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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4화 (14/200)

14화. 데뷔탕트 (1)

몇 달 뒤.

훗날의 자신이 쌓아 올린 경지를 잊고, 그저 순수하게 초심을 되찾은 시엔의 성장세는 경이로웠다.

일찍이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던 자신조차 스스로의 성장에 경악하고, 당대의 그랜드마스터 라일라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시엔이 팔을 뻗는다.

저택의 지하, 그곳은 평소 시엔이 드나드는 가문의 도서관이 아니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자신을 갈고닦을 수 있는 폐관수련장.

흑승지옥(黑繩地獄)의 방.

이제 겨우 10살이 지나 머지않아 11살을 바라보는 미숙한 육체.

머리에 아무리 그랜드마스터로 쌓아 올린 완벽한 경지와 깨달음이 들어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을 거라 지레짐작하며 멋대로 한계를 규정 지었던 육체.

그 손끝에서 마력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제9식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염력 학파, 1위계의 사이킥 마법 「보이지 않는 손」이 내달린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시엔의 주위로 여덟 개의 보이지 않는 손들이 솟아났다. 일찍이 시조 카산이 태어났던 동방 대륙의 악신─ 여섯 개의 팔에 여섯 개의 칼날이 들린 아수라(阿修羅)처럼.

심지어 손의 숫자는 아수라보다 두 개나 더 많았다.

그리고 시엔이 펼친 마력의 손은 더 이상 손에서 그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을 확장하며 그 끝에 새로운 형태가 파생된다.

2위계 염력 마법 「사이킥 나이프」─.

고작 2위계 마법이 뭐가 그렇게 대수냐고 할 수도 있다. 애초에 보이지 않는 손 역시, 마법사들에게 있어 기초 중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최하급 마법이다.

원소 학파, 파괴 학파, 소환 학파, 강령 학파 등등, 대다수의 마법 학파는 마법의 위계가 곧 실력의 척도다.

가령 1위계 마법사는 이제 막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풋내기들이며, 3위계는 어엿한 한 사람의 마법사를 자청할 수 있는 경지. 4위계부터 검으로 따졌을 때 소드 익스퍼트 하급에 해당하며, 7위계 이상의 마법사는 대륙을 통틀어 그 숫자를 꼽을 정도로 적고, 8위계부터는 학파를 창립하고 ‘마탑주’를 자청할 수 있다.

훗날 시엔이 쓰러뜨린 대륙 최강의 마법사 바르무어 후작은 9위계, 검으로는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와 같다.

그런데 염력 학파는 조금 달랐다.

─염력 학파에는 3위계를 넘는 마법이 없다. 이것이 바로 사이킥 마법의 가장 커다란 차별점이었다.

사이킥 마법사들의 경지는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손’을 얼마나 많이, 정교하게, 그리고 얼마나 다양하게 형태를 확장하고 파생할 수 있느냐로 수준을 가늠한다.

가령 지금 시엔이 펼친 2위계 마법, 사이킥 나이프가 보이지 않는 손과 이어져 있는 것처럼.

철컹.

그리고 실내에서 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화르륵!

동시에 어둠으로 가득 찬 방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그곳에 있는 시엔을 집어삼키고 태우기 위해.

그러나 휘몰아치는 불꽃 속에서 시엔이 침착하게 의식을 집중했다.

휘몰아치는 불꽃이 결코 시엔을 태우지 못하도록 염동력의 힘으로 밀어내기 위해서.

쇳덩어리조차 녹일 정도의 화염이 시엔을 휘감고 있다. 그런데 시엔의 몸은 조금도 불타지 않는다.

바로 그때, 불꽃 속에서 시엔을 향해 검은 쇠줄이 쇄도했다.

흑승지옥, 그 이름처럼 뜨겁게 달구어진 검은 쇠줄이 시엔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기 위해 사방팔방에서 휘몰아쳤다.

카앙!

그리고 휘몰아치는 그 쇠줄을 모조리 튕겨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불꽃을 막아내는 낚아채는 동시에, 그 손과 결합된 ‘사이킥 나이프’가 시엔을 향해서 쇄도하는 쇠줄을 모조리 쳐내는 것이다.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불꽃과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쇠줄들. 그 속에서도 시엔은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여덟 개의 팔과 거기에 들린 여덟 자루의 칼날이 시엔을 지켜줄 뿐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 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통제된 환경 속에서다. 실전에서 강자와 검이나 마법을 맞대고 싸우는 와중에는, 절대 이런 식으로 느긋하게 의식을 집중하며 싸울 여유 따위는 없다. 상대 역시 손가락이나 빨며 구경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수련해야 했다. 이런 통제된 환경이 아니라 실전 속에서도 그것을 가능케 할 정도로.

쿠웅!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났을까.

불꽃이 사그라들고 시엔을 찢어발기기 위해 휘몰아치던 쇠줄이 멈춘다.

“시엔.”

그리고 기척조차 없이, 다정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승지옥의 방에서 아홉 시간을 버텨냈구나.”

“이제 슬슬 다음 방으로 가도 괜찮을까요?”

“음, 글쎄.”

시엔의 물음에 라일라가 쓴웃음을 짓는다.

다음 방. 그 말처럼 저택의 지하에 존재하는 수련의 방은 하나가 아니다.

등활지옥, 흑승지옥, 중합지옥, 규환지옥, 대규환지옥, 초열지옥, 대초열지옥, 그리고 아비지옥(阿鼻地獄)─. 합쳐 여덟 개의 지옥을 방불케 하는 수련장 중에서 흑승지옥의 방은 고작 둘째에 불과하다.

“아직 아니란다.”

어린아이처럼 보채는 시엔을 향해 라일라가 나긋이 말을 잇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중요한 일?”

“너의 성장이 예상보다 지나치게 빨라져서, 일정을 다소 앞당기기로 했거든.”

“무슨 일정이죠?”

“모두의 앞에서 너를 보여주는 자리란다.”

라일라가 말했다.

“우리 저택에서 커다란 규모의 사교 모임이 열릴 예정이거든.”

“사교 모임…….”

“친애하는 총독 각화와 대평의회 의원들, 공화국의 유력 가문과 대형 상회의 회장들, 그리고 제국과 왕국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몇몇 특별한 손님이 모일 예정이지.”

대륙 제일의 암살자 가문, 나이트워커 가문의 존재는 결코 베일 속에 꽁꽁 감추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거꾸로였다.

그들은 절대 자신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너를 보여주렴.”

라일라가 말했다. 자신을 보여줘라. 그 말의 의미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우리가 조종하는 꼭두각시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 앞에서 너의 데뷔를 알리는 거야.”

데뷔탕트(Debutante). 엄밀히는 성년에 이른 귀족 여성이 사교계에 데뷔하는 행사를 일컫지만, 소년에 불과한 시엔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어머니.”

시엔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강자들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온 시엔이다. 그런 그들의 손 아래에 춤추는 꼭두각시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은, 지금껏 시엔이 겪어온 시련 앞에서 아이들 놀음에 불과할 테니까.

* * *

그로부터 얼마 후.

별과 단검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비밀스러운 초청장들이 공화국과 대륙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적이라 할지라도.

그렇기에 초대된 손님 중에는 당대 최강의 기사이자 그의 대를 이어 훗날 대륙 최강의 기사로 거듭날, 그란델 대공 가문의 가주와 그의 어린 아들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 * *

이 대륙에 별과 단검의 봉랍(封蠟)이 새겨진 서신을 받고 가슴이 철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돈나 나이트워커.”

“경애하는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위대하신 밤을 걷는 분들께서 우리 조국에 베풀어주시는 헌신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이 나라의 지배자를 자청하는 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총독과 내각 각료, 대평의회 의원들과 유력자 가문, 직접 정치권력을 쥐지는 않았으나 그들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인 가문의 회장들까지.

“환영합니다, 친애하는 총독 각하와 평의회의 의원님들, 그리고 상회(商會)의 회장님들까지─ 모두들 어려운 걸음을 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어요.”

“아, 아닙니다, 공작 각하!”

“귀공 가문의 초청장을 받은 것을 더할 나위 없는 가문의 명예로 여기며─”

“각하의 호의에 그저 몸 둘 바를 모를 따름입니다!”

베네토 공화국에서 제일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들이, 라일라의 손등에 입맞춤하며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신거리고 고개를 조아린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그러나 초대받은 손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로드 나이트워커.”

“어머나.”

그 남자가 자신의 세 아들과 함께 밤을 걷는 자들의 영지를 찾았을 때는, 라일라조차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의 화려한 금색 코트 위에는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에 사자의 하반신을 가진 신수, 그리폰(Griffon)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다.

제국의 가장 충성스러운 칼날, 그란델 대공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

“설마 그란델 대공 각하께서 우리 가문의 초청에 화답하실 줄이야.”

“귀공의 가문은 늘 우리를 놀라게 해주니 말이지.”

“그것참 영광스러운 말씀이군요.”

금색 코트 차림의 남자는 암살자들의 어머니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드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대륙에 그 정도 배짱을 가진 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이윽고 그란델 대공이 라일라의 곁을 지키는 어린 시엔을 향해 흘끗 고개를 돌렸다.

“…….”

돌리고 나서는, 라일라 앞에서조차 무너지지 않았던 강철 같은 표정에 희미하게 동요가 깃들었다.

“인사드리렴, 시엔. 이분이 바로…….”

“시엔 나이트워커, 경애하는 오스왈드 그란델 대공 각하를 뵙습니다.”

검마(劍魔) 오스왈드 그란델.

훗날의 시엔에게 있어 최악의 적이자, 검성이라 불리게 될 ‘오스카 그란델’의 아버지이며 당대 가주.

마찬가지로 오스왈드의 곁을 지키는 세 아들들이 차례차례 예를 표했다.

18살의 장남 오베르트 그란델, 17살의 차남 오벨 그란델, 그리고─

“오스카 그란델,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와 장남이신 시엔 공을 뵙습니다.”

장남 시엔. 그런데 장차 그란델 가문의 차기 가주로 거듭날 미래의 검성 오스카는, 정작 가문 내에서 후계 서열이 가장 낮은 삼남이자 고작 12살짜리 꼬맹이였다. 시엔보다 위로 겨우 2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런 핏덩어리가 장차 그란델 가문의 가주가 된다고?’

물론 10살의 시엔이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대륙에서 가문을 잇는 것은 철저한 장자 상속이 규칙이다. 그저 첫째란 이유 하나로 가문의 전부를 물려받고, 그것은 설령 대공 가나 황가라 해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 규칙이다.

그런데도 가장 서열이 낮은 오스카가 훗날 그란델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의미였다.

‘친족살해’.

사람은 겉보기에 알 수 없다. 검의 성자라 불리게 될 저 소년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한낱 우물 속 개구리에 불과한 우리 아들들에게는,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소.”

가주 오스왈드가 말했다.

“그리고 귀공의 가문처럼 이 세상이 넓다는 경험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존재들도 없지.”

“그것참 영광스러운 말이군요.”

라일라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들의 영지는 작고 비좁기 이를 데 없는 한 줌의 땅에 불과하답니다. 감히 그란델 대공 가의 광활한 영지에 비할 바는 아니지요.”

“땅이 세상 전부는 아니니까 말이오.”

“어머나, 아니었던가요?”

“잘 보아라, 나의 아들들아.”

검마 오스왈드가 담담히 말을 잇는다.

“너희는 장차 우리의 제국을 수호하는 충성스러운 칼날이 되고, 제국을 위협하는 적들에 맞서 검을 쥘 날이 올 것이다.”

강철처럼 엄격한 아버지의 목소리로.

“그렇기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너희들도 필히 봐두어야 할 것이다.”

“예, 아버님.”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그 우물 바깥의 세상에는 얼마나 터무니없는 괴물들이 우리 제국을 위협하고 있는지를.”

제국의 가장 충성스러운 칼날, 그란델 대공 가문의 가주가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괴물들이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일촉즉발의 공기가, 그대로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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