 하사받은 뒤에도 그들의 ‘오래된 전통’은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 가문이 어둠 속에서 공화국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손에 넣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피로 이어져 있지 않다. 단지 선택할 뿐이다.

“저는 당신의 아들이 되고, 당신의 뒤를 이어 가문에서 가장 위대한 암살자가 될 거예요.”

“멋진 꿈이구나.”

라일라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시엔은 웃지 않았다.

“꿈이 아니에요.”

“그럼 뭐지?”

“진실이요.”

시엔이 대답했다. 라일라가 자신의 말을 믿고 믿지 않고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란 듯이.

“아, 그것참.”

라일라의 표정에서 일순간 미소가 사라진다. 이지러진 달빛이 차창 너머로 산산이 조각나며, 그녀의 뒷모습에 검고 창백한 역광을 드리운다.

“참으로 기대되는 말이구나.”

그럼에도 시엔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찬란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 *

라일라 나이트워커는 냉혹한 여자다. 아니─,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다.

그런 그녀가 새로운 아이를 공작령의 저택에 데려왔을 때, 나이트워커 공작 가에 충성하는 「그림자 기사」들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새로운 아이들이 오면, 가장 먼저 저택에 상주하는 그림자 기사들 아래에서 암살자 가문의 일원으로 거듭나기 위한 기초적인 훈련을 시작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훈련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그들의 역할은 단지 그릇을 판단하는 것뿐이다.

이 아이가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아 암살자 가문의 일원이 될 만한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인지.

매년 적지 않은 아이들이 ‘가문의 선택’을 받아서 저택에 이끌린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아이들이 맞이할 결말은 오직 하나였다.

이번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장차 공화국을 좌지우지하는 공작 가의 도련님이 될지 모른다고 배려해줄 필요 따위는 없다. 죽거나 부서지면 그걸로 끝이다. 일주일을 버티면 그나마 잘 버틴 축이리라.

몇 주, 몇 달, 년 단위의 생존까지 보자면 그야말로 절망적인 사망률이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어린아이들의 유해(遺骸)로 뼈 무더기의 산을 쌓아 올린 다음에야, 고작 두세 명의 ‘밤을 걷는 자들’이 탄생한다.

죽는 것보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몇 번이고 한계를 깨부수며, 부서졌다 다시 붙기를 반복하는 단련의 나날들.

그것이 나이트워커 가문이 그들의 일원을 선택하는 방식이었고, 시엔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시엔은 보란 듯 살아남았다.

시엔을 가르치는 그림자 기사들, 심지어 가주 라일라의 예상을 벗어난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아이는 진정한 의미의 천재였다.

* * *

반년 뒤.

“공작 각하.”

라일라가 공작령으로 돌아오고 나서, 그림자 기사단장(Shadow Master) 하이드 경은 망설이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좀 더 오래 영지를 비웠다면 이쪽에서 먼저 그녀를 찾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으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령이나 밀사를 통해서 전할 수는 없었던 이야기인가요?”

“밤의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름이 하이드 경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라일라의 눈빛에 희미한 호기심이 깃든다.

“말씀하세요.”

“세 아이의 곡식이 여물었고, 세례를 거행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두 아이는 비고와 조반니겠군요.”

그녀가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마지막 한 명은 누구죠? 두 아이 외에 달리 기대할 만한 아이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시엔 도련님입니다.”

하이드 경의 대답에 라일라가 눈동자를 끔벅거린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아닙니다, 공작 각하.”

“그 아이는 반년 전에 저택에 와서 이제 막 파종(播種)을 시작했을 텐데요.”

라일라의 눈동자가 싸늘해진다. 서릿발이 내려앉은 것처럼 섬뜩한 냉기와 오한이 하이드 경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씨앗을 뿌린 다음 곡식이 무르익으면 거둔다. 모든 것은 적당한 시기가 있는 법이다. 늦는 것도 충분히 나쁘지만 빠른 것은 그보다 더 나빴다. 될 것도 안 되게 만드니까.

“일개 농노조차 아는 하늘의 이치를 모를 정도로, 제가 아는 경께서는 어리석은 인간이었던가요?”

“과도할 정도로 신중을 기울이며 가르쳤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이드 경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말을 잇는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정말로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범상치 않은 재능이라.”

라일라가 차가운 실소를 흘린다. 하이드 역시 그의 말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리는지 깨달았다.

이곳은 대륙 제일의 암살자 가문, 나이트워커 가문의 일원이 될 아이를 육성하는 공간이다. 어중간한 재능의 편린 따위로는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대륙 전역에 깊이 뿌리내린 정보망을 토대로, 천부적인 암살자의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엄선하는 여기서도 시엔은 달랐다. 홀로 압도적이었다.

저마다의 엄격한 기준을 통해 선택받은 다른 모든 아이를 한낱 둔재로 느껴지게 할 만큼.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한 번이라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은 것은 절대 잊는 법이 없습니다.”

일단 배우는 게 말도 안 되게 빨랐다. 아니, 빠르다거나 하는 수준조차 아니었다.

“저택에 온 뒤 일주일 만에 가르칠 수 있는 모든 전투 기술의 식과 자세, 무기술을 마스터했고…….”

한 달이 지났을 때, 마나의 존재를 깨닫고서 호흡을 통해 축적하는 토납법을 깨우쳤다.

두 달이 지났을 때, 그림자 기사의 전문적인 검식(劍式)과 움직임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따로 가르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기사들의 대련을 엿보며 눈동냥으로 습득한 듯하더군요.”

“관찰력이 무척 좋은 아이군요.”

“석 달이 지났을 때는, 홀로 영지 내의 하급 마수를 토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후 반년이 지난 지금, 시엔에게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다. 적어도 하이드 경을 필두로 하는 그림자 기사들로서는.

“감히 말씀드리건대 시엔 도련님께서 보이는 학습 능력은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단지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 따위로 오롯이 설명하기 힘든,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는 무언가.

“전투 기술뿐만이 아닙니다. 학문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들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정교사들이?”

뜻밖의 말에 라일라의 눈꺼풀이 가볍게 흔들린다.

“문법, 논리학, 수사학,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학까지……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더군요. 필기시험 때마다 모든 과목에서 압도적인 만점을 내고 있다는 모양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게다가 약학(藥學)을 가르치는 담당 교사가 말하길, 독약의 제조와 레시피 개발, 성분 배합은 자신이 거꾸로 가르침을 청해야 할 수준이라더군요.”

“약학의 담당 교사가 누구였죠?”

“파비오 디 로렌조.”

그런 말과 함께 하이드 경이 품에서 무엇을 꺼냈다.

“살레르노 의과 대학 전임 교수이자 포이즌 마스터, 그리고 그림자 기사단에 보급되는 암살독 ‘씁쓸한 죽음’의 개발자입니다.”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는 작은 유리병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 전, 시엔 도련님이 독자적인 레시피로 제조한 독약입니다.”

“흠.”

유리병을 받아든 라일라는 마치 와인을 시음하듯, 가볍게 향을 맡고 나서 병 속의 독액을 몇 모금 홀짝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방울로도 치사에 이르는 극독. 그런 독을 극상의 와인처럼 음미하며 입에 머금고 있던 라일라가, 놀란 듯이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이걸 정말로 그 아이가……?”

“그렇습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로 거듭나기 위해 배워야 할 것들은 산더미처럼 많다.

공화국 제일의 귀족 가문에 걸맞은 엄격한 교양과 예법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그 이상을 요구했다.

“그 아이는 진짜 천재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가짜 천재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송구합니다. 물론 비고와 조반니 역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입니다.”

기사단장 하이드 경이 실언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정정한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티끌만 한 진심도 느껴지지 않는, 말 그대로 형식적인 예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택에 있는 그 어떤 밤의 아이도, 지금의 시엔 도련님 앞에서는 비교가 무의미한 수준입니다.”

“참으로 영특하기도 하지.”

라일라가 미소 짓는다. 자식 자랑에 흐뭇함을 숨길 수 없는 어머니처럼.

처음 시엔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린다.

만났을 때부터 어딘가 범상치 않은 아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천하의 그녀조차 그렇게 여길 정도로 시엔에게는 비범한 무언가가 느껴졌으니까.

내심 기대도 하고 있었다. 적어도 3년, 4년 안에는 좋은 소식을 들어볼 만할 것 같다는 기대감이었다.

아무리 빨라도 최소 몇 년이란 소리였다.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시엔이 오기 전 가장 두각을 드러낸 두 아이, 비고와 조반니조차 때가 무르익기까지 5년이란 시간이 걸리지 않았나.

그런데 시엔은 이곳에 오고 단 반년 만에 그 아이들을 압도했다. 그마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만큼의 압도적인 격차로.

하늘이 내린 재능, 천재(天才)란 말로도 부족할 정도의 성장세였다.

‘너무 빠른걸.’

믿기 어렵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러다 문득, 그날 마차 안에서 시엔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는 당신의 아들이 되고, 당신의 뒤를 이어 가문에서 가장 위대한 암살자가 될 거예요.’

멋진 꿈이구나. 그녀의 말에 시엔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꿈이 아니에요. 그럼 뭐지?

“진실…….”

라일라는 문득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그녀는 인간의 감정을 읽는 데 무척이나 능숙하다. 얼굴 근육의 미세한 변화나 주름의 움직임 하나만 갖고도 상대방의 속마음을 제 손바닥처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심지어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고 믿고 있어도, 마음 한구석에 티끌만 한 의심을 품고 있다면 얼마든지 간파할 수 있었다. 알기 쉬운 자신감, 자기충족적 예언, 혹은 과대망상 따위─.

그런데 시엔에게는 그런 거짓이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당찬 포부나 일방적인 자신감이 아니었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사과는 나무에서 열린다는 것처럼 당연한 목소리였다.

시엔의 말을 떠올리며 라일라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미소와 함께 라일라가 집무실의 적갈색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검은 드레스 자락이, 몸의 아름다운 굴곡을 따라 춤추듯 너울거린다.

“공작 각하?”

당황하는 하이드 경을 뒤로한 채, 라일라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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