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9화 (9/200)

9화. 첫 암살 임무 (1)

얼마 후, 나이트워커 공작 저택 내 광장.

솟구치는 분수 줄기 너머, 흑색의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장엄한 기마(騎馬) 동상이 우뚝 솟아 있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후원을 받는 어느 명망 높은 조각 거장의 작품이다.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고결하고 용맹 넘치는 기사와 말이 아니었다.

훗날 이 세상의 종말이 찾아왔을 때, 재앙을 이끌고 나타날 거라 불리는 묵시록의 4기사 중 하나.

죽음의 청기사, 창백한 말의 기수(Pale Rider)다.

바로 그 기마상을 따라 라일라 나이트워커와 시엔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암살자가 가져야 할 가장 커다란 미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신뢰입니다.”

“그렇지.”

누구도 밤을 걷는 자들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다는 절대적인 신뢰.

“신뢰야말로 우리 가문이 쌓아 올린 그 무엇보다 커다란 자산이란다.”

두려워하지 않는 암살자는 가치가 없다. 일단 누군가의 두려움을 사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그들의 존재를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확실한 신뢰를 쌓아왔지.”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은 조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둠 속에서 모두가 잠든 틈을 타 표적을 살해하지 않는다. 임무를 마친 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유유히 사라지는 법조차 없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대개의 경우, 그들의 방식은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과시적이고 화려했다.

“목격자가 없어도 암살은 성립하지만, 좋은 암살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목격자가 필요하거든.”

“목격자가 많을수록 좋다는 건가요?”

“바로 그거란다.”

라일라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우리의 진실함을 보증하는 증인이 되어줄 테니까.”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은 귀족의 연회장에서, 수천 명의 부대가 격돌하는 전쟁터에서, 또는 시민들이 오가는 대낮의 광장 한복판에서. 보란 듯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적들이 처절한 저항 끝에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지. 그들과 맺은 약속을 깨트리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 행위인지.

사람들의 두려움과 신뢰를 얻기 위해서, 밤을 걷는 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공작 각하.”

그리고 그때였다.

검게 옻칠을 한 쇠가죽 코트 차림의 남자가 정중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와요, 린치 경.”

그 남자는 가문의 그림자 기사였다.

“말씀드린 것은 가지고 왔나요?”

“여기 있습니다.”

“명단을 시엔에게 넘겨주세요.”

라일라의 명령에 따라 그림자 기사가 품에서 무엇을 꺼냈다. 밀랍으로 봉해진 양피지 두루마리였다. 봉랍 표면에는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을 상징하는 「별과 단검」의 문장(紋章)이 새겨져 있다.

그들 가문이 피로 쌓아 올린 절대적 신뢰의 증거.

“이게 뭐죠?”

“펼쳐보렴.”

시엔이 두루마리를 펼친다. 빛바랜 양피지 위에는 적잖은 숫자의 이름들이 직업, 거주지 등의 신상명세와 함께 새까만 흑색 잉크로 기록되어 있었다.

“명부……?”

“어리석은 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명부란다.”

라일라가 차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시엔 역시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블랙리스트─ 살생부다.

죽여야 할 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목록.

“인간이란 참 가엾은 생물이지.”

거기에는 크고 작은 권력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작게는 일개 도시를 지키는 수비대장부터 크게는 귀족과 성직 제후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하찮고 보잘것없는 권력이라도 일단 손에 넣은 순간, 그걸 주체하지 못해서 어쩔 줄을 모르니까 말이야.”

“그래서 이름이 적힌 건가요?”

“그래.”

그들은 부패한 위정자들이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부정과 부패를 일삼고, 나라를 좀먹는 타락한 권력자들.

딱히 누군가의 의뢰를 받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목에 알기 쉬운 보수가 걸린 것도 아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은 절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나라는 하나의 거대한 정원과 같단다.”

라일라가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 커다란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들이지.”

정원사는 정원을 가꾸고 해충과 잡초를 제거한다. 이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잡초는 아무리 뽑아도 금세 자라나지만, 그렇다고 잠깐만 내버려 두면 눈 깜짝할 새 뿌리를 내리고 밭을 뒤덮거든. 권력에 눈이 먼 인간도 마찬가지란다.”

그게 그들이 죽어야 할 이유였다.

달리 거창한 정의감이나 애국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명부에 적힌 자들은 저마다의 어리석은 이유로 조국을 저버렸고, 그 결과 이 나라의 ‘진짜 지배자’들에게 실질적인 손해를 끼친 셈이니까.

그리고 이 나라를 지배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총독이나 평의회 따위가 아니다.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고르렴.”

“이 남자로 할게요.”

“그 이름이 마음에 드니?”

“네.”

라일라의 말에 시엔이 적당한 이름 하나를 골랐다.

【솔즈버그 남작, 54세 남성, 자유도시 실렌체 5대 시의장, 호위로 하급 기사(Knight Bachelor) 3명, 정식 기사 1명을 상시 대동】

누구를 골라도 마찬가지였다.

명단에 적혀 있는 자들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직접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굳이 처리할 필요가 있다면 가문의 충성스러운 사냥개, 그림자 기사를 파견하는 선에서 충분할 것이다.

아마 어린 시엔을 배려해서 일부러 적당한 목록을 추린 거겠지.

“이 남자는 무슨 죄를 저질렀나요?”

“이 명부에 이름이 적히는 자들의 죄는 오직 하나뿐이란다.”

“그게 뭐죠?”

“어리석음이지.”

짐짓 시치미를 떼는 시엔을 향해 라일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그 남자는 시 의회를 매수하고 범죄 길드와 결탁했으며, 뇌물죄, 밀수죄, 탈세, 범죄수익은닉죄, 도박개장죄(賭博開場罪), 사기죄, 약취 · 유인 및 인신매매의 죄 등을 저질렀지.”

“죽어도 싼 놈이네요.”

“세상은 원래 죽어 마땅한 자들로 넘쳐나는 법이거든.”

시엔의 대답에 라일라가 웃음을 터뜨린다.

“일주일을 줄 거란다.”

웃고 나서 라일라가 말했다. 실렌체까지 말을 타고 가는 데 사흘, 오는 데 사흘. 실질적으로 딱 하루의 시간이 주어지는 셈이다.

“그걸로 충분하겠니?”

“지나칠 정도로 충분해요.”

“명심하렴.”

고개를 끄덕이는 시엔에게 라일라가 충고한다.

“우리 가문이 쌓아 올린 신뢰는, 그저 상대의 숨통을 끊기만 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게 아니란 것을.”

“그럼 어디서 생겨나는 거죠?”

천진하게 되묻는 시엔을 향해 라일라가 대답했다.

“진실함이지.”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은 성립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

“사람들에게 우리의 칼날이 얼마나 진실한지 보여주고 그들을 설득하렴.”

어떤 철통같은 경비도 그들 앞에서는 무의미하다는 믿음. 어떤 강대한 권력자나 힘 있는 자도 그들의 칼날을 비껴갈 수 없다는 절대적 믿음.

그런 믿음을 갖도록 설득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다.

“명심할게요.”

* * *

사흘 뒤.

채비를 갖춘 시엔이 말을 몰고 자유도시 실렌체에 당도했을 즈음에는, 때마침 도시의 수호성인(守護聖人)을 기리는 축제가 펼쳐지고 있었다.

광대가 십수 자루 나이프를 양손으로 저글링하거나, 머리 위에 올린 사과를 맞출 때마다 관중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요란한 함성과 박수, 휘파람과 함께 맥주잔이 거칠게 부딪친다. 오물과 돼지 창자가 널브러진 길바닥에도 술이 넘쳐흘렀다. 소란스러운 밤이었다.

‘마침 잘 됐군.’

오가는 이들 속에 섞이며, 망령을 의미하는 새하얀 라르바(Larva) 가면과 검은색 망토를 걸친 시엔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암살 대상을 찾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렇게나 거창한 축제 속에서 도시의 지배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리 없을 테니까.

호화로운 시청사와 성당이 자리 잡은 도시 중앙의 광장. 그곳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힘 있는 자들을 위해 특별하고 고급스러운 여흥이 펼쳐지고 있었다.

베테랑 궁수의 입이 떡 벌어지는 곡예 사격, 일류 광대들의 서커스에 이르기까지.

시엔의 표적, 솔즈버그 남작 겸 시의장 또한 그곳에 있었다. 도시의 유력자들을 위해 특별히 가설된 무대 객석의 가장 앞줄에, 보란 듯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며.

펑, 펑!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오색의 빛깔이 밤하늘을 수놓으며 군중을 사로잡는다. 시엔 역시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암살 대상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직후, 솔즈버그 남작의 곁을 지키고 있던 호위기사 하나가 시엔의 접근을 깨닫는다.

“!”

시엔의 소매 속에서 창백하게 빛나는 칼날의 존재 역시도.

“암살자다! 암살자가 나타났다!”

“의장님을 지켜라!”

스릉!

호위기사 하나가 소드 벨트에 매달린 아밍 소드(Arming sword)를 뽑으며 외쳤다.

세 명의 하급 기사와 정식 기사 하나. 심지어 시의장을 지키는 병력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뭣들 하나! 당장 놈을 포위해!”

“죽이지 마라, 산 채로 사로잡아라!”

이윽고 도시 경비대 소속의 중장병(Man-at-arms)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여 시엔을 가로막았다. 일제히 겨누어진 창날 끝이 시린 서슬을 내뿜었다.

“어리석은 놈이로군.”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의 등장에도 남작은 당황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축제의 소란을 틈타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나? 이깟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접근으로? 우습기 짝이 없구나.”

“…….”

“내가 지금까지 네놈 같은 암살자를 몇이나 상대했을 것 같나?”

남작 겸 시의장이 말했다. 암살자에게 목숨을 노려지는 일 따위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겪었다는 듯이.

“누가 보냈지? 파벨 시장이냐? 아니, 놈에게 그럴 정도의 배짱이 있을 리 없지. 그럼 마르코 부의장, 자네인가?”

“오, 오해입니다, 의장님! 저는 절대로 아닙니다!”

“하기야, 아무리 자네라 해도 이렇게 어설픈 암살자를 고용하지는 않겠지.”

남작 곁에 있던 도시 유력자 하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누구의 의뢰를 받았나? 사실대로 말할 경우, 고통 없이 자비롭게 죽여주마.”

그 말에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시는 더러운 곳이다. 웃는 얼굴로 악수하는 상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비수를 찔러 넣거나, 그날 밤 침실에 암살자를 보내 칼을 꽂는 일이 밥 먹듯 일어나니까.

그런 모략과 책략이 횡행하는 정글에서 시의장의 자리까지 살아 올라온 남자의 배짱이란, 예상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딱 하나, 그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누구의 의뢰도 아닙니다.”

“……뭐라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거든.”

시엔이 대답했다.

동시에 마른 밤바람이 불었다. 시엔이 두른 검은색 망토가 나부끼며 그 밑에 숨겨진 옷차림을 슬쩍 드러냈다.

시커멓게 옻칠을 한 가죽 코트였다. 코트 자락에는 ‘별과 단검’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

그 상징을 보자마자, 시엔을 에워싼 기사들과 중장병들의 표정이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어떻게 몰라볼 수 있을까.

일개 남작이자 시의장 따위의 피라미는 감히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존재들의 상징.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이 피로 쌓아 올린 절대적인 신뢰의 증거.

“서, 설마…….”

별과 단검의 문장을 지닌 암살자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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