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암살자의 검술 (2)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9식의 수련이 끝나자, 어느덧 느지막한 저녁이었다. 이걸로 오늘 일과는 끝이 났다. 하지만 시엔이 향한 곳은 침실이 아니었다.
공작 저택의 지하였다.
어두운 지하 통로와 석벽을 가로질러, 엄중한 결계 앞에서 가문의 인간임을 증명하고 나아갔다.
그 끝에서 시엔을 기다리는 것은 터무니없이 거대한 서고였다.
오직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밖에 열람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도서관.
정식으로 가문의 일원이 된 이후 1년 내내, 시엔은 공작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단 하루도 이곳에 오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어서 오너라, 시엔.”
그리고 홀로 도서관을 지키고 있던 사서가 시엔을 향해 미소 짓는다.
“오늘은 무슨 책을 보려고 왔느냐?”
가문의 최고의 원로이자 콘실리에리─ 루나 나이트워커가 말했다.
시체처럼 창백한 잿빛 피부와 뾰족한 귀.
대륙에서 가장 불길하고 꺼림칙하다고 일컬어지는 이단의 종, 다크 엘프.
그럼에도 그녀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었다.
“제9식에 관한 책을 보고 싶어요.”
“크라켄의 자세를?”
뜻밖의 말에 루나가 의외란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얼마 전까지 망령의 자세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더니, 갑자기 제9식에 흥미를 갖는 것이냐.”
“오늘 어머니께서 가르쳐줬거든요.”
“호오, 1식에 이어 곧바로 9식을……?”
나이트워커 가문의 검식은 그 숫자를 따라 차례대로 배우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제1식 다음으로 제9식을 가르치다니.
“그녀도 참 대담한 구석이 있구나.”
그럼에도 가문에서 가장 지혜로운 연장자는 이내 그 의미를 이해했다.
“잠시 기다리렴.”
그렇게 말하며 루나가 등을 돌린다.
가문의 도서관.
그러나 말이 좋아 도서관이지, 정성스럽게 제본된 양장본(Hardcover)은 얼마 없고 양피지 두루마리, 찢어진 종이 쪼가리 등이 쓰레기통처럼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곳이었다.
그런 수라장 속에서도 루나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어지럽게 뒤엉킨 틈바구니에서 정확히 시엔이 요구하는 내용의 장서─ 내지는 양피지 두루마리와 종이 쪼가리 따위를 추린다.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손바닥처럼 알고 있다는 듯이.
당대 가주, 라일라 나이트워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도서관을 지켜온 사서.
그것이 「콘실리에리」 루나 나이트워커다.
몇 대의 가주들이 뒤바뀌는 와중에도 홀로 묵묵히 이 도서관을 지키며,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이 ‘가족’을 위해 기록한 가르침을 수호하는 창고지기.
“네 선대 중 제9식을 마스터한 이들이 기록한 검결과 검술서란다.”
루나가 가져온 것들을 건넸다.
“편하게 읽고 있으렴. 잠시 커피와 마들렌을 준비해올 테니.”
“고마워요, 루나 님.”
어느덧 루나가 멀어졌고, 시엔의 눈길은 손에 들린 책으로 향했다. 그다음에는 그녀가 추린 제9식의 가르침이 적혀 있는 장서를 훑는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마스터할 수 있는 검식의 숫자는 한두 개, 나아가 3개까지 이른 자는 가문의 역사를 통틀어 넷뿐이다.
‘할 줄 아는 것’과 ‘완벽하게 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거기 적혀 있는 것은, 그런 시엔이 도달하지 못한 9식을 완벽하게 다루는 마스터들의 가르침이었다.
「9식의 극의를 추구하는 그대에게 묻나니,
사람의 다리는 2개, 문어의 다리는 8개, 오징어의 다리는 10개.
크라켄의 다리는 몇 개?」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
그걸 보고 시엔이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그들의 가르침은 보통 검결(劍訣)이라 불리는 형태로 전승된다.
검결, 칼의 노래 또는 검의 시(詩).
기본적으로는 검술의 비전을 남들이 쉽게 해독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강력한 위력을 가진 검식의 검결이 난해하고 복잡한 이유는 달리 있다.
그만큼 심오한 깨달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저 형식이나 동작, 움직임을 모방하는 것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저 너머의 경지.
물론 루나가 시엔에게 추려준 장서 중에는, 제9식의 입문자를 위해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이 첨부된 검술서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시엔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 정도는 진즉에 알고 있으니까.
훗날 라일라의 뒤를 이어 차기 가주이자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될 시엔 나이트워커는, 가문의 아홉 가지 검술 모두에 정통했고 그중에서 3개의 검식을 완벽히 마스터했다.
비록 지금의 미숙하고 어린 육체로는 검식의 위력을 오롯이 끌어낼 수 없다 해도, 머릿속에 온전하게 들어 있는 지식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저 언제 그것을 꺼낼 수 있느냐 하는 시기상의 문제일 뿐.
그렇기에 시엔이 필요로 하는 것은 처음부터 극의에 이르는 깨달음의 열쇠였다.
‘크라켄의 다리는 몇 개?’
상식적으로 떠오르는 대답은 ‘알 수 없다.’이다.
대양의 괴수, 크라켄의 다리는 문어나 오징어처럼 일정한 규칙을 갖지 않는다. 동물이 아니라 마법적인 힘으로 뒤틀린 마수이기 때문이다.
여덟 개일 때도 있고 열 개일 때도 있다. 심지어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어떤 기록에는 무려 아흔아홉 개라고 남겨져 있다. 아마 뱃사람의 허풍이겠지.
애초에 대양 한복판에서 크라켄을 만났는데, 느긋하게 괴물의 다리 숫자나 세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벌써 검결을 해독하려는 것이냐?”
“……루나 님!”
그런 시엔의 곁에, 기척조차 없이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시엔이 고개를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와 함께 부드러운 마들렌을 가져온 루나가 있었다.
1위계 염력 마법 ‘보이지 않는 손’을 이용해, 커피와 과자 모두 주위에 두둥실 떠오르게 한 채로.
“그야말로 책을 읽는 데 정신이 팔렸더구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으레 그렇듯이 기척을 억제하는 것은 직업병에 가까운 행위였으나, 그렇다고 그녀가 대놓고 기척을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검결의 해독에 몰두하고 있는 시엔이 깨닫지 못했을 뿐.
“죄송해요, 루나 님.”
“마음 쓸 것 없다.”
타온 커피를 내주며 루나가 미소 짓는다.
“여기서는 아무도 너를 해하지 않을 테니까.”
그 말에 시엔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가주가 되기 전이나 후나, 그녀는 늘 이곳에서 시엔을 지켜왔다. 시엔에게 가장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장소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9식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벌써 검결의 해독을 시도하는 것은 다소 이르지 않겠느냐.”
흘끗 시엔의 손에 들린 구절을 보며 루나가 말했다.
“루나 님께서는 이 검결을 해독할 수 있으신가요?”
“흠, 글쎄.”
염동 마법으로 두둥실 떠올라 있는 또 한 잔의 커피와 마들렌이, 시엔의 곁으로 움직였다.
“나의 정답이 꼭 너의 정답이란 법은 없을 테니.”
그녀다운 지혜가 깃든 대답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가문 내에서 9식은 그다지 환영받지 않는 검식이다.”
“방어력이 극도로 취약해서, 동등하거나 엇비슷한 상대에게는 효율이 떨어지니까요.”
“그래.”
루나가 말했다.
“망령의 자세는 다른 모든 검식의 기본이자 밑바탕이 되는 검이기에 1식을 차지했고, 거꾸로 크라켄의 자세는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기교를 요구하는 까닭에 9식을 차지했지.”
“검술이라기보다 ‘마법 전투술’ 같기도 하고요.”
“그래, 확실히 검술보다는 마검술의 개념에 가깝지.”
루나가 말을 잇는다.
“어쨌든 그 검결을 기록한 자는, 당대 가주가 경지를 인정하고 9식 마스터의 자격을 하사했다. 나도 역시 그 자리에 입회해 있었고.”
십수 년 전, 어쩌면 백 년도 넘은 과거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마치 어젯밤의 그리운 추억을 이야기하듯.
“그런데 가끔 그런 의문이 들더구나.”
“어떤 생각……?”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는 검식의 경지를 ‘마스터’라고 받아들이는 걸까.”
“…….”
검식의 마스터에 이르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엄격한 절차가 필요하다.
우선 가문 내의 마스터 전원 앞에서 해당 검식을 통달했다는 것을 힘으로 증명해야 한다.
다음에는 하이마스터의 지위를 가진 암살자 과반수의 동의가 필요하다.
끝으로 당대의 가주와 콘실리에리 두 사람의 만장일치 동의가 필요하다.
“그 엄격한 시험을 통과했기에 비로소 9식의 마스터가 된 게 아닐까요?”
“그래, 당대 가주와 함께 나 역시 그가 9식의 극의에 이르렀다고 동의했으니.”
루나의 말에 시엔이 짓궂게 되물었다.
“……혹시 생각이 바뀌신 거예요?”
날카로운 물음에 루나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여전히 가문 내에서 9식은 강자와의 싸움에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기피를 받는 검식이다.”
“…….”
“피라미를 상대로 대량 학살을 펼치는 데에는 9식 외에도 얼마든지 방법이 있지.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사실상 필요가 없는 검식이 아니더냐?”
시엔이 입을 다물었고, 루나가 말했다.
“그럼에도 이 검술이 최초의 아홉 검식 중 하나이자, 그것도 가장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 데는 필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제9식의 마스터라 불린 일족들은…….”
“그들이 정말로 9식의 마스터에 도달했느냐, 하는 점이지.”
“…….”
루나의 말에 시엔이 숨을 삼켰다.
“사실상 검식의 마스터가 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가문의 동의를 받는 것으로 족하다. 그가 진짜 검술의 궁극에 이르렀는지 수학적으로 계량하고 계측할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
그렇게 말하며 루나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그가 생전에 구사했던 제9식은 확실히 강력했단다. 그의 깨달음이나 성취가 결코 거짓은 아니야. 다른 하이마스터조차 단단하게 크라켄의 자세를 펼친 그에게 쉽게 접근할 수 없었거든.”
“당대 가주나 루나 님도요?”
시엔의 당돌한 물음에 루나가 웃었다.
“그럼 걔가 가주가 됐겠지.”
“……그건 그러네요.”
“그도 결국 거리를 좁히는 것만으로 손쉽게 파훼된다는 9식의 본질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단다.”
단지 쉽게 거리를 내주지 않았을 뿐.
나이트워커 가문에서, 규격 외의 강자가 득실거리는 이곳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부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르침을 이정표로 삼되, 결코 목표로 삼지는 말아라.”
가문의 가장 지혜로운 연장자가 말했다. 문득 머리로 망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눈앞의 종이에, 제9식의 전부가 담겨 있을 것이라 넘겨짚은 자신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웠다.
그렇기에 시엔이 손에 들린 검결을 내려놓았다.
내려놓고 나서 곁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이미 정통하기에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장서. 크라켄의 자세, 제9식의 기초가 적힌 검술서였다.
동시에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
아홉 가지 검식 모두에 정통하며, 그중에서 제1식을 비롯해 세 개의 검식을 완벽히 마스터한 암살자들의 아버지.
그렇게 된 시점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로 그 세 가지 검식을 ‘완벽하게’ 통달한 것이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