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7화 (17/200)

17화. 데뷔탕트 (4)

루시퍼의 자세.

최강의 천사 미카엘의 대척점에 있는 ‘떨어지는 샛별’ 루시퍼.

신성 제국에서는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의 검식.

더 이상 이 자리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천사의 날개는 없었다. 그저 검고 어두운 흑익(黑翼)이, 12장의 악마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저, 저 자세는 설마……!”

두 사람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의 표정에 경악의 빛이 깃들었다.

쿠웅!

바로 그때였다.

딛고 있는 땅이 요동치고 지축이 흔들렸다. 지진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정도의 박력과 함께 위엄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까지다.”

황금빛 코트를 걸친 남자가 어느덧 오스카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 승부는 무승부다.”

“아버님, 아직 저는 패배하지……!”

“닥쳐라.”

등 뒤에서 오스카가 뭐라 말을 이으려 했다.

퍽!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칠 새도 없이, 검마 오스왈드의 손에 들린 칼자루가 오스카의 복부를 강타했다. 등 뒤로 펼쳐진 열두 장의 날개가 덧없이 소멸하고, 헛구역질과 함께 그대로 몸이 무너져 내렸다.

“마차를 준비해서 오스카를 곧장 대공령으로 돌려보내고, 내가 갈 때까지 지하 감옥에 유폐시켜라.”

쓰러진 아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공이 곁을 보좌하는 기사들에게 차갑게 명령했다.

명령을 내리고 나서는 고개를 돌린다. 그의 눈앞에 있는 시엔이 아니라, 그 뒤에서 차갑게 미소 짓고 있는 이 무대의 진짜 설계자를 향해.

“처음부터 이걸 노렸나.”

“노리다니, 무엇을 말이지요?”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태평하게 시치미를 뗐다.

“저는 그저, 오스카 공자님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랍니다.”

이 여자는 알고 있었다.

어째서 처음부터 아들의 재능을 감추지 않았나.

모두 그녀의 계획이다. 지나칠 정도로 올곧고 철없는 오스카가, 시엔의 빛나는 재능을 보고도 결투를 신청하지 않을 리가 없을 테니까.

아버지가 절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일부러 자신의 감시를 피해 다가올 것 역시도.

그 과정에서 오스카가 느끼게 될 절망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감히 내 아들을 망가뜨리려 들다니.”

이 싸움을 통해서 오스카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지고 확실하게 ‘망가질’ 것이다. 아무리 오스카의 재능을 신뢰하는 그조차 아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하게.

게다가 그 패배를, 이곳에 있는 모두가 보고 말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보기 좋게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이다.

“Familie ist alles(가문이 전부다).”

대륙 최강의 기사, 검마 오스왈드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읊조림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눈앞의 어린 시엔을 향해서.

아무런 자세도 아니다. 아무런 기교도 없다. 그저 우직하게 휘두를 따름이다.

그런데…… 피할 수가 없었다.

몸이 얼어붙어서 움직일 수가 없다. 죽음의 공포가 시엔의 척수를 타고 내달렸다.

카앙!

보고도 알고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일격. 그리고 그 일격을 맞받아치며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칠흑의 드레스 자락을 흩날리며, 시엔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있었다.

심지어 검을 뽑아 맞서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벨벳 드레스의 소맷자락으로 검마의 일격을 맞받아치고 있었다.

일대에 있는 귀족들이 두 강자의 기 싸움에 압도되며 얼어붙는다.

“아이들 싸움에 어른이 끼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꼴도 없죠.”

라일라가 차갑게 조소했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말했듯, 이것은 아이들 사이의 작은 여흥일 뿐이랍니다.”

라일라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게다가 아드님들에게 우물 밖의 세상을 알려주길 바란 것은, 오히려 대공 각하의 뜻이 아니었나요?”

“…….”

“대공 각하와 아드님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어, 저로서도 무척 영광이랍니다.”

그 능청스러운 태도에 피가 거꾸로 솟고 모욕감에 몸이 떨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여기는 암살자의 영지다. 어느덧 기척을 감출 의지조차 없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괴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사방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하이마스터 놈들…….’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 끝에 그란델 대공이 검을 칼집에 집어넣고 묵묵히 등을 돌렸다.

“대공령으로 돌아갈 채비를 해라.”

등을 돌린 검마 오스왈드가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 * *

대륙 제일의 검술 천재, 오스카 그란델은 더 이상 대륙 제일이 아니다. 그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나이트워커 가문의 장남, 시엔 나이트워커다.

심지어 시엔이 가진 재능은 검술이 다가 아니었다.

그 아이는 마법까지 쓸 줄 알았다. 어쩌면 대륙 제일의 마법 재능을 가졌다는 바르무어 후작 가문의 장남보다도 더 잘.

* * *

1년 뒤.

공화국 영토 내에서 열두 차례의 암살 임무 성공, 염력 학파 2위계 마스터에 도달.

2년 뒤.

샤를마뉴 왕국으로 도망친 공화국 망명자의 암살에 성공, 제1식 ‘망령의 자세’의 숙련 경지에 도달, 원소 학파 3위계 익스퍼트에 도달.

3년 뒤.

제9식 ‘크라켄의 자세’의 숙련 경지에 도달, 내전이 발발한 칠왕국 군도에서 공식적으로 형제 비고와 함께 비밀 임무에 성공.

4년 뒤.

제5식 ‘가시나무의 자세(Thorn Stance)’를 익히기 위한 개조 시술에 성공.

그리고 이듬해 5년 뒤, 15살.

친애하는 시엔에게─.

가문의 밤매(Nightfalcon)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시엔에게 서신을 가지고 왔다. 여느 때처럼 아들의 상태를 묻고 염려하는 어머니로서의 글이 아니었다.

임무가 끝나는 즉시 저택으로 돌아오렴.

시엔을 공작령으로 소집하는 가주의 명령이었다.

라일라의 서신을 읽은 시엔이 종이를 잘게 찢어서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시엔의 어깨 위에 앉아 있었던 밤매가 푸드덕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끼룩, 끼룩!

멀어지는 밤매를 뒤로하고 고개를 돌렸다.

공화국 중남부의 항구도시, 살레르노(Salerno).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이 도시는 베네토 공화국을 지탱하는 해상 무역의 거점 중 하나다.

그런데 수평 너머로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을 즈음부터 도시 전체가 쥐 죽을 듯한 침묵에 잠겨 있다. 항구도, 부둣가도, 거리도, 심지어 광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정도 규모의 대도시가 이토록 빨리 잠에 빠질 리가 없다.

공화국의 도시는 아무리 밤이 깊어도 잠에 빠지는 법이 없다. 그런데 어둑새벽이 밝을 때까지 북적거려야 할 거리에는 쥐새끼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엔이 이곳까지 온 이유였다.

“이보게, 자네 정신 나갔나!”

바로 그때, 거리를 이루고 있는 석조 주택가 2층에서 남자 하나가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이 시간에 도대체 어딜 싸돌아다니고 있어!”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서, 설명할 시간이 없어! 목숨이 아깝거들랑 당장 가까운 목로주점이나 성당으로 대피하게! 빨리!”

“아, 그것참 감사…….”

쾅!

시엔이 미처 감사를 표할 틈도 없이, 남자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창문을 닫았다. 그 모습에 시엔이 멋쩍은 듯 고개를 긁적이며 걸음을 옮겼다.

석조 주택이 늘어서 있는 돌길, 등 뒤로 황혼의 어둠이 조금씩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

얼마나 걸었을까. 석조 주택가를 벗어나 광장으로 들어설 즈음, 날카로운 첨탑이 솟은 고딕 양식의 성당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형제님.”

그리고 성당 입구, 위엄으로 가득 찬 파사드(Façade)를 지키는 사제가 시엔을 향해 다가왔다.

“성당으로 몸을 피하란 충고를 듣고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요 몇 주 사이 도시에 워낙에 뒤숭숭한 일이 많아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것이…….”

말을 이으려다 말고 사제가 흘끗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시, 시간이 늦었습니다! 어서 성당에 들어가 몸을 대피하고 계시지요. 여기는 주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소, 악의 손길로부터 형제님을 지켜드릴 겁니다.”

“이야, 그것참 믿음직하네요.”

시엔이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몇 걸음을 옮기고 나서 등을 돌린 채로 시엔이 물었다.

“사제님께서는 들어오지 않습니까?”

“아, 그, 그것이…….”

수상하게 말을 더듬거리며 사제가 대답했다.

“저, 저는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를 길 잃은 어린양을 지켜야 하기에…….”

“참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조소에 가까운 미소를 짓고서 시엔이 마저 걸음을 옮겼다.

촛불이나 조명 하나 없이 어둠이 짙게 깔린 예배당 내부. 예배석과 대리석 기둥이 장엄하게 늘어선 신랑(身廊)을 가로질러 그 끝을 향했다.

제대 위에는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쓰이는 황금빛 잔에 적포도주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요 몇 주 사이, 도시에서 적지 않은 숫자의 실종자가 발생했고, 개중 몇몇이 피가 빨린 채로 부두 앞바다에서 떠올랐지.”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시엔이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시커멓게 옻칠을 한 쇠가죽 코트, 검고 매끄러운 광택이 감도는 옷자락 위로 별과 단검의 상징이 새겨져 있다.

“그런 와중에 마땅히 오갈 데도 없고 돈까지 없는 양들이 향할 곳은 하나뿐이지.”

예배당을 따라 시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글부글.

동시에 제대에 놓여 있는 황금빛 잔 속의 포도주가 멋대로 끓어오르며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것은 포도주조차 아니었다.

콰직!

금빛 잔이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잔 속에 담겨 있던 혈액이 산탄처럼 시엔을 향해 쇄도했다.

1위계 혈마법, 블러드 볼트.

“걸리지 않을 줄 알았나?”

그러나 산탄처럼 쏘아진 핏방울들이 시엔을 꿰뚫는 일은 없었다. 시엔이 딛고 있는 대리석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방패처럼 솟아올랐으니까.

1위계 원소 마법 「대지의 벽」.

콰앙!

바로 그 순간, 대리석 방패를 세워 올리기 무섭게 산산이 부서지며 그 너머로 그림자가 쇄도했다.

보랏빛 주교복 차림의 남자였다. 그것도 지팡이 없이는 걷기조차 힘들어 보일 정도로 작달막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하며, 미라처럼 앙상하기 짝이 없는 노구.

바로 그 몸에서 믿을 수 없는 힘과 속도가 뿜어져 나와 대리석 벽을 부수고 무방비하게 등을 돌린 시엔을 향해 일격을 휘둘렀다.

촤악!

짐승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미끄러져 핏빛의 궤적을 그렸다.

카앙!

그리고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오, 이것 참…….”

칼날이 맞부딪친 게 아니다. 시엔의 칼날에 부딪힌 것은 핏빛 손톱이었다. 마치 짐승처럼 길고 날카로운 서슬을 자랑하는 혈조(血爪).

“다 죽어가는 이 늙은이가 감히, 참으로 위대하신 밤을 걷는 자를 뵙나이다…….”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름과 함께 세월의 풍파를 알 수 있는 얼굴. 나이가 들며 키도 쪼그라들고 등까지 굽어 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낯빛이 창백하고 두 눈동자에 시뻘겋게 핏발이 서 있다.

“나이 먹고 주책이란 말도 못 들어보셨나.”

시엔이 죽여야 할 상대는 알기 쉬운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 나라는 하나의 커다란 정원이고, 그들은 대대로 이 거대한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들이다. 그들의 정원을 해치는 것은 잡초든 살아 있는 인간이든 용납될 수 없다.

설령 그게 인간을 뛰어넘는 불사의 괴물, 뱀파이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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