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밤과 피의 주인 (3)
인간의 삶은 짧다.
그 짧은 삶 속에서 천재라 불리는 인간들이 검이나 마법을 갈고닦아 그랜드마스터, 대마법사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수십 년 남짓.
그렇게 정점을 찍고 나서는 천천히 늙어가며 노쇠해져 힘을 잃는다.
─인간의 삶은 짧으니까.
그럼 그런 천재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뱀파이어나 리치 같은 불사의 존재로 거듭나, 수백 년 넘게 수련을 거듭할 때는 어떻게 될까?
인간이던 시절에 70년을 바쳐 대마법사가 된 자가, 리치가 되고 다시 700년을 살며 마법을 수행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그 리치는 얼마나 터무니없는 마도의 괴물이 될까?
정답은 「생각보다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리치가 되고 마법 수행에 쏟아부은 700년의 삶보다, 하루살이 같았던 인간 시절에 쏟아부은 70년의 배움과 성장의 질이 월등하게 우위에 있으니까.
이것이 바로 【불사의 역설】이다.
죽음을 초월하고 멀어지는 존재가 될수록 성장의 정체(停滯)도 가속한다. 심지어는 불사자가 되고 나서 오히려 인간 시절보다 퇴화하는 경우 역시 적지 않다.
불사자가 되고 영겁의 삶을 수련할 수 있다. 불사의 존재로 거듭나며 인간 시절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초상의 힘도 손에 넣는다. 그 대가로 오러를 쓰지 못하는 것쯤 대가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세월을 쏟아부어도 인간 시절처럼 빠르게 성장하고 강해질 수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는 그 시점에서 성장을 멈춘다.
그렇기에 【불사의 역설】이란 장벽 앞에서 불사자들의 과제는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어떻게 해야 멈추지 않고, 인간이던 시절처럼 계속 강해질 수 있을까.
시엔의 손에 들린 ‘운명의 창’이 그 해답 중 하나였다.
자기 존재를 갈고닦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답을 찾는 것.
아티팩트다.
그것도 수백 년 넘게 살아온 존재가 의지할 정도로 강력한 힘과 역사가 깃든 아티팩트, 신기.
그중에서도 운명의 창, 또는 ‘롱기누스의 창’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감히 격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헨젤이 준 아티팩트 ‘왕 시해자’ 역시 강력한 힘이 깃든 무기지만 그마저 이 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신기는 그냥 손에 쥐고 있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공작 저택 지하에 있는 수련의 방.
일찍이 사이킥 마법을 수련할 당시 애용했던 흑승지옥을 포함한 ‘여덟 지옥의 방’들과 달리 아무런 장치도 되어 있지 않은, 그저 순수한 어둠이 가득한 일실.
「나락의 방」.
바로 그 나락에서 각오를 다진 시엔이, 손에 들린 창날의 조각을 힘껏 움켜쥐었다.
천년 가까이 살아온 뱀파이어조차 자신의 목숨처럼 애지중지하는 보물, 운명의 창.
물론 시엔의 손에 들린 것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다. 체사레가 준 것은 어디까지 수십, 수백 조각으로 쪼개진 창날 파편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니까. 심지어 지금의 그조차 이 운명의 창을 완전한 형태로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산산이 부서진 신기의 파편에는, 여전히 어마어마할 정도의 힘이 깃들어 있다.
라일라의 말처럼 쉴 때는 쉬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은 쉴 때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여기서 신기의 힘을 손에 넣어야 했다.
후우웅!
최고위 공격 마법조차 능히 버텨낼 수 있는 나락의 어둠이 불길하게 요동쳤다.
쿵!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성 그란델 대공 및 7인의 제국기사단장들.’
‘대현자 바르무어 후작과 5인의 제국 마탑주.’
동시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끔찍할 정도의 무력감 속에서 깨달았다.
‘그들에 대한 암살 혐의를 인정하나?’
훗날의 시엔에게 닥쳐올 운명이 그곳에 있었다.
지키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잿더미가 되어 불탔다.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 모두가 죽었다.
그런 운명이었다.
‘도망치거라, 시엔.’
마지막까지 가문의 도서관을 지키던 루나는, 제국의 최고위 이단심문관 부대에 홀로 저항하다 살해당했다.
헨젤과 그레텔도 죽었다. 제국에 산 채로 사로잡혀 죽는 것보다도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하다가.
미하일과 이자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최후는 특히나 끔찍했다.
일찍이 시엔이 사랑했던, 지켜야 할 가족들이 하나씩 살해당했다.
질식할 것 같은 무력감이 엄습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을 거란 절망감이 시엔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이것이 그 결말이다.
‘시엔.’
바로 그때, 또 하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시체가 산을 쌓아 올린 전쟁터였다. 그곳에는 시엔의 앞을 지켜주는 어머니의 등이 있었다.
암살자들의 어머니란 말조차 무색하게, 드레스 형태의 전신 갑주로 무장한 채로.
‘네가 내 아들이라서 무척이나 행복했단다.’
지금의 시엔에게 다가오지 않은 미래.
그러나 훗날의 시엔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뀌지 않았던, 고개를 돌릴 수 없는 미래의 풍경.
피할 수 없는 운명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부터는 네가 우리 가문을 이끌어갈 가주란다.’
‘어머니……!’
‘부디 살아남아 목숨을 보전하세요, 가주님.’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의 뒤를 이어 새로운 나이트워커 가문의 수장이 될 시엔을 향해.
‘경애하는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 우리 암살자들의 아버지시여─.’
그 시절의 시엔은 어리고 철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나이트워커 가문의 대를 잇고 가주가 될 정도로 충분히 성장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지금까지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신성 제국의 ‘진짜 지배자들’이 있었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라일라는 그들 앞에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
그녀뿐이 아니었다.
루나도, 헨젤과 그레텔도, 이자벨 누님도, 그 밉상스러운 미하일조차도 그런 식으로 죽었다.
삼촌이 죽고 이모가 죽고 형이 죽고 누나가 죽고 동생이 죽었다.
가문을 위해 죽은 게 아니다. 훗날의 가주를 지키기 위해서 죽은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손을 내밀려다 죽었다. 곱게 죽을 수도 없었다.
“이제는 아무도 죽게 놔두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조소하듯 되물었다.
“─그깟 창날 파편이 네놈의 운명을 바꿔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운명의 창.
창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이 아티팩트는 알기 쉬운 무기가 아니다.
「운명을 바꾸는 힘」을 가진 부적이다.
패색이 너무나 짙어 도무지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전쟁터의 운명, 일류 암살자의 표적이 되어서 꼼짝없이 죽는 날을 기다려야 할 운명.
심지어 ‘불사의 존재는 인간처럼 성장할 수 없다’는 저주 같은 운명도 극복할 수 있는 신기의 편린.
“고작 그 정도로 네놈 앞에 닥쳐올 운명이 달라질 거라고 믿나?”
그런데 그런 힘을 가진 부적조차 훗날의 시엔에게 다가올 운명을 바꿔줄 수는 없었다.
정말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시엔의 앞에 펼쳐진 것은 가혹하고 혹독하며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지금의 불완전한 창날 파편이 아니라, 설령 완전한 형태로 갖고 있다 해도 바꾸지 못할 강력한 운명.
“그래, 이걸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시엔이 대답했다.
“내 운명은 내 손으로 바꿀 테니까.”
“그럼 어째서 신기의 힘에 집착하는 거지?”
“네가 내 손에 있으니까.”
운명을 바꾸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엔 자신의 손이다. 그리고 지금, 시엔의 손에는 이 창이 들려 있다. 그렇기에 그 힘을 움켜쥐는 것뿐이다.
“운명은 내가 바꿀 테니, 너는 돕기나 해라.”
이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신기급의 아티팩트는 그냥 갖고 있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증명해야 했다.
자신이 이 ‘운명의 창’을 소유하고 다루기에 적합한 자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
신기 그 자체에─.
“이제부터 내가 너의 새로운 주인이다.”
쿠웅!
직후 시엔을 옥죄고 있던 벽돌 같은 어둠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손가락도 까딱할 수 없는 무력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기이한 전능감(全能感)이 휘몰아쳤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무엇이라도 바꿀 수 있을 듯한 감각, 주위에서 바람처럼 불고 있는 ‘운명의 기류’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느끼고 있던 전능감의 실체를 깨달았다.
「운명을 조작하는 힘」.
바로 그 힘이, 마치 오러나 마력처럼 시엔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훗날 이 신기를 거의 완전한 형태로 가지고 있던 체사레와 맞서 싸울 때를 떠올렸다.
그가 이 신기로 운명을 조작하고 싸우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리고 전투 도중 뒤틀릴 대로 뒤틀린 힘의 여파로 신기는 소멸하고 체사레는 시엔에게 패배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아티팩트 중 하나가 그렇게 부서진 것이다.
이제는 아니다.
그 힘이 비록 일부이기는 해도 이제 시엔의 것이 되었다. 심지어 지금의 체사레가 아직 손에 넣지 못한 창날의 나머지 조각이, 대륙 곳곳에 잠들어 있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죽여야 할 것들을 죽이기 위한 힘. 죽기 전에 죽이기 위한 힘.
불사의 역설에 가로막혀 성장이 멈춘 존재가 더욱 강해지기 위해 찾아 헤매는 해답이 자신의 손에 들려 있다.
심지어 시엔은 불사자가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고 성장하는 인간이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강해질 것이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런 시엔이 불사의 역설을 극복하기 위한 신기의 힘까지 손에 넣었다.
요동치는 힘을 필사적으로 통제하며 시엔이 고개를 들었다.
* * *
시엔에게는 넘치는 재능이 있었다. 아니, 재능이란 말도 부족했다.
그렇기에 시엔을 돌려보내고 나서, 집무실에 홀로 남아 있는 라일라는 생각에 잠겼다.
시련 없이 사람은 강해지지 않는다. 불사의 역설에 가로막혀 정체된 존재들과는 달리, 인간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은 늘 죽음의 위협이 곁에 있는 까닭이니까.
인간을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고통은 말 그대로 죽을 정도의 고통이 아니고서야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시엔을 잃는 게 두렵다고 해서 적당하게 손쉬운 임무를 맡기는 것은, 장기적으로 그 아이의 잠재력을 억누르고 성장에 발목을 잡을 뿐이다. 그래서야 불사의 역설에 가로막혀 있는 존재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지금의 시엔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하루가 멀다고 성장하는 시엔의 성장세는 그녀조차 경이로울 지경이었으니까.
그 정도 실력의 암살자가 죽음을 곁에 두고 수행할 정도의 임무. 그런 임무를 맡기는 것은, 지금의 라일라조차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이다.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스스로 나락에 들어갔던 그녀의 아들이 태연히 돌아왔다. 최강의 신기 ‘운명의 창’에 깃든 힘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손에 넣고.
“어때요, 이제는 생각이 좀 달라졌죠?”
“음, 글쎄.”
라일라가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놀라움도 경이로움도 아니었다. 그저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오히려 이제는 너무 손쉬운 임무가 아닐지 걱정이구나.”
웃음 끝에 라일라가 말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