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세례성사 (3)
시엔이 저택으로 돌아오자, 호화로운 저녁 만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널찍한 식사 테이블에 라일라와 시엔이 마주 앉는다.
“저택이 떠들썩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우리 둘뿐이구나.”
“곧 다시 붐비게 될 거예요.”
“그럼 좋겠는걸.”
이윽고 사치스러운 코스 요리가 시작되기에 앞서, 라일라의 자리에 와인과 함께 곁들여 먹는 하드 치즈나 생햄 따위의 핑거 푸드가 제공되었다.
“철갑으로 무장한 마수를 아주 훌륭하게 쓰러뜨렸어. 그것도 아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말이야.”
꼭 알맞은 크기로 썰린 치즈 조각을 입에 넣으며 라일라가 흐뭇함을 감추지 않았다.
“어머니의 가르침 덕이죠.”
“흉갑을 고정하는 못 개수까지 알려준 적은 없었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쓰러뜨렸어요?”
“그렇게 여유롭게 쓰러뜨리지는 못했지.”
“그래도 쓰러뜨렸잖아요.”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란다.”
라일라가 포도주를 홀짝이며 즐거운 듯 말을 잇는다.
“죽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이었고, 추하고 처절하게 살아남았지.”
이제는 그리운 추억을 회상하듯이.
“하지만 살아남았잖아요.”
“그래, 살아남았지.”
그 뒤로도 짤막하게 담소가 이어졌다. 어느덧 라일라의 금색 잔에 담겨 있던 포도주가 적당히 비워질 즈음 다음 코스가 제공되었다.
정찬에 앞서 입맛을 돋우는 전채 요리(Antipasto)였다.
토마토와 바질, 모차렐라 치즈를 듬뿍 얹고서 구운 마늘 빵, 뿔닭과 각종 채소를 넣고 푹 고아 우린 치킨 수프.
저택의 식사는 호화롭다 못해 사치스러울 지경이다. 사치스러운 애피타이저에 이어, 비로소 그들이 ‘제대로 된 요리’라 부를 수 있는 접시들이 나왔다.
첫 번째 접시(Primo Piatto)─ 주로 밀가루를 쓰는 요리들이다.
스파게티부터 라자냐에 이르기까지, 토마토와 크림, 올리브 등의 소스를 쓴 온갖 종류의 파스타.
닭 육수와 백포도주로 쌀을 삶아 치즈와 사프란을 가득 넣은 리조또, 게딱지를 비우고 펜네 파스타와 게살로 가득 채운 대게 그라탱 따위.
뒤이어 제2의 접시(Secondo Piatto)─ 육류 요리들이 나왔다.
쇠고기부터 송아지 고기, 돼지고기와 닭고기, 양고기에서 염소 고기까지, 육즙이 가득 찬 고깃덩어리가 부위별로 다양하게 요리되어 테이블에 제공되었다.
주로 요리를 먹어치우는 것은 시엔 쪽이었다.
라일라는 포도주를 홀짝이며, 이따금 치즈 플레이트 위의 치즈나 생햄을 집어 먹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많이 먹으렴.”
시엔의 식사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라일라가 웃는다. 저택의 식사는 지나칠 정도로 호화롭다. 그리고 그 호화스러움은 어디까지나 어린 시엔을 위해서 제공되는 것들이었다.
정작 라일라는 그렇게 미식을 즐기는 유형이 아니다. 그다지 식탐도 크지 않았고 특별하게 고집하는 음식도 없다. 치즈와 포도주 정도를 제외하고서.
치즈와 포도주에 까다롭게 구는 것은 그녀가 유달리 특별해서가 아니다. 아마 베네토 공화국 사람들 모두가 그럴 테니까.
시엔이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칼끝에 힘줄이 걸리고 기름진 육즙을 뿜어냈지만, 여전히 시엔의 나이프는 기름이나 핏방울 하나 묻지 않았다.
방금 막 숫돌에 간 것처럼 시퍼런 칼날.
칼질이 깔끔하다거나 하는 레벨조차 아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오러의 힘을 쓴 것도 아니었다.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시엔의 칼질 앞에서, 라일라의 눈동자에 일순 흥미로운 이채가 깃든다.
“맛있어요.”
“어릴 때니까 많이 먹어둬야지.”
어릴 때 많이 먹는 것은 중요하다.
실제로 세례를 마친 뒤 성장 중인 시엔의 육체는, 보통 사람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식사 중에 송구합니다, 공작 각하.”
바로 그때, 정장 차림의 집사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방금 막, 수도 베네토에서 사자(使者)가 도착했다는 듯합니다.”
“수도에서 사자가?”
“총독 각하의 칙명을 받고서 급히 이곳을 찾아온 모양입니다.”
“아, 우리의 위대하신 총독 각하께서.”
뜻밖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라일라는 조금도 놀라거나 위축되는 일 없이 미소 짓는다.
총독.
공식적으로 베네토 공화국을 다스리는 최고 지배자. 그러나 이 나라 사람 모두가, 그 이름이 허울밖에 없는 직함이자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식사 중입니다.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전해주시길.”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그와 동시에 누가 그 허수아비를 움직여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지 역시도.
“세상은 넓단다, 시엔.”
라일라가 말했다. 까망베르 치즈와 함께 금빛 잔에 채워진 샤를마뉴산 포도주를 몇 모금 홀짝이며.
“그에 비하면 이 땅은 좁쌀처럼 비좁은 곳이지.”
틀린 말이 아니다. 나이트워커 공작 가는 부유하고 터무니없을 정도의 힘을 자랑했으나, 정작 그들의 힘은 결코 ‘땅의 크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다스리는 영지는 무척이나 작고 척박하며, 보잘것없는 땅 몇 줌에 불과하거든.”
“이 나라처럼 말이죠.”
“그래.”
시엔의 대답에 라일라가 미소 짓는다.
“그런데도 우리 가문과 이 나라가 이토록 호사스러운 부와 영광을 누리는 이유를 알겠니?”
“……잘 모르겠어요.”
시엔이 짐짓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아무리 시엔이 총명하다고 해도, 그것은 고작 10살짜리 아이가 이해하기에 다소 어려운 이야기였으므로.
“우리가 아주 많은 땅을 지배하고 있는 까닭이란다.”
“아까는 좁쌀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땅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얼핏 이해할 수 없는 모순에 시엔이 되물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니까.”
“보이지 않는 땅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래.”
그들은 보이지 않는 땅을 지배한다.
공화국의 3대 상인 가문은 대륙 각국에 수백 개의 지부를 설치했고, 수도 베네토 항구에서는 흑해와 지중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스물아홉 개의 정기 무역 항로를 독점하고 있다.
동쪽 끝의 특산물이 서쪽 끝에서 비싼 값에 팔리고, 서부 특산물이 대륙 북부를 걸쳐 동부로 나가서 팔린다. 그 과정에서 거래는 항상 베네토 공화국에서 주조한 금화로 치러진다.
신성 제국, 샤를마뉴 왕국, 칠왕국 군도, 알렉산드리아와 발렌시아 지방……. 심지어 오크 부족 국가들이 다스리는 북해의 스카디 제도부터, 엘프 제국이 지배하는 동쪽의 아나톨리아 지방에 이르기까지 통용되는 대륙 유일의 기축 통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밤을 걷는 자들이 관리한다.
“훗날 알게 될 거란다.”
“무엇을요?”
“우리 가문이 다스리는 땅이 얼마나 넓고 광활하며,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커다란 희생을 치렀는지.”
암살과 매수, 테러와 뒷공작, 회유와 협박, 그 외에도 온갖 형태의 첩보와 모략 활동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바로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소국을 대륙 제일의 부국이자 강소국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던 진짜 힘이었다.
“이 나라는 우리 가족들의 피를 먹고 자랐거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듯, 이 나라를 지배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총독이 아니다.
바로 이곳에 있는 그녀, 라일라 나이트워커 공작이다. 달리 정치적으로 음흉하기 짝이 없는 협잡이나 수를 쓴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정당한 이유였다.
그들이 이 나라를 있게 했으니까.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이 목숨을 걸고 대륙 각지에서 암약하며, 어둠 속에서 흘린 피와 희생이 지금의 이 나라를 있게 했다.
“훗날 나 역시 피를 흘리게 될 거란다.”
“……어머니가요?”
“그래.”
라일라가 포도주를 홀짝이며 웃었다.
“가족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법이거든.”
그녀의 조상과 형제자매들이 그렇듯이, 또한 훗날의 시엔과 시엔의 형제자매들이 그렇듯이.
일순, 그녀가 맞이하게 될 최후가 시엔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시엔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내 피를 먹고 자란 이 대지를, 훗날 너와 네 아이들이 다스리겠지.”
훗날 시엔이 다스리게 될 땅.
이어지는 말에 시엔으로서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오늘 오후, 철갑의 미노타우르스에게 내달린 칼끝의 감각을 되새겼다.
훗날 신성 제국과 대륙의 온갖 강자를 쓰러뜨리게 될 칼날. 그러나 정작 제국의 심장에는 닿지 못했다.
신성 로마누스 제국, 신의 가호가 깃든 천년 제국.
더 나아가 짙은 그림자 속에서 제국을 지배하는 ‘진짜 지배자들’의 존재를 되새겼다.
이제는 다르다. 아니, 달라져야 했다.
“저는 더 강해질 거예요.”
“이미 충분히 강해지고 있단다.”
“지금 이 정도로는 부족해요.”
“부족하다고?”
“저는 좀 더 제대로 된 일을 수행하고 싶어요.”
시엔이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이런 시시한 소꿉놀이 따위가 아니라.”
철갑으로 무장한 미노타우로스 따위는, 결코 시엔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듯이.
“달리 바라는 일이라도 있는 거니?”
“저를 가문의 임무에 투입해주세요.”
가문의 임무.
─대륙 제일의 암살자 가문이 수행해야 할 ‘임무’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갑작스러운 말에 라일라가 놀란 듯이 눈동자를 끔벅거린다.
“네가 그 의미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요.”
“…….”
시엔의 대답에 라일라는 침묵을 지켰다.
그때와 같다.
그것은 어린아이 특유의 떼를 쓰는 치기도, 무모한 호기도 아니었다. 자신감이란 말도 부족하다. 그저 때가 되었으니,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는 담백한 없는 어조였다.
“저는 더 이상 당신에게 지켜져야 할 아이가 아니에요.”
“그럼?”
“어머니처럼 피를 흘릴 준비가 된 가문의 일원이죠.”
“멋진 각오구나.”
라일라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늘 자신을 놀라게 하는 시엔의 영특함에, 숨길 수 없는 흐뭇함을 드러내며.
* * *
그날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라일라는 저녁때부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총독의 사자를 집무실에 들여보냈다.
“돈나 나이트워커.”
사자는 라일라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손등 위에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했다.
“어서 와요.”
“실례하겠습니다,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
테이블에 앉아 손등을 내어준 라일라가 미소 짓는다. 기다리는 내내 조급함에 시달리던 총독의 사자는, 고개를 들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뱀 앞에서 공포에 얼어붙은 개구리처럼.
창백한 달빛을 역광으로 등진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그곳에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이 나라를 다스리는 진짜 지배자.
“그래서, 친애하는 총독 각하께서 제게 무슨 말씀을 하셨지요?”
“오, 오셀롯 총독 각하께서…… 급히 베네토 공화국의 수도로 돌아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작령에서의 체류가 다소 길어지기는 했죠.”
라일라가 담담히 말을 잇는다.
“그러나 아직 끝마쳐야 할 일이 남아 있답니다.”
“고, 공작 각하! 하오나 총독께서는 물론 대평의회 역시 각하의 장기 부재에 큰 우려를 표하고─”
총독의 사자가 황급히 목소리를 높이려 했다. 높이려다 말고, 지금 자신이 감히 누구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지를 깨닫는다.
“너무 염려하실 것 없답니다.”
사색이 된 사자를 향해 라일라가 슬쩍 미소 짓는다.
“총독과 평의회에 정중히 전해주세요. 적당한 때가 되면 늦지 않도록 돌아갈 터이니, 너무 조급하게 구실 필요 없다고.”
조급하게 굴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기나 해라.
“게다가 다소 번거롭기는 해도, 여기서 일 처리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것은 감히 일국의 지도자 앞에서 용납되지 못할 중대한 무례였다. 그러나 일개 총독의 사자로서는, 심지어 총독이 직접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여도 그녀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리라.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고된 여행길에 지치셨을 테니, 하룻밤 묵고 가실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해두죠.”
“참으로 황송합니다, 공작 각하.”
라일라의 말에 사자가 송구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하오나 저는 촌각을 다투는 사자의 몸. 감히 공작 각하의 배려를 거절하는 이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흠, 그렇군요. 부디 어리석은 저의 불찰을 용서해 주시길.”
“아, 아닙니다…… 공작 각하.”
총독의 사자는 쏟아지는 식은땀을 뒤로하고 조심스럽게 등을 돌렸다.
분명 그에게는 사자로서 일분일초라도 빨리 움직일 의무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라일라의 배려를 거절한 것은 달리 직업적인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다.
단 한시라도 빨리 이 불길하고 소름 끼치는 땅과 저택을 벗어나고 싶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사자가 도망치듯 말을 몰아 공작령의 저택을 떠나고, 또 하나의 실루엣이 라일라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 기사단장 하이드 경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공작 각하.”
“어서 와요, 하이드 경.”
주군 앞에서 예를 표하는 그림자 기사들의 수장을 향해, 라일라가 말을 잇는다.
“시엔을 위해 적당한 ‘명단’을 준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