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밤과 피의 주인 (1)
시엔이 죽여야 할 대상은 알기 쉬운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힘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불사의 괴물, 뱀파이어다.
“오오, 나이트워커 가문의 시엔 공자님. 공자님의 재능과 명성에 대해서는 저 역시 익히 알고 있답니다.”
뱀파이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다.
“그런데 듣자 하니, 이제 겨우 15살이 되셨다지요?”
“그래서 어쩌란 거지?”
“설마 천하의 그분들께서, 이토록 젊고 어린 양을 보내올 줄이야!”
뱀파이어가 두 팔을 벌리며 광희했다. 마치 대어가 낚싯줄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낚시꾼처럼.
“밤을 걷는 자의 피는 얼마나 싱싱하고 달콤할지, 매일 밤 상상했습니다! 하물며 그게 공자님처럼 어리고 앳된 아이의 피라니! 피 맛도 보지 못하고 도망치지 않게 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제대로 도망칠 수나 있고?”
“오오, 다행스럽게도 이 불사의 육체가 제게 가르쳐주었답니다.”
뱀파이어가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암, 도망칠 수 있고말고요.”
타앗!
시엔이 칼자루를 고쳐 잡고 쇄도했다. 일찍이 그의 삼촌, 헨젤이 준 ‘왕 시해자’란 이름의 흑검(黑劍)이었다.
카앙!
그리고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엔의 검에 깃들어 있는 오러 블레이드를 핏빛 손톱으로 맞받아치며 뱀파이어가 차갑게 조소했다.
“참으로 귀엽기도 하시지…….”
오러를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 인간을 뛰어넘고 뱀파이어나 리치처럼 불사의 존재들로 거듭나 있는 자들은 오러의 힘을 쓸 수 없다.
그 대신 터무니없을 정도의 마력이 깃든 혈조(血爪)가 서슬을 뿌리며 시엔의 칼날을 튕겨냈다. 튕겨내는 동시에 뱀파이어가 땅을 박찼다.
딛고 있는 대리석 바닥에 크레이터가 생길 정도로 압도적인 각력. 쇠스랑처럼 휘둘러지는 핏빛 손톱의 위력도 마찬가지다.
공격할 때마다 기둥이 부서지고 대리석 벽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 오러의 힘이 아니다. 심지어 마력의 힘도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육체의 힘이다.
카앙, 캉!
‘내가 더 강하다!’
그 힘 앞에서는 설령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가 휘두르는 검도 의미가 없다. 아니, 튕겨내는 것도 벅차 보일 지경이다.
“이 늙은이가 듣기로…….”
성당을 붕괴시킬 기세로 휘둘러지던 혈조가 멈춘다. 숨이 막힐 정도로 흩날리는 분진 가루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께서는, 그 움직임이 마치 망령을 보는 것처럼 섬뜩하고 기이하다지요.”
압도적 힘의 격차에서 비롯되는 여유와 느긋함.
“그런데 이 늙은이 눈에는 그저, 소 궁둥이에 달라붙어 윙윙거리는 파리 새끼처럼 보일 뿐이랍니다…….”
인간의 굴레에 묶여 있는 육체로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초인적인 괴력. 그들에게 육체는 애초에 극복해야 할 대상조차 아니다.
찬미해야 할 신의 축복 그 자체였다.
‘비고 형이 아니라 망정이지.’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존재는 결코 시엔 또래의 형제자매가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설령 지금의 시엔조차 함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도 피를 흘린다. 하물며 지금의 시엔처럼 15살에서 19살 사이, 대부모의 보살핌에서 벗어나 홀로서기 임무를 시작할 때는 곁에서 지켜줄 사람도 없기에 더욱 위험하다.
‘내가 이 임무를 맡아서 다행이다.’
자기 외의 가족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결의를 다진 시엔이 칼자루를 고쳐 잡고 말했다.
“너는 여기서 죽는다.”
“정말 저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엾고 어린 공자님…….”
쇠스랑처럼 솟은 핏빛 손톱을 과시하며 뱀파이어가 조소했다.
“아니, 아니지요……. 죽는 것은 제가 아니라 공자님이랍니다……. 그 육체에 깃든 무한한 가능성이 꽃을 피울 새도 없이, 어른이 되어보지도 못하고, 이 늙은이의 양분이 되어 죽을 거랍니다…….”
“다들 자기는 다를 줄 알지.”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비웃었다.
“자기는 남들과 다르고 특별하니까, 지금까지 우리 손에 걸린 멍청이들처럼 죽지 않을 거라고.”
“…….”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비웃을 수가 없어졌다. 일대의 공기가 낯설어졌다.
‘뭐지?’
저주 마법? 결계 마법? 무슨 술수를 부렸지?
무엇인가 달라졌다. 그런데 정작 뭐가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허세를 부리는 것도 거기까지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애송이……!”
무엇을 벌벌 떨고 겁내는가.
‘나는 무적이다!’
불사의 힘, 이 힘을 손에 넣고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 물론 그의 피는 아니었지만, 남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죽기 싫었다. 죽고 싶지 않아서 뱀파이어가 된 것이다.
“네놈 따위가 이 몸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쿠웅!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혈기가 끓어올랐다.
“놓치지 않는다, 이 쥐새끼 같은 놈!”
카앙, 캉!
그의 몸에 깃들어 있는 혈기는 그냥 비유가 아니었다. 뱀파이어가 되기 위해 수십, 수백 명의 피를 탐하고 쌓아 올린 희생자들의 생명 그 자체였으니까.
「혈기폭주」.
일대에 피바람이 휘몰아치는 동시에 핏빛 손톱이 시엔을 향해 죽음의 궤적을 그렸다.
“오오, 이것이 젊음……!”
뱀파이어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희열에 떨었다.
‘내가 더 강하다! 내가 더 젊다!’
흘러넘치는 젊음을 폭발시키며 핏빛 손톱이 미끄러졌다. 격돌할 때마다 시엔의 자세가 무너져 내렸다.
‘지금이다!’
집요한 공성 끝에 요새가 함락되듯, 비로소 시엔의 자세가 무너지고 틈이 드러났다. 타오르는 혈기를 마지막까지 쥐어짜며 뱀파이어가 쇄도했다. 시엔의 가슴팍을 향해 쐐기를 박기 위해서.
촤악!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절명의 일격이었다.
툭, 후두둑.
피가 떨어졌다. 시엔의 몸에서. 그리고 자기 입에서.
“어……?”
시엔의 육체는 확실히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무너진 육체에서 그것이 솟아났다.
“뼈……?”
뼈가 시엔의 몸을 찢고 튀어나와, 흡혈귀의 목젖과 가슴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가시나무의 자세」─.”
그 이름처럼 사람의 몸에 있는 206개의 뼈, 그중 일부를 ‘칼날의 뼈’로 교체하는 개조 시술을 통해 손에 넣을 수 있는 기술.
갈비뼈, 늑골을 대신하고 있는 칼날의 뼈가 솟아나 흡혈귀의 목과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아무리 자세가 무너지고 무방비하게 틈을 드러내도 대응할 수 있는 최적의 방어 검식.
동시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아홉 가지 검식 중에서 유일하게 목격자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 침묵의 검식.
“이, 이게 무슨…….”
“내가 말했지.”
흐르는 핏물을 삼키며 시엔이 담담히 대답했다.
“너는 여기서 죽을 거라고.”
“아, 아, 아아아……!”
죽음과 공포의 그림자가 뱀파이어의 표정에 깃들었다. 도망칠 수 없다. 아무리 불사의 존재라 해도 목과 심장에 쐐기가 박히고 살아남을 수는 없다.
“사, 사, 살려…… 주십시오…….”
죽음을 기다리는 뱀파이어가 애걸했다. 그 애걸에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왜?”
콰직!
동시에 흡혈귀의 육체가 폭발했다. 체내에서 폭발이 일어나 터져나가듯,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며 산산이 흩어졌다.
“…….”
시엔의 짓이 아니었다.
“이름 없는 밤의 종자가, 감히 위대하신 밤을 걷는 자를 뵙나이다.”
목소리가 들린다. 기품 있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였다.
어느덧 예배당 입구에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러낼 때까지, 그 기척조차 깨닫지 못했다.
순백의 모피 코트를 걸친 흑발의 귀공자가 그곳에 있었다.
발밑에는 길 잃은 양들을 속여 왔던 사제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피가 모조리 빨린 미라처럼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채로.
“그리고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답니다. 설마하니 사람의 몸에서 뼈가 칼날처럼 솟아날 리가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모피 차림의 귀공자가 태평하게 시치미를 뗐다.
“제가 듣기로 ‘가시나무의 자세’는 절대 목격자를 살려두지 않는 검식이라 들어서 말이지요.”
“그래, 네가 보지 못했기를 바라야지.”
목격자는 살려둘 수 없다. 그런데 눈앞의 저 남자는 해당 자세를 목격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검식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저 남자는 방금 시엔이 쓰러뜨린 어린 개체, 레서 뱀파이어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함을 가진 동족이다.
시엔이 입막음하고 싶다고 해서 어쩔 상대가 아니다. 애초에 가시나무의 자세가 아무리 비밀스러운 검식이라 해도, 저 정도 괴물과 강자 앞에서까지 그 존재를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으니까.
가문의 하이마스터조차 두 명 이상이 모여야 겨우 호각을 이룰 수준의 괴물.
대륙 전체를 통틀어 그 수가 한 손에 꼽히는 최고위 뱀파이어, 엘더 원(Elder One)─.
그러나 당황할 것은 없었다.
“우리 가문과의 계약을 잊었나?”
오히려 싸늘한 목소리로 시엔이 추궁했다.
“철없는 어린것이 소란을 일으켜 무척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이게 철없는 애들 소란으로 넘어갈 일처럼 보이는 모양이지?”
시엔이 되물었다. 눈앞의 존재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드는 일 없이.
“이 일대를 다스리는 피의 영주로서, 너는 네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의무를 방기했다.”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질책하는 듯한 어조.
“도시 기능이 정지된 탓에 물류가 마비되고, 무역 일정의 차질과 함께 재정적 타격 역시 심각하겠지. 무엇보다도 평화의 증거가 될 시체까지 이렇게 엉망으로 망쳐놨으니─”
사방에 흩뿌려진 살점과 뼛조각을 뒤로하고 시엔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것참, 뭐라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왜 시체를 훼손했지?”
시엔이 차갑게 되물었다.
“서둘러 도움을 드리려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져서 말이지요.”
“그런 것치고는 사태가 다 끝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지.”
“아, 이래 보여도 꽤 빨리 온 거랍니다.”
성큼.
직전까지 성당 입구에 있었던 모피 코트의 귀공자가 시엔의 등 뒤에 나타나 속삭였다. 기척도 움직임도 느낄 수 없다.
“주교급 성직자가 뱀파이어로 거듭났다는 걸 정말 몰랐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방금 그 개체는 ‘레서 뱀파이어’의 힘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뒷배경 없이는 강함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흠, 그렇게나 강했던가요?”
“그래.”
“뭐, 그렇다고 치죠.”
시엔의 말에 흑발의 귀공자가 태평하게 시치미를 뗐다.
“그래서 어쩌실 겁니까?”
일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흑발의 귀공자가 섬뜩하게 미소 지었다.
“너는 우리 가문과의 약속을 깨트렸다.”
그럼에도 시엔 역시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약속을 깨트린 책임을 져야지.”
“이런, 책임이라.”
성큼.
“세상에 책임처럼 듣기 싫은 말도 드물지요.”
귀공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방금까지 등 뒤에 있던 실루엣이 시엔의 앞을 가로막았다. 순백의 모피 코트 자락을 가볍게 나부끼며.
“저는 이 세상에서 뭘 책임지는 게 제일 싫거든요.”
“책임이란 게 다 그렇지, 뭐.”
시엔이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그런데 내가 살아남을 줄 몰랐지?”
“…….”
“내가 레서 뱀파이어에게 죽고 피가 빨리면, 사태 수습을 핑계로 놈을 처치할 셈이었지. 흡혈 직후, 내 피가 놈에게 전부 융화되기 전에 말이야.”
시종 여유를 유지하고 있던 남자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그렇게 해서 놈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시치미를 뗄 셈이었겠지.”
그럼 결과적으로 눈앞의 뱀파이어는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고 시엔의 피를 손에 넣는 셈이니까.
밤을 걷는 자의 육체, 그것도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한 어린 육체는 특히 매력적이다. 최고위 뱀파이어─ 엘더 원조차 입맛을 다실 정도로.
“우리 가문을 상대로 그런 속 보이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을 계획하고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