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세례성사 (1)
시엔이 보석을 수놓은 금색의 잔을 손에 쥐자마자, 황금 너머로 터무니없는 양의 마나가 느껴졌다.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성배를 손에 쥔 것 같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 정도 양의 마나를 단숨에 손에 넣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영약이라 일컬어지는 ‘드래곤의 심장’을 섭취한다 해도 불가능할 테니까.
주저할 이유 따위는 없다. 설령 이게 독이 든 성배여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꿀꺽.
시엔은 망설임 없이 목구멍 너머로 잔의 내용물을 흘려보냈다.
성스러운 살과 피. 물론 그 말은 어디까지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약 하나를 제조하기 위해 쌓아 올린 피와 시체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콰직!
성체와 성혈이 시엔의 체내에 녹아들자마자, 폭주하는 마나의 여파로 혈류가 뒤틀린다.
콰직, 콰직!
지금까지의 나약한 육체를 벗어던지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변체(變體)가 시작되는 것이다.
체내의 골격과 근육과 신경, 심지어 세포와 유전자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본래 유지해야 할 형태를 잃어버리고 마구잡이로 무너져 내린다.
지금의 연약한 육체로는 결코 감당하지 못할 터무니없는 힘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시조 카산이 속한 고대 암살자 교단이 동방 대륙에서 대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영약을 개발했는지는, 지금에 이르러 가주는 물론이고 가문에서 가장 지혜로운 「콘실리에리」조차 알 도리가 없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가진 수행 방법과 전투 기술은 이쪽 땅의 상식을 아득하게 뛰어넘는다는 것뿐이다.
“쿨럭!”
고통 속에서 시엔이 피를 토해냈다. 핏빛이 아니다. 고순도의 마나가 혈중에 용해되며 창백할 정도로 새파란 청색을 머금고 있다.
푸른 피.
그리고 그런 시엔의 모습을, 각양각색의 밤을 걷는 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시엔보다도 어려 보이는 또래의 소년소녀, 초로의 노신사, 그 사이의 중장년, 젊고 아름다운 영애와 청년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의 이들이 숨을 삼키며 시엔의 세례를 엄숙하게 지켜보고 있다.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들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시엔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까닭에 시엔이 조용히 웃었다.
육체를 세포 단위에서 재구축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고통 속에서도 담담하게.
시엔의 메마른 웃음에 당혹스러운 공기가 감돌았다.
혹시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실성해버린 걸까? 설마 세례를 감당하기에 아직 육체가 너무 미숙했나?
아니었다.
뼈를 깎고 신경을 재구성하고, 대량의 마나를 혈중에 용해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저 말라붙은 웃음을 내뱉을 뿐이다.
한 차례의 각혈을 제외하고 일말의 신음조차 내지 않는다. 그저 덤덤히 육체가 뿌리부터 재구성되는 과정을 받아들이고 있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는 받아들이는 수준조차 아니었다.
일련의 변체를…… 의식적으로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주는 극단적인 환골탈태의 과정을,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최적의 형태로 소화하는 것이다. 마치 자기 손으로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
그 의미를 헤아린 밤을 걷는 자들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십이경맥(十二經脈)」, 「기경팔맥(奇經八脈)」, 「전신세맥(全身細脈)」, 「생사현관(生死玄關)」.
가문의 고대 비전 속에 기록된 ‘보이지 않는 힘의 길’을 정확히 되새기며, 바로 그 힘들이 내달리는 육체의 통로와 마나 회로를 최적의 형태로 잇고 끊으며 신경망을 재구축하고 있었다.
일찍이 그들 고대 암살자 교단이 추구했던 인간을 초월한 신의 육체, 선골(仙骨)을 손에 넣기 위해.
“소름이 끼치는구나.”
라일라의 곁을 지키고 있던 가문의 구성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마나를 순환할 수 있는 육체가 존재하다니─.”
시체처럼 창백한 잿빛 피부색, 후드 밑으로 숨겨져 있는 뾰족한 귀, 그것은 척 보기에도 그녀가 보통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녀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보통 엘프조차 아니었다. 이 대륙에서 가장 불길하고 꺼림칙하다고 여겨지는 이단의 종, 다크 엘프였다.
하지만 그들 가문 앞에서는 인종과 피부색, 심지어 종족의 장벽조차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시간을 살아가는 엘프답게, 그녀는 가문 안에서도 각별한 입지를 갖고 있었다.
가장 지혜로운 자, 콘실리에리(Consigliere, 최고 고문) 루나 나이트워커.
가주 라일라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가문 최고의 원로.
천하의 그녀조차 정작 세례를 받을 당시에는 고통 속에서 참아내는 것조차 급급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달랐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몸에 벌어지는 재구성의 과정을 철저하게 의식하며 통제하고 있었다. 다시 태어나는 나이트워커의 육체에 먼지 한 톨만큼의 불순물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참으로 경이롭지 않나요?”
“뭐가 말이지?”
“저 아이의 모든 것이.”
그런 시엔의 모습을 보며 라일라가 말했다.
“일찍이 우리 가문의 시조이자 밤의 아버지, 카산께서 마침 아홉 살 나이에 세례를 받으셨지요.”
“……최초의 밤을 걷는 자인가.”
“무척 공교로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저 아이가 그분의 환생이라도 된다는 건가.”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죠.”
라일라의 말에 루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제는 그 진위를 확인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벌써 수백 년도 더 넘은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다. 설령 인간의 몇 배에 달하는 수명을 살아가는 엘프라 해도 ‘지나치게 과장된 전설’이나 ‘신화’라고밖에 치부할 수 없는.
그런데 바로 그 허무맹랑한 신화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콰직!
체내의 폭주가 비로소 멈추고 침묵이 내려앉는다.
“…….”
여전히 희미한 숨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비틀거린 끝에 시엔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그곳에 있는 것은 아홉 살 어린아이였다. 얼굴도 머리카락의 색도, 심지어 키나 체격마저도 그대로다. 얼핏 봐서는 세례를 받기 전과 조금도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곳에 있는 일족들 모두가 알고, 느끼고 이끌리며, 이해할 수 있었다.
새로운 가족이 지금 막,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최초의 밤을 걷는 자, 시조 카산에 필적하는 재능을 가진 가문의 아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순혈의 밤을 걷는 자가 그곳에 있었다.
철저하게 살육과 전투를 위해 최적의 기능을 극대화한, 가장 순수한 암살자의 육체.
시엔의 바람에 따라 그것은 마력이 될 수도 있었고 오러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어떤 법과 식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가문의 오랜 격언처럼─ 원한다면 무엇이라도 될 수 있고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세례를 마친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이다.
게다가 시엔의 나이는 고작 9살의 어린아이.
물론 지금 당장 대륙의 정점들과 검을 맞댈 수는 없다. 방금 시엔이 손에 넣은 것은 어디까지 최소한의 토대에 불과하니까.
그럼에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 깃든 무한한 성장의 가능성을.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다.
‘성년이 되기 전까지 이 육체의 능력을 모두 끌어낸다.’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다. 제국의 온갖 영웅과 괴물, 대륙의 강자들이 시엔의 손에 쓰러졌다. 그럼에도 제국 그 자체를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시엔이 충분히 강하지 못했던 까닭에.
이제는 아니다.
“La famiglia è tutto(가족이 전부다).”
정적 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가주 라일라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떠나 있던 의식이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이 풀리고 시엔의 자세가 무너져 내렸다.
휘청.
“훌륭하게 버텨주었구나.”
무너지는 시엔의 어깨를 다정하게 포옹하며 라일라가 미소 짓는다.
십자가 위에 매달린 신의 아들을 포옹하듯, 성모의 자비가 깃든 얼굴을 하고서.
그들은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다. 세례 과정에서 어떤 세뇌나 강제적인 정신 작용이 이루어지는지, 그것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을 잇는 어떤 ‘결속’이 나타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설령 이 감정이 거짓된 감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느끼도록 어떤 처치가 되었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원래부터 그런 비합리적인 형태의 결속을 가족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런 까닭에 시엔 역시 웃었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지금껏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었던 호칭을 입에 담으며.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는 냉정한 인간이다. 아니,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지독한 악당조차 제 아들에게는 상냥한 법이다.
* * *
세례를 받은 세 아이 중, 시엔과 비고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밤을 걷는 자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한 아이가 무사히 세례를 통과하면, 가문의 구성원 중 한 명을 후견인 삼아 그의 「대자녀(Godchild)」가 된다.
그런 식으로 가문의 인간들은 새로운 아이를 거두고, 아이들에게 가문의 비전과 더불어 자신의 고유한 기술을 가르친다. 숙련된 장인이 도제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수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가령 무사히 살아남은 시엔의 형제 비고가, 미하일 나이트워커의 대자(代子)가 되어 그 밑에서 수행을 시작했듯이.
그리고 가문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시엔의 경우, 누가 후견인이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가문의 수장, 라일라 나이트워커.
라일라가 가문의 후계자 전쟁에서 승리하고 공작이 된 지 10년 가까이, 그녀는 그 어떤 밤의 아이도 자신의 대자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10년의 침묵을 깨고 시엔의 「대모」를 자처했다는 것은, 그저 가문 내부의 소란으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새로운 후계자가 정해졌다.
바로 그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지금껏 전례가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대륙의 온갖 강자들마저 공포에 떨게 하는 암살자 가문의 수장. 그녀의 칼날을 계승하게 될 후계자의 그릇이 드디어 태어났다.
피 한 방울 이어져 있지 않은 그들 모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 대륙 정세에 드리운 불길한 먹구름이다.
시엔 역시, 자신의 존재가 가지고 올 파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과거와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당장 과거의 시엔이 세례를 통과했을 때, 그 나이는 고작 13살. 물론 당시 시엔이 보여준 재능 또한 가문의 이들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지만 결코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때와 달리 지금 시엔의 나이는 9살. 무려 4년이란 세월이 앞당겨졌다. 게다가 과거에는 살아남지 못했던 그의 형, 비고까지 어엿한 밤을 걷는 자로 거듭나 있다. 운명이 달라진 것이다.
달라진 운명이 어디로 향할지는, 이제 시엔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결의를 다진 시엔이 묵묵히 고개를 들었다.
세례는 끝이 났다. 그러나 여전히 밤을 걷는 자가 되기 위한 수행의 과정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 *
─그로부터 1년 뒤.
시엔이 막 10살의 생일을 넘기고도 몇 달이 지났을 무렵.
손에 들린 날붙이의 감각을 되새기며 시엔이 체내의 마나를 순환시켰다. 전신의 세맥을 따라 기사의 동력이라 일컬어지는 오러가 가속하고 있다.
공화국 북부, 나이트워커 공작령의 지하 콜로세움(원형 경기장).
얼핏 투기장을 떠올리게 하는 그 장소는 실제로도 그런 용도의 장소였다.
어느 한쪽이 죽기 전까지 절대 끝나지 않는 죽음의 투기장.
당연히 합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세상에는 누군가의 피를 구경하기 위해 불법조차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거금을 내려는 자들이 넘쳐난다.
그런 귀족들의 수요에 따라, 목숨을 걸고서 괴물과 맞서는 인간들의 몸부림은 그 자체로 늘 값비싼 구경거리가 된다. 때로는 무참하게 쓰러지며 유린당하는 패배의 광경조차도.
그런데 정작 열광의 도가니가 되어야 할 경기장의 관객석이 텅 비어 있었다.
딱 한 사람의 관객을 제외하고서.
경기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싸구려 좌석에, 유일한 관객이 앉아 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차가운 포커페이스로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투기장 위에 내던져진 것이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란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일라가 손가락을 튕겼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커다란 콜로세움 관객석. 하물며 귀빈석도 아닌 가장 끄트머리의 싸구려 좌석에서 소리를 내봐야 들릴 리가 없다.
쿵!
그러나 라일라의 핑거 스냅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콜로세움 맞은편의 철문이 개방된다.
단 한 명의 관객이 입장한 투기장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