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암살자의 검술 (3)
이튿날 아침.
어제에 이어 본격적으로 ‘크라켄의 자세’를 배우기 시작한 시엔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휘몰아치는 마력의 일렁임이, 이내 1위계 염력 마법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내달린다.
죽음의 청기사를 상징하는 장엄한 기마상이 우뚝 솟은 광장의 분수대, 그곳에서 솟구치는 물줄기를 향해.
하지만 물줄기는 마력의 손에 잡히지 않고, 그저 손가락 사이로 덧없이 흘러나갈 뿐이다.
명색이 대양의 바다 괴수, 크라켄의 자세를 배우는 주제에 분수의 물줄기 하나 제대로 잡을 수 없다. 그 사실에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오러와 마력의 가장 커다란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니?”
그런 시엔을 향해 곁에 있는 라일라가 물었다.
“음, 그러니까…… 기사는 오러를 쓰고, 마법사는 마력을 써요. 오러는 육체의 힘을 강하게 해주고, 마력은 마법을 쓰게 해주니까요.”
“정답이란다.”
시엔이 짐짓 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10살짜리 아이다운 대답에 라일라가 빙긋 웃는다.
“오러는 평범한 인간이 가진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고,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케 하지.”
기사는 오러의 힘을 통해 평범한 인간의 육체로는 수행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어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서려는 인간의 의지, 그것이 바로 오러의 본질이란다.”
“육체를 극복하려는 의지…….”
오직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자신의 살과 피와 뼈를 초월하려는 인간찬가(人間讚歌)의 의지.
오러의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
엘프나 드래곤, 리치나 뱀파이어 같은 불사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은 결코 오러의 힘을 쓸 수 없다.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있어 ‘불멸의 육체’는 애초에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니까. 오히려 찬미해야 할 신의 축복 그 자체다.
그러나 마력은 그렇지 않다.
“그럼 마력은 뭘까?”
라일라가 빙긋 웃으며 되물었다. 동시에 눈앞에서 콸콸 쏟아지고 있던 분수대의 물줄기가 그 자리에서 멎는다. 그리고 정지했다고 생각한 물줄기가 저절로 떠올라 뱀처럼 미끄러지더니, 시엔과 라일라를 훌라후프처럼 휘감았다.
“……자연을 극복하려는 의지요?”
“정답이란다.
라일라가 흡족함을 표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직후, 두 사람을 휘감고 있는 물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더니 그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하얗고 투명한 서릿발이 빗발치듯 흩날린다.
“자연 속에서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날씨가 따듯할 때는 얼음이 녹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력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자연 그 자체’란다.”
기사는 오러의 힘을 통해 육체의 한계를 극복한다.
그리고 마법사는 마력의 힘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극복한다.
인간을 초월하고 자연을 초월하려는 두 가지 형태의 의지, 그것이 오러와 마력의 본질이다.
“자, 다시 한 번 무엇을 극복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너의 의지를 펼쳐보렴.”
“……알겠어요.”
애초에 그걸 몰라서 물줄기를 못 쥐는 게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설명은, 시엔 역시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완벽하게 이해한 내용이다.
아마 평소의 시엔이었다면 그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어제 도서관에서 들었던 루나의 말이 시엔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뒤흔들어 놓았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마스터의 경지를 칭하는 것일까.
─나는 정말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아홉 가지 검식 중에서 세 가지 검식을 ‘완벽하게’ 통달했나?
애초에 완벽함이란 무엇이지?
이 세상에 그것을 검증할 방법은 없다. 단지 그렇게 불리고 인정받을 뿐.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끝이 아니다. 그것은 설령 시엔 자신조차 예외일 수 없었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그 혼란스러운 감각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런 상쾌함이 지금껏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했다.
상식 중의 상식, 오러와 마력의 차이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물줄기를 쥐지 못했던 것은, 아직 이 육체의 마력 신경이 흐르는 물을 포착할 정도로 정교하게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로는 완벽하게 아는데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머리로 제대로 이해한 게 아니었다면?
그렇기에 의식을 집중한 시엔이 팔을 뻗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을 버리고, 라일라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새롭게 곱씹으면서.
움찔.
분수대 위로 솟구치고 있던 물줄기가,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멈춘 것은 아주 잠시. 문자 그대로 움찔하듯 멈춘 것뿐이다. 묵시록의 4기사, 창백한 말의 기수를 휘감고 있는 분수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물줄기를 콸콸 쏟아내기 시작했다.
“해냈다……!”
그럼에도 시엔이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해냈어요, 어머니!”
보이지 않는 손.
정신의 힘으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마법이자, 마탑과 학파를 불문하고 모든 풋내기 마법사들이 가장 처음으로 배우는 최하급 마법.
하지만 그 간단한 마법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정확히 포착해 움켜쥐는 행동은 절대로 간단하지 않다. 설령 그게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설마 이렇게나 빨리 해낼 줄이야.”
당장에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던 라일라가, 어안이 벙벙해져서 눈동자를 끔벅거리는 게 그 증거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해냈다. 단지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
‘……내가 생각보다 머리가 나쁜가?’
새삼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던 옛말이 떠올랐다.
머리로 완벽하게 아는데 몸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그때까지, 흐르는 물줄기를 움켜쥐려면 최소한 1달 이상의 수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무슨 짓을 해도 몸이 따라주지 못해 실패할 테니까 무슨 말을 들어도 소용이 없을 거라고.
아니었다.
초심으로 돌아간 순간, 감히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자신의 예측을 뛰어넘었다.
“어머니 말대로 하니까, 정말로 됐어요!”
“놀랍구나. 아무리 빨라도 두어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시엔이 활짝 웃었다. 라일라 역시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른스러운 미소를 본 순간,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린아이 같이 좋아하는 모습에 무심코 얼굴이 새빨개졌다.
같은 게 아니라 어린아이였지만.
* * *
그날의 수련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오자, 뜻밖의 얼굴이 시엔과 라일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 시엔! 시엔이다!”
“귀여운 우리 조카가 있네.”
얼핏 보기에 시엔과 비슷한 또래의 쌍둥이 남매였다. 시엔을 보자마자 천진난만하게 기뻐하는 모습마저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구나. 헨젤, 그레텔.”
「마녀 사냥꾼」 헨젤과 그레텔 나이트워커.
나이트워커 가문 내에서도 몇 없는, 두 가지 이상의 검식에 완벽하게 통달한 하이마스터─.
“응, 누나. 제국에서의 임무는 무사히 끝냈어.”
“헨젤 오빠, 언니 앞에서 제대로 경의를 표해야지!”
“앗, 미안.”
여동생 그레텔의 지적에 헨젤이 정중한 몸짓으로 고개를 숙였다.
“우리의 가주, 경애하는 암살자들의 어머니─.”
“쓸데없는 겉치레는 됐단다, 헨젤.”
“아이참! 언니는 너무 오빠한테 무르다니까.”
그레텔이 뾰로통하게 뺨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헨젤 삼촌, 그레텔 이모.”
시엔이 정중하게 그들을 부르자, 두 쌍둥이 남매는 그런 시엔이 사랑스러워 참을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세례 때부터 봤지만, 정말 몰라볼 정도로 자랐다.”
“나, 아까 봤어. 언니가 시엔한테 9식을 가르치고 있던 거.”
“설마 크라켄의 자세를?”
“응! 벌써 ‘보이지 않는 손’을 써서 물줄기를 움켜잡던걸!”
“대단해! 진짜 대단해, 시엔!”
“대단하기는, 시엔한테 이 정도는 기본이지!”
“이 바보 멍청이 그레텔, 그게 어떻게 기본이야!”
“아니야, 시엔한테는 기본이라고! 바보는 오빠야!”
그레텔의 말에 헨젤이 놀랍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지금의 시엔이 마력의 손으로 물줄기를 움켜쥐는 것은, 다시 말해 그런 하이마스터조차 옥신각신 말다툼을 하며 화제로 삼을 정도의 경지를 의미했다.
결국 제9식의 시작과 끝은 보이지 않는 손을 다루는 정교함에 있으니까.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이에요.”
“라일라 언니의 가르침을 받고도 살아남은 가족은 너밖에 없을걸?”
그레텔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세례를 마친 뒤 1년 가까이, 시엔이 라일라 밑에서 겪은 수행은 혹독하다는 말도 부족했다. 물론 요 며칠 간의 수련은 비교적 그런 혹독함과 거리가 멀었지만.
“자랑스러워해도 돼, 시엔. 너는 우리 가족의 희망이니까.”
“…….”
가족.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일족들이지만, 그들은 그 어떤 혈연보다도 강력한 결속으로 묶여 있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에게 있어 세상 사람들은 딱 두 부류였다.
가족과 가족이 아닌 자들.
그 말에 무심코 시엔이 입을 다물었다. 훗날 그들 남매에게 찾아올 미래,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찾아오게 될 비참한 결말을 떠올리며.
결국 시엔은 그들의 희망이 되지 못했다.
“왜 그래, 시엔? 표정이 좋지 않은데.”
“네가 너무 부담스럽게 구니까 그렇지, 이 멍청이 바보야!”
“앗, 그랬나? 미안…….”
헨젤의 지적에 그레텔이 멋쩍은 듯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시엔.”
그런 여동생을 뒤로하고 헨젤이 말했다.
“헨젤 삼촌.”
“너한테 이걸 줄게.”
헨젤이 품에서 무엇을 꺼내 들었다. 흑색의 실크로 정성스럽게 포장된 무엇이었다.
“우리 조카한테 주는 선물이야.”
“선물……?”
“응. 조금 늦었지만, 얼마 전에 10살 생일이 지났잖아.”
그레텔이 의기양양하게 웃었고, 뜻밖의 말에 시엔이 일순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빨리 펼쳐봐! 아마 깜짝 놀랄걸?”
시엔이 머뭇거리며 실크로 포장된 내용물을 개봉했다.
“……!”
흑색의 실크 속에 휘감겨져 있는 것은, 한 자루의 칼날이었다.
매끄러운 광택이 도는 흑단(黑檀) 소재의 칼자루, 그 위로 창백하고 시린 서슬을 자아내는 검신.
바로 그 칼날이, 손잡이의 흑단보다 검고 어두웠다.
칠흑의 단검.
그 자태를 보자마자 시엔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두말할 것 없이 그것은 보통의 단검이 아니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멋진 단검이네요.”
“그래, 멋지지?”
그레텔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이게 말이야, 보통 소재로 된 칼날이 아니거든.”
물론 시엔도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시퍼렇게 빛나는 흑색의 서슬이 상징하는 것을.
“그럼 무슨 칼날이죠?”
그럼에도 태평하게 시치미를 떼며 되물었다.
“다크 미스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강력하다고 일컬어지는 금속, 미스릴(진은). 바로 그 미스릴 광산에서조차 아주 극소량밖에 채굴할 수 없다는 흑진은(黑眞銀).
그런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무기를, 10살 어린아이에게 생일선물로 주다니.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 가문의 방식이다. 심지어 그것은 훗날의 시엔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이 무기에 이름이 붙어 있나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었지. 워낙 악명이 높은 암기였거든.”
그레텔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떤 할 짓 없는 귀족 수집가는 ‘도망칠 수 없는 죽음’ 같은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도 했고, 귀족을 죽이고 그걸 훔친 암살자는 그냥 평범하게 흑검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음, 또 뭐가 있었더라?”
“칠왕국의 왕들 중 세 명이 이 칼에 당했을 때는, 「왕 시해자(Kingslayer)」라는 이름으로 불렸지. 아, 참고로 그때는 내가 쓰고 있었어.”
헨젤이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런데 이제는 네 거니까, 이름도 네가 붙여야지.”
“왕 시해자…….”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네,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역시 우리 조카가 뭘 좀 아네.”
“……우우, 나는 그 이름 좀 촌스러운데.”
헨젤이 흡족하다는 듯 웃었고, 그레텔이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왕 시해자, 왕을 죽이는 검.
훗날, 이 검이 제국의 주인에게 닿는 미래를 그린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이 단검에 걸맞은 이름이었다.
“자, 그럼 이야기는 이쯤 하자꾸나.”
그제야 침묵하고 있던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마침 시엔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단다. 같이 들겠니?”
“응! 먹을래!”
헨젤과 그레텔, 두 쌍둥이 남매가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엔과 다를 바 없는, 영락없는 또래의 어린아이처럼.
* * *
그로부터 몇 달 뒤.
당대 제일의 그랜드 어쌔신, 암살자들의 아버지, 자신의 전부를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온 시엔의 성장세는 경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