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첫 암살 임무 (2)
귀족의 문장을 사칭하거나 도용하는 행위는 커다란 중범죄다. 하물며 다른 것도 아니고 ‘별과 단검’을 훔쳐 쓸 정도로 어리석은 자는 많지 않다.
물론 없지는 않다. 그런데 적어도 살아 있는 자들 중에서는 없다.
“나,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의─”
시엔을 둘러싸고 있는 경비대 소속의 중장병들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몸을 떨었다.
바로 그때였다.
“웃기지 마라!”
솔즈버그 남작이 소리쳤다. 지금까지 보여준 여유와 느긋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서.
“그분들이 고작 나, 나 같은 피라미 따위 하나를 위해 직접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지 않으냐! 가짜다! 저놈은 가짜가 분명하다!”
눈앞의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남작이 필사적으로 손가락질했다.
“호위기사들과 도시 경비대는 뭘 하고 있나! 당장 놈을 죽여! 저놈은 감히 겁도 없이 그분들을 흉내 내고 있는 사기꾼이다!”
늘 이런 식이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칼날에 노려지는 자들은 쉽사리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당신이 믿고 믿지 않고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솔즈버그 남작.”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고 외면해본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 있는 그대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
“믿고 믿지 않고는 어디까지나 그대들의 자유지요.”
그렇게 말하며 시엔이 여유롭게 걸음을 내디뎠다. 바로 코앞에서 겨누어진 창날 끄트머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시에 창끝을 겨누고 있던 중장병들이 시엔 앞에서 물러나 일제히 길을 터준다.
“무슨 짓들이냐! 감히 일개 경비대 따위가 이 몸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이냐!”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남자가, 이제는 아무리 필사적으로 소리쳐도 도시 경비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도시는 그런 곳이다. 그 정도 눈치도 없다면 결코 이곳에서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철컥!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한 중장병들이, 시엔 앞에서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경외하는 밤을 걷는 분을 뵙습니다.”
직전까지 솔즈버그 시의장의 눈치를 보며 아양을 떨기 바빴던 도시의 유력자들도 마찬가지다.
마치 이 나라의 진짜 지배자를 마주하듯이.
그야말로 손바닥을 뒤집듯 냉랭하게 뒤바뀐 공기. 그는 더 이상 이곳의 지배자가 아니었다.
솔즈버그 남작을 지켜야 할 호위기사들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하나 차이점이라면, 그들은 도시 사람이 아니라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란 점이었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긍지 높은 기사란 말이냐!”
남작의 곁에 있는 기사, 장인의 제련 솜씨가 드러나는 강철 갑주로 전신을 무장한 정식 기사가 머뭇거리는 하급 기사들에게 호통쳤다.
“당장 검을 쥐고 주군을 지켜라!”
“송구하나 칼슨 경! 저, 저분께서는…….”
“나,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의 ‘밤을 걷는 자’께서─”
“그것이 어쨌다는 말이냐.”
정식 기사가 부하들을 향해 무거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용서하십시오, 밤을 걷는 분이시여.”
그 또한 시엔의 정체를 의심하는 게 아니다.
기사들의 얼굴에 시엔의 코트에 새겨진 별과 단검의 문장을 의심하는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앞을 가로막는 겁니까?”
“그 어떤 상황에서든 목숨 바쳐 주군을 수호하는 것. 그것이 기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명예롭고 고귀한 사명입니다.”
“그렇군요.”
시엔이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대답했다.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다. 그게 기사란 족속이다. 설령 일말의 승산도 없는 자살 행위란 걸 알아도, 그들에게는 이행해야 할 맹약이 있다. 시엔 역시 이행해야 할 임무가 있었다.
“그대들의 뜻도 그러합니까?”
“저, 저희는…….”
그리고 시엔이 뒤에 있는 하급 기사들에게 물었다.
여전히, 다른 하급 기사들은 현실적인 처세와 기사의 긍지─ 기사로서의 치욕과 죽음의 공포 사이에서 주판을 튕기기 바빴다. 그 모습에 시엔이 무심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나뿐인 목숨이니,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드리지요.”
“이 부끄러움도 모르는 기사의 수치들이─”
하급 기사들의 불명예스러운 모습에 정식 기사가 의분을 토하려던 찰나였다.
스릉.
시엔의 소매 밑에서 섬뜩한 서슬이 빛을 뿜었다.
송곳처럼 예리한 스틸레토 단검이, 독사처럼 눈앞의 기사를 향해 미끄러졌다.
동시에 기사의 손에 들린 아밍 소드가, 시린 서슬을 빛내며 휘둘러졌다.
‘……!’
후웅!
그런데 기사의 검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칼날이 부딪치지도 않고 쇳소리가 울려 퍼지지도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두른 듯 허망한 뒷맛이 느껴질 뿐이다.
시엔이 쓰고 있는 망령 가면처럼, 실체 없는 유령을 상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그림자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듯 칼끝이 공허하다. 호수에 비친 달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것만 같은 위화감.
그제야 깨닫는다.
‘이것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검식인가!’
으레 기사들은 서로의 검을 부딪치며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검은 때때로 말보다 많은 것들을 말해주니까.
그런데 그들은 달랐다.
그들의 검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주고받지 않는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검에 실린 감정은 물론이고 형식과 움직임, 걸음걸이, 칼날의 궤적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도─.
마치 이 세상에서 통째로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망령의 자세」.
극단적으로 기척을 지우고 존재를 감추며, 상대의 칼끝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격돌도 없고 울림도 없다.
그것이 바로 시엔의 칼끝에서 펼쳐지는 소름 끼치는 침묵의 정체였다.
나이트워커 가문에는 크게 뼈대가 되는 아홉 가지 검식이 존재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대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개량되거나 합쳐지며 수십 종류에 가까운 베리에이션을 가진다.
그리고 「최초의 9검식」 중에서 제1식에 속하는 망령의 자세는, 다른 모든 검식의 밑바탕에 깔린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 검술을 배우지 않고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를 자청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정작 그들 가문의 역사를 통틀어 제1식의 마스터에 도달한 자들은 단 네 명뿐이다.
시조 카산 이래, 훗날의 시엔을 포함한 4인의 그랜드 어쌔신.
콰직!
격렬한 전투의 움직임 도중 헐거워진 기사의 갑주 틈을 놓치지 않고, 시엔의 스틸레토 단검이 파고들었다. 경동맥이 목을 지나는 곳이었다.
울컥!
피가 분수처럼 흩뿌려진다. 경동맥을 찔린 기사의 발악도 힘을 잃고 천천히 무너져 내린다.
애초에 이길 수 있을 거란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사의 도를 숭상하고 명예를 중시하는 자로서, 그가 바란 최후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좀 더 기사답고 고결하며 명예로운 전투이길 바랐다.
아니었다.
쿠웅!
기사가 쓰러지며 피범벅이 된 갑주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제 마음의 결정을 내렸나?”
그리고 허울밖에 없는 명예와 목숨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던 하급 기사들에게 시엔이 말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더 이상 눈치를 볼 상관은 없다. 이미 죽었으니까.
“네, 네놈들……! 네놈들이 그러고도 기사란 말이냐!”
도시 경비대 소속의 중장병들, 다른 도시의 유력자들, 심지어 남작을 지켜야 할 직속 호위기사들조차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더 이상 그를 지켜줄 이들은 남아 있지 않다.
겁에 질린 솔즈버그 남작이 도망치려고 등을 돌린다. 하지만 일대를 에워싼 군중의 벽이 결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시엔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왜, 왜 하필 저한테만 그러는 겁니까!”
다가오는 시엔을 향해 솔즈버그 남작 겸 시의장이 소리를 높였다.
“저, 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이 도시의 다른 놈들 모두 똑같은 족속들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처음에는 부정이다. 눈앞의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고개를 돌린다.
“제게 장부가 있습니다! 이 도시에서 부패한 놈들의 싹을 잘라버릴 수 있는 명단도 갖고 있습니다! 다, 다 드리겠습니다! 재산도 작위도, 가진 것들도 모두 드리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다음에는 분노를 느낀 뒤, 체념하고 협상을 하려 든다. 그들이 나이트워커 가문에 줄 수 있는 것 따위는 무엇 하나 없는데도.
시엔이 필사적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남작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손에 들린 단검으로 목젖을 내리그었다.
피가 튀었다.
* * *
“어서 오렴.”
시엔이 공작령으로 돌아왔을 때, 암살자들의 어머니는 다정한 미소로 아들을 맞아주었다.
“아주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더구나.”
“과찬이에요.”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마치 손바닥처럼 훤히 들여다본 듯한 어조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많은 눈과 귀가 있다. 자유도시 실렌체에서 일어난 일 또한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듣자 하니 ‘망령의 자세’를 구사해서 기사를 쓰러뜨렸다지.”
“어머니께서 처음으로 가르쳐주신 가문의 검술이니까요.”
“그래, 그런데 나의 눈과 귀가 조금 이상한 이야기를 하더구나.”
“이상한 이야기?”
시엔의 물음에 라일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대답했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경지였다고.”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시엔이 태평하게 시치미를 뗐다.
“가문의 일원도 아닌 자가 우리 가문의 검을 봤다고 해서, 그 경지를 헤아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음, 확실히 그렇지.”
라일라가 즐거운 듯 말을 잇는다.
“그럼 내 앞에서 다시 보여주겠니?”
스릉.
말과 동시에, 깨닫고 보니 라일라의 손에는 어느덧 시퍼런 서슬을 빛내는 칼날이 들려 있다.
검을 뽑아 손에 쥐는 그 순간까지도 깨닫지 못했다. 아니, 심지어 검을 쥐고 있는 지금도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보이는데도 보이지가 않는다. 들리는데도 들리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데도, 없는 것 같다.
그녀가 성큼 거리를 좁히며 다가올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다. 라일라가 시엔의 코앞까지 다가와 손에 들린 검을 휘두르는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시엔의 몸이 움직였다.
일찍이 시엔을 상대했던 기사가 느꼈던 것과 같은 위화감.
그것은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수장,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직접 펼친 망령의 자세였다.
망령의 자세, 그 이명처럼 제1식에 충분히 숙달된 암살자는 말 그대로 자신의 존재를 없는 것처럼 지울 수 있다.
숨소리나 기척을 지운다거나 하는 레벨이 아니다.
바로 눈에서 칼을 휘둘러도 상대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도.
인간의 인지 능력은 생각보다 협소하다.
가령 넓은 경치를 볼 때,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채롭고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인간의 뇌는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호흡과 신진대사(新陳代謝)─ 인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뿜는 기운과 무의식적인 생명 활동을 극도로 억제하며 존재를 지울 경우, 눈이나 귀 등의 오감으로 볼 수는 있어도 인식할 수는 없다.
봐도 보이지 않고 들려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호수에 비친 달을 마주하는 위화감이 있을 뿐.
극단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암행술(暗行術)의 극의, 자신을 죽이는 검.
아무 이유 없이 최초의 아홉 검식 중에서 「망령의 자세」가 제1식의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니다.
동시에 이 검식이야말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일족들을 진정한 의미의 ‘암살자’로 규정하는 정체성이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가문의 수장,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시엔 앞에서 칼끝을 멈춘다.
망막 위, 불과 몇 밀리미터의 간격을 두고서.
“어째서 동요하지 않니?”
라일라가 말했다.
“……왜 동요해야 하죠?”
“누구라도 갑자기 눈앞에서 칼끝이 겨누어질 때는, 겁을 내기 마련이거든.”
“어머니가 절 해칠 리 없다고 믿었을 뿐이에요.”
시엔이 대답했다.
“게다가 어머니가 펼친 망령의 자세를 제가 무슨 수로 읽어내겠어요?”
당대 제일의 암살자, 라일라 나이트워커가 펼치는 암행술이다. 깨달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시엔의 눈동자는 결코 라일라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비록 몸이 그것을 따라주는 것은 별개로 치더라도.
“처음부터 네 동공이, 내 자세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있더구나.”
“제가 어머니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제 막 가문의 검을 배우기 시작한 시엔이, 그녀의 움직임을 간파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방금 그것이 그녀의 전력이 아니었다고 해도.
라일라 역시 그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데 능숙하다.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시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