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밤과 피의 주인 (2)
“그런 속 보이는 차도살인을 계획하고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나?”
“아, 제가 어찌 감히 그리 불손한 생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시엔의 추궁에 남자가 짐짓 시치미를 떼며 웃었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채 다섯을 넘지 않는 최고위 뱀파이어.
그런 그조차 두려운 것이다. 직접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에게 손을 대기에는, 감히 그 보복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적당한 명분과 핑계를 내세우려 했다.
“너의 ‘대리자’가 다스리는 캄파니아 백작령 남부의 골드 록(Gold Rock) 광산을 우리 가문에 양도해라.”
골드 록 광산, 공화국령 내에서 손에 꼽히는 대규모 금광.
심지어 그가 치러야 할 책임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리고 골드 록 광산보다 최소 세 배 값이 나가는 보물이나 아티팩트를 내게 넘겨라.”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금광을 가문에 넘기는 것은 영주로서 네게 마땅히 물어야 할 책임이고─.”
일순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귀공자를 향해 시엔이 말을 잇는다.
“보물을 넘기는 것은, 네가 나에게 치러야 할 입막음의 대금이지.”
“아, 입막음이라.”
“그래, 없던 일로 해준다고.”
시엔이 대답했다.
“내가 너의 같잖은 수작을 떠벌리고 다니길 바라진 않을 테니까.”
“저도 고자질을 썩 좋아하지는 않죠.”
남자가 위협적으로 미소 지으며 말을 잇는다.
“그나저나, 고자질쟁이의 입을 막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을 알고 계시는지?”
“왜 몰라? 우리가 그걸로 밥 먹고 사는데.”
시엔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데서 죽기 싫거든.”
“그럼요.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지요.”
시엔의 귓가에서 남자가 속삭였다.
“그나저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로 자란 도련님께서는 누구보다 잘 아실 테지요.”
“뭘?”
“죽음이란 도무지 우리를 배려해주는 법이 없음을.”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미소와 함께 흘끗 그의 송곳니가 엿보였다. 모피 털보다 하얗고 섬뜩한 순백이 서슬을 빛냈다.
그러나 시엔은 쉽게 동요하지 않는다. 아니, 동요할 수 없었다. 저 송곳니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을 내비치는 순간 그걸로 끝이니까.
“오래 살았겠지.”
“아, 그야 물론이죠.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래 살았답니다.”
“앞으로도 오래 살고 싶지?”
당돌하고 느닷없는 물음.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고, 나도 이런 데서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거든.”
시엔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너라고 다를 것 같나? 줄리오 체사레.”
시엔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말에 모피 코트 차림의 귀공자가 침묵했다.
“네가 살던 시대에는 ‘루시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 그런데 내가 발음을 제대로 했나 모르겠네. 하도 오래돼서 말이야.”
“!”
「트리아 노미나(Tria Nomina)」.
이 시대에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삼명법이라 불리는 까마득한 고대의 작명 방식.
수백 년 가까이 살아온 최고위 뱀파이어의 트리아 노미나…… 고대의 진명.
그 이름이 갖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고위 뱀파이어의 삶이 동족상잔의 삶이고, 자신의 역사를 지우는 삶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다.
“네가 저지른 수작을 우리 가문이 모를 줄 알았나? 천년 가까이 살아온 너의 지혜가, 아직도 우리의 뒤통수를 치고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속삭이는 모양이지?”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지?”
─줄리오 체사레, 그 시절에는 ‘루시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 불렸던 고대의 뱀파이어가 물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여유와 가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서, 당장에라도 시엔을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알아서 어쩌려고?”
“…….”
“내 목을 비틀어 막게? 내가 네 이름을 여기 오다가 어디 길바닥에서 주웠을 것 같나?”
물론 지금의 나이트워커 가문조차 저 괴물의 진짜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의 시엔은 그러지 않았다.
“혹시 모를까 봐 말해주는데, 사람 이름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거든.”
도발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여유와 허세를 부리며 시엔이 말했다. 설령 자신의 목을 비틀어도 그의 진명을 알고 있는 ‘가족’이 움직여줄 거란 듯이.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그렇게 열심히 자기 흑역사 아는 사람들을 잡아먹고 다닐 리가 없지.”
“…….”
“그리고 나는 지금, 우리 가문과의 약속을 깨트린 책임을 묻기 위해 이곳에 왔다. 어디서 너의 트리아 노미나를 들었는지 떠벌리려는 게 아니라.”
공기가 무겁다. 이대로 짓눌려 압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아무리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려 해도 압박감에 숨을 쉬이 쉴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폭풍이 그쳤다.
“부디 용서해 주시길, 돈 시엔.”
흑발의 귀공자, 체사레가 무릎을 꿇었다.
“천년에 가까운 삶조차, 이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를 일깨워 주기에는 너무 이른 세월이었나 봅니다.”
너무나도 정중하게.
“그리고 부디, 이 우둔하고 어리석은 자의 과오를 바로잡을 기회를 베풀어 주시지요.”
“어떻게?”
“저의 대리자가 다스리는 캄파니아 백작령의 골드 록 광산을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체사레가 말을 잇는다.
“부디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부서진 창날의 파편이었다.
“저의 작은 성의입니다.”
그러나 그 창날의 편린 앞에서는 시엔조차 평정을 지키는 데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운명의 창……!’
금광의 최소 세 배 값이 나가는 보물.
그것이 처음 시엔이 내놓은 요구 사항이었다.
그리고 지금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그까짓 금광 몇십 개를 합쳐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아티팩트 중의 아티팩트─ 「신기(神器)」다.
설령 그것이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산산이 조각나 있는 창날 파편 하나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제정신으로 나에게 이걸 주겠다고?”
“말씀드렸듯, 저의 작은 성의가 부디 마음에 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꽤 마음에 드네.”
“아, 그야 물론이겠죠.”
체사레가 정중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미소 짓는다.
“부디…… 꼭 마음에 드셔야 할 겁니다.”
시엔이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었고, 체사레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거절할 수 없는 거래. 동시에 시엔 입장에서는 이 거래가 성립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었다.
“우린 그가 누군지 모른다.”
“─Altum Silentium.”
흑발의 귀공자가 몸을 일으키며 화답했다. 일찍이 그가 살던 시절의 고대어로 ‘위대한 침묵’을 뜻하는 말이었다.
* * *
살레르노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얼마 후, 공작 가문의 저택.
“어서 들어오렴, 시엔.”
시엔이 집무실 앞에서 정중하게 노크하자, 라일라는 여느 때의 미소로 시엔을 맞아주었다.
“임무 도중 생각보다 까다로운 상대와 마주쳤더구나.”
“시체를 온전히 수습할 수는 없었지만, 별과 단검의 이름을 내걸고 주교의 죄목과 함께 남아 있는 ‘조각’을 광장에 내걸었습니다.”
“음, 아주 잘 해주었단다.”
라일라가 흡족하게 미소 짓는다.
“아울러 그곳을 다스리는 피의 영주에게, 이 사태의 책임을 물어 휘하 영지의 골드 록 광산을 양도받았습니다.”
“골드 록이라.”
라일라가 놀란 듯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그가 그 값비싼 금광을 순순히 넘겨주든?”
물론 순순히 넘겨줬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시엔이 잠시 망설였다. 망설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피의 영주는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깊은 유감과 사죄를 표했습니다. 그에 걸맞은 적절한 대가도 치렀고요.”
“네가 보기에는 합당한 대가라고 생각하니?”
“충분히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확실히 그렇겠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라일라가 웃었다.
“너에게 금광 지분의 3할을 양도할 거란다.”
“……!”
공화국 최대 규모의 금이 잠들어 있는 광산, 여전히 골드 록에서 채굴되는 금맥은 마를 줄을 모르고 있다. 그 지분의 3할이 갖는 가치는 절대 작지 않았다.
“어디에 쓰든 개의치 말고, 네 몫의 황금을 마음껏 쓰렴.”
“감사합니다, 어머니.”
시엔이 고개를 숙였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물론 그조차 네가 가진 ‘진짜 황금’에 비할 바는 아닐 테지.”
“어머니, 이것은…….”
“가지고 있으렴.”
미소와 함께 라일라가 말을 잇는다.
“네 것이잖니.”
시엔의 몸에 숨겨둔 운명의 창. 비록 부서진 창날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나, 그 정도 신기를 천하의 라일라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황금 광산을 손에 넣고 돌아온 것조차 상상 이상의 수확이다. 그런데 시엔이 가진 진짜 수확 앞에서는 그 황금의 광맥조차 빛바랠 지경이었다.
“몇 년 사이, 정말 몰라볼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했구나.”
그런 시엔을 보며 라일라가 흡족한 듯 미소 짓는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래,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라일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너는 그 마땅히 해내야 할 일들을, 너무나 잘 해내고 있어.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말이야.”
쓴웃음을 지으며 라일라가 말을 잇는다.
“─그래서 이 임무를 네게 맡길지 고심하고 있는 거란다.”
“무슨 임무예요?”
“밤매를 통해 전할 수 없는 일.”
지금의 시엔조차 쉽사리 믿고 맡기기 어려운 임무. 게다가 증거가 남을 우려가 있는, 서신의 형태로 전달할 수 없는 임무.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다.
“사실 불과 몇 분 전까지는, 내심 어려울 것 같다는 쪽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린 뒤였단다.”
“이제는 생각이 바뀌셨나요?”
“설마 「이름 없는 자」에게 운명의 창까지 얻어낼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 해도 그의 진명을 알지 않는 이상에야…….”
말하다 말고, 라일라가 설마 싶은 표정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이름 없는 자’. 그 별명처럼 이 대륙에서 그의 진짜 이름을 아는 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극소수밖에 없다. 지금 나이트워커 가문이 가진 정보력조차 그의 삼명(三名, 트리아 노미나) 중 체사레라 불리는 ‘딱 하나의 이름’밖에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설마 시엔이 진짜로 그의 풀 네임을 알고서 협박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
“혹시 그와의 협상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들려줄 수 있겠니?”
“서로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어요.”
“그리고 너는 대가로 침묵을 제공했구나.”
“맞아요.”
라일라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걸로 이해했다는 듯이.
“약속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은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그 약속은 설령 가주나 어머니의 요청이라 해도 함부로 깨트릴 수 없다.
그게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이 쌓아 올린 신뢰의 힘이었고, 그러한 신용이 있기에 비로소 그 괴물과의 거래를 가능케 했다.
역설적으로 천년 가까이 살아온 존재이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나이트워커 가문이 그들의 역사와 함께 쌓아 올린 신뢰를 자기 눈으로 직접 목격해 왔기에.
“저는 뱀파이어를 사냥했고, 협상 테이블에서 최고위 뱀파이어를 상대로 이 신기의 파편을 얻었어요. 이걸로 새 임무를 맡기에 부족한가요?”
“아니,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넘칠 지경이지.”
“그럼─”
“그래서 더더욱 망설여지는 거란다.”
오히려 ‘이름 없는 자’를 상대로 그런 빛나는 수완을 보여준 시엔이기에 망설여지는 것이다. 이토록 찬란히 빛나는 재능을 허무하게 잃는 것이 거꾸로 두려워진 까닭에.
“조금 더 내게 시간을 줄 수 있겠니?”
등 뒤로 쏟아지는 달빛이 산산이 부서지며, 그녀의 뒷모습에 창백한 역광을 드리웠다.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는 느긋이 휴식을 취하도록 하렴.”
“어머니, 저는 충분히…….”
“때로는 잠시 숨을 돌리는 것도 필요한 법이란다, 시엔.”
부드럽지만 그 이상의 이의를 허락하지 않는 목소리. 시엔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가문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확실한 수련 방법은 없다. 그게 어려운 임무일수록 더더욱. 그러나 라일라의 말처럼 때로는 가끔 멈추고 돌아보는 여유도 필요한 법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시간은 많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운명의 창’까지 손에 넣은 지금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이 신기의 힘을 오롯이 끌어내기 위해서는, 정작 시엔 쪽이 제발 시간을 달라고 부탁해도 모자랄 지경이었으니까.
“혹시 신기의 힘을 이해하고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될 때는, 또다시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
“그 말은…….”
“네가 쉬란다고 해서 순순히 쉬어줄 아이는 아니잖니.”
시엔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듯, 라일라가 쓴웃음을 짓는다.
“그래도 쉴 수 있을 때는 충분히 쉬어두렴.”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시엔 역시 멋쩍은 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 말이 옳다. 쉴 때는 쉴 필요가 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