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데뷔탕트 (2)
“이것이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괴물들이다.”
검마 오스왈드의 말에 라일라를 지키는 그림자 기사들, 마찬가지로 그란델 대공 가를 보좌하는 호위기사들이 칼자루 위에 손을 얹고 발도 자세를 취했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맞서 싸울 것처럼.
“아, 괴물이라.”
바로 그 순간, 시린 냉기가 일대에 내려앉는다. 시엔조차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운 서릿발.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얼어붙을 듯 차가운 미소와 함께 말을 잇는다.
“설마 신성 제국에서 ‘검의 악마’로 칭송받는 각하의 입으로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참으로 영광스러운 말씀이네요.”
“시시한 조롱이로군.”
그곳에서 홀로 유일하게 라일라의 냉기에 압도되지 않는 강자, 검마 오스왈드가 코웃음을 쳤다.
“이 섬뜩하고 시린 냉기를 피부에 똑똑하게 새겨두어라, 나의 아들들아.”
그리고 그에 뒤지지 않는 열기를 내뿜으며 그란델 대공이 말했다.
“이곳에는 너희를 지켜줄 온실도, 우물도 없다.”
온실 밖, 우물 바깥의 세상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혹독한 세상이다.
“흠, 아들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엄격하고도 자상한 마음씨란.”
라일라가 남의 일처럼 능청스럽게 웃는다.
“대공 각하의 말씀처럼, 온실 속 화초로 성장하신 도련님들께서도 깨닫게 될 거랍니다.”
“무엇을 말이지?”
“이 세상이 얼마나 냉혹하고 차가운지를.”
“그것참 기대되는 가르침이로군.”
대륙 제일의 암살자 가문을 이끄는 수장,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는다.
자신의 곁을 지키는 어린 시엔을 바라보며.
* * *
베네토 공화국에서, 더 나아가 대륙 각지에서 초청장을 받은 ‘상류 사회’의 손님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화국의 총독과 평의회부터 제국과 왕국의 일부 강자와 대귀족들, 나이트워커 가문의 재정적 후원과 지지를 받는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밤을 걷는 자들의 대지, 나이트워커 공작령은 결코 어둠 속에 숨겨져 있지 않다.
그렇게 각국의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교 모임을 이루거나 예술 작품들을 감상하고 공작 가문의 여흥을 즐기는 사이─.
그중에서 손님들의 가장 커다란 이목을 끄는 구경거리가 막을 열었다.
일찍이 시엔이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린 공작령의 지하 콜로세움. 공석은커녕 있는 자리마저도 미어터질 정도로 사람이 가득 찬 바로 그곳에서,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라일라의 어린 아들이 투기장 위에 내던져진 모습을.
‘모두의 앞에서 제 아들의 실력을 과시하려는 셈인가.’
특등석에 앉은 그란델 대공이 시엔을 보며 생각했다.
‘저 아이는 위험하다.’
처음 시엔을 봤을 때 느꼈던 그의 직감.
위험하다? 아니, 그런 말로도 부족하다.
소름이 끼쳤다.
대륙 제일의 암살자 가문,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에 대해서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검마 오스왈드야말로 아마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그들의 악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자일 것이다.
수많은 밤을 걷는 자들이 그의 칼날 앞에 쓰러졌다. 더 나아가 그녀, 암살자들의 어머니와 싸우고 멀쩡히 목이 붙어 있는 사람은 아마 대륙을 통틀어 그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괴물이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아이의 데뷔 무대다.
당대 최강의 기사는 어느 때보다 주의 깊은 표정으로 투기장 위의 어린 암살자를 향했다.
쿠웅!
이윽고 투기장의 철문이 열린다. 그리고 철문 너머에서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그란델 대공조차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미노타우로스, 좀 더 과시해봐야 갑주를 입히고 있는 철갑 마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 있는 것은 마수조차 아니었다.
전신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목 없는 기사, 듀라한(Dullahan)이다.
* * *
참으로 까다로운 상대다.
투기장 너머의 상대를 보자마자 시엔이 든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목 없는 기사, 듀라한.
비록 마스터 수준의 검술을 구사하는 ‘죽음의 기사(Death Knight)’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그것이 결코 상대를 얕잡아볼 이유는 될 수 없다.
당장 놈의 칼날에 깃든 서슬 퍼런 오러가 그 증거다.
흑마법으로 되살린 망자의 강력함은 술사(術士)의 영향력도 적지 않지만, 그 이상으로 생전의 강함이 중요하다. 그런데 저 목 없는 기사의 검에 휘감겨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오러 블레이드, 오직 ‘인간’밖에 쓸 수 없는 인간찬가의 의지다. 비록 그게 썩어 문드러져 있는 시체라 할지라도.
‘오러의 밀도나 정교함을 봤을 때, 생전의 경지는 아무리 못해도 소드 익스퍼트 이상.’
공식적으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런 데뷔의 장에서는, 최고의 활약을 펼칠 수 있도록 시엔을 배려해줘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라일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 났네.’
오히려 상성 자체를 놓고 볼 때는 최악이다 못해서 끔찍할 지경이었다.
당장 눈앞의 상대는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다.
지금의 시엔이 구사하는 망령의 자세로는 망자의 앞에서 자기 존재를 감출 수 없다. 아무리 초심으로 돌아가 깨달음을 얻었니 어쩌니 해도, 저 정도의 망자 앞에서 무의식중에 내뿜는 생명의 기운을 완벽히 지우기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저 전신 갑주가 특히 성가셔.’
강철을 뚫기 위해서는 오러가 필요하다.
그런데 정작 시엔이 몇 달 가까이 죽어라 수련한 염력 마법, 보이지 않는 손과 사이킥 나이프에는 ‘오러’를 실을 수 없다.
마법과 검, 마력과 오러. 자연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절대 인간찬가의 의지와 섞일 수 없으니까.
마치 인간과 자연이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듯이.
오러 없이는 강철을 뚫을 수 없다. 차라리 산 사람이 상대일 때는 전투 도중 갑주의 틈새를 벌리고 노리는 식으로 공격할 수 있다. 사이킥 나이프를 아주 예리하고 날카롭게 벼려서 강철판의 틈새에 송곳처럼 찔러넣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사이킥 나이프가 아니더라도 오러를 쓰지 못하는 기사들끼리 펼치는 ‘대 갑주전투술(Harnischfechten)’의 공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눈앞의 상대는 이미 죽은 망자. 갑주 틈새의 경동맥에 칼날을 꽂는다고 해서 멈출 일 따위는 없다.
‘일부러 내가 배운 기술 전부가 무의미해지는 상대를 고르다니.’
타앗!
오러가 실린 검을 쥐고 목 없는 기사가 땅을 박찼다. 마찬가지로 뼈밖에 없는 몸뚱이를 오러의 힘으로 강화하며, 터무니없는 각력(脚力)과 함께 거리가 좁혀졌다.
카앙!
시엔의 손에 들린 칼날이 맞부딪친다. 마력을 통해 생성한 사이킥 나이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시엔을 위해 손에 들려 있던 ‘기사 검’이었다.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러는 강철을 종잇장처럼 벨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러 없이는 오러가 실린 검과 맞부딪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두 자루의 칼날이 부딪쳐 쇳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를 의미했다.
* * *
“대공 각하의 셋째 아들, 오스카 공자님께서 무려 12살의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에 도달했다는 명성이 무척 자자하더군요.”
소드 익스퍼트(특급 검사).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는 경지의 기사. 범재는 평생을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며, 제국 제1기사단의 최고 엘리트조차 성년이 되기 전에야 겨우 도달할 수 있다는 영역.
“고작 12살 나이에 특급 검사가 되어 오러 블레이드를 펼칠 수 있게 되다니, 오스카 공자님의 검술 재능이란 대륙 역사에서도 그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라죠.”
그란델 대공의 바로 옆좌석, 마찬가지로 콜로세움 최고 특등석에 앉은 라일라가 즐거운 듯 말했다.
무대 위에서 오러 블레이드를 펼치고 있는 자신의 10살짜리 아들을 뒤로하고.
“…….”
대륙 최강의 기사 가문, 최고의 검술 재능을 갖고 검에 일평생을 바치며 살아온 그란델 대공 가문의 이들 모두가 경악하며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필시 속임수를 쓰는 게 틀림없습니다, 아버님.”
장남 오베르트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설마 10살 나이에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다니, 절대 불가능합니다. 천하의 막내조차 12살의 끝자락에 겨우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가 아닙니까.”
“아, 참으로 귀여우신 우물 속의 공자님.”
그런 오베르트를 향해 라일라가 차갑게 웃는다.
“우물 바깥에 펼쳐진 바다를 보고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자님의 자유랍니다.”
“당장 입을 다물어라, 오베르트.”
장남의 말마따나 속임수라도 쓴 걸까. 검마 오스왈드조차 일순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시엔이 보여준 경지는 보고도 믿기 어렵다.
‘아니,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대륙 최강의 기사, 자신의 눈마저 속이는 게 가능할 리 없다. 게다가 나이트워커 가문은 절대, 절대로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흉명을 직접 겪어본 자일수록 그들 가문의 진실함을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그들이 신뢰에 대해 갖는 집착은 가히 병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 정도로 신뢰에 미친, 어느 의미에서는 ‘진실한 미치광이’들이 이런 데 속임수를 쓸 리 없다.
‘그럼 설마 정말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아들들에게 바깥세상의 냉혹함을 가르쳐 주기 위한 자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오스왈드는 자신의 셋째 아들, 오스카야말로 대륙 제일의 검술 재능을 가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제는 아니었다.
그 역시, 우물 속에 갇혀 바다의 넓이를 헤아리지 못한 개구리에 불과했으니까.
* * *
인간의 찬가를 부르짖는 기사가 눈앞에 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극복하고 넘어서려는 의지, 오러.
그 말처럼 눈앞의 기사는 목이 잘리고 죽어 있음에도 멈추지 않는다. 목이 잘리고 부패하며, 육신이 추하게 썩어 문드러지는 와중에도 망집처럼 검을 쥐고 휘두를 따름이다.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오러를 검과 썩어 문드러져 있는 백골에 덧씌우며─.
‘저게 정녕 인간찬가의 의지라고?’
머리도 달려 있지 않은 주제에.
자기가 무엇을 위해 살과 피와 뼈를 초월해 싸우려는지도 모르겠지.
그 몰골이 너무나도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웠다.
‘아니, 살아 있는 기사들이라고 뭐가 다르지?’
명예라느니 기사도라느니 떠들어대는 머저리들 모두가 마찬가지다. 목 위로 골통이 달려 있든 없든 기사란 족속들은 별 차이가 없다.
‘진짜 망령은 네놈들이다.’
전의를 가다듬으며 시엔이 자세를 취했다.
지금 시점에서 사이킥 나이프는 통하지 않고, 그렇다고 진검으로 제9식을 펼치자니 당장 손에 들린 검이 달랑 하나다.
‘그냥 검술로 쓰러뜨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카앙!
오러와 오러가 맞부딪쳤다. 그리고 칼날이 부딪친 그 상태로 목 없는 기사가 거리를 좁히며 칼자루 끝의 무거운 폼멜(Pommel)을 둔기처럼 휘둘렀다.
그 특징적 움직임, 검세가 무척 낯이 익었다.
쉽게 거리를 허락하지 않고, 칼이 부딪치거나 격돌하고 있는 상태로 물러서지 않고 적극적으로 소드 레슬링(Kampfringen)을 펼치는 저돌적 검식.
망자가 되고 훼손되며 그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쌍두독수리의 자세」!’
신성 제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무력 조직이자 제국 제1기사단의 엘리트 기사밖에 익힐 수 없는 고유 검식.
그제야 깨달았다. 라일라가 시엔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
그녀는 보여주려는 것이다.
신성 제국의 긍지 높은 기사가 진즉에 목이 잘려 썩어 문드러지는 와중에도 비참하게 발버둥 치는 몰골을. 그 망집과 같은 인간찬가의 의지를 시엔의 손으로 끊어내는 모습을.
바로 저기 앉아 있는, 신성 제국 최강의 기사 앞에서.
“「망령의 자세」.”
나지막이 중얼거린 시엔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제1식.
자신의 존재나 기척을 감추기 위함이 아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아홉 검식은 검과 마법의 경계마저 초월하는 이능의 영역에 속해 있으나, 그 기이한 능력과 별개로 자세의 바탕이 되는 것은 결국에 검술, 검을 움직이는 기술과 방법에 있다.
유혹하듯 거리를 좁히고 벌린다. 맞부딪치지 않고 망령처럼 상대의 허를 찌른다.
오직 그것을 위해 공격을 유도하고, 쌍두독수리의 자세가 ‘소드 레슬링’이라 불리는 무투술을 펼치려 드는 찰나.
전력으로 부딪칠 것처럼 다가섰던 시엔이 망령처럼 거리를 벌렸다.
시엔의 백스텝에 홀리듯, 목 없는 기사의 강공격이 허공을 갈랐다.
‘지금이다.’
촤악!
어차피 목은 없다. 그렇기에 검을 쥐고 있는 팔을, 오러의 칼날로 갑주째로 어깻죽지부터 베어 내렸다. 팔이 떨어졌다. 그러나 설령 팔이 잘리고 검을 놓치는 정도로 쌍두독수리의 자세는 멈추지 않는다. 팔 하나, 다리 하나로 끝까지 싸우려 들 테니까.
‘사지를 자른다.’
이게 쌍두독수리의 자세를 상대하는 이론상 가장 깔끔하고 알기 쉬운 파훼법이었다.
두 팔이 잘리고 돌격해야 할 두 다리가 잘린다.
팔과 다리와 목까지 잘린 기사의 몸뚱이가 비로소 땅에 처박혀 꿈틀거린다. 아직도 놈의 몸에 깃들어 있는 의지가 발악하는 증거다.
그 모습을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시엔 나이트워커가 검을 역수로 고쳐 잡는다.
콰직!
칼끝이 세로로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